〈 144화 〉 3부 24. 트라우마, 트라우마, 트라우마. 그 뿐?
* * *
ㅡ인간인 것과, 인간이 아닌 것.
차이는 그렇게 크지 않다.
모두 생명이라는 하나의 틀 안에 묶여있으니.
그러나 그 생명이라는 게 무엇이냐 묻는다면, 그건 또 복잡해진다.
깊게 들어가면 그걸 또 구분할 수가 없거든.
그러니...그 모든 것의 본질이 보이는 세상이라면,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예를 들자면.
인간과 동물, 생명과 무생물, 빛과 어둠, 그리고 선과 악이 전부 모호한 세상으로 온다면.
그리고 그것이, 이 모든 것의 본질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을때는.
어떻게 반응할까?ㅡ
"어지러워 죽겠네..."
ㅡ알고보면, 우리가 사는 세상은 전부 환상.
규칙도, 법도, 질서도 전부 인간이 제정신을 유지하며 살아가기 위해 창조된 것.
우주는 그 근본부터가 혼돈 그 자체였다는 걸 알게된다면, 과연 몇이나 되는 사람이 그 정신을 붙들고 있을 수 있을까.
사실 내가 지금껏 살아왔던 인생이, 시간이 전부 의미없는 것들이었다는 걸 알게될텐데.
우주 자체가, 신이 그렇게 말하고 있으니까.ㅡ
"아가리좀 싸물어봐...지금 머리 복잡하니까."
ㅡ생명이 존재하는 이유는, 그저 번식하기 때문.
생명이 존귀하기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번식'이라는 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생명이 존귀하다는 것 또한 환상이다. 인과관계를 엇갈려 해석한 생명들의 패착이다.
세상은 모조리 환상이야.
사실은 그 존재 이유라는 것도 없거든.
그저 존재하기에 존재할뿐.
생명이 존재하던 말던, 인간이 죽던 말던, 내가 행복하던 말던.
그런 건 아무 상관 없어.
세상은 그런 것 없이도 잘 존재하니까.ㅡ
"그냥 내가 귀를 막고 말지, 씨발..."
추상미술과도 같은 세계속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란 혼란스럽기 그지없다.
두서없이 마구잡이로 내뱉는 말.
그저 세계 전체를 울리는 말.
내가 대체 어쩌다 이런 곳에 떨어지게 된 걸까.
'저번엔 그냥 숫자 몇 줄만 보여주고 끝났잖냐. 이번엔 대체 뭐가 문젠데.'
모든 것은 괴물과 접촉한 직후였다.
그게 대체 뭔 짓을 한건지, 눈을 떠보니 이런 세계더라.
물리적으로, 진짜로 이런 세상으로 전이된건지, 아니면 정신만 이런 환각을 보고 있는건지 구분이 잘 안 간다.
일단 상식적으로 생각해보면 후자긴 한데...
"...아무리 생각해도, 나보고 뭘 어쩌라는거야."
자신의 정신세계로 불러들여서 사상이라도 전염시키고 싶은건가?
바라는 건 없이 그저 자신의 붕 떠다니는 생각들로만 가득 찬 세상이었다.
지금 내딛고 있는 땅은, 오로지 황야뿐.
싸늘한 모랫바람만이 불어닥치는 평지다.
땅 깊숙이 파묻혀있는 오래된 건물의 폐허는 이 세상이 어떤 테마로 만들어졌는지 대강 짐작하게 해준다.
멸망 이후의 세계...라는 건가.
"후우..."
하늘은 온갖 색깔의 물감을 계속해서 덧칠한 듯, 괴이한 색으로 물결치고 있다.
하늘 저 가운데 떠있는 검은 태양은 분명 흑색인데도 불구하고 땅을 어렴풋이 비춘다.
그 덕에 가시거리는 상당히 넓다.
이런 평야에 온종일 앉아있어봐야 지루하기만 할 것 같으니, 일단 움직여보기로 결정했다.
자리를 털며 일어난 나는, 맨발로 황야를 거닐기 시작했다.
"옷은 왜 또 다 뺏어간거야, 그러고보니까."
지금 내가 입고 있는 옷은, 그저 옆구리가 훤히 트인 새하얀 실험복 단 하나.
꽤나 익숙한 복장이었다.
'이 옷을 보면...여긴 무의식같은 곳이라 봐도 타당하겠지?'
내가 보통 정신세계에 빠졌을때 입고있는 옷이 이 옷 뿐이었으니까.
저 먼 옛날, 알테리지아에 의해 무의식으로 가라앉았을때도, 육체를 잃고 정신만 날아다닐때도 모두 이런 복장이었다.
전이시킬때 복장까지 굳이 바꿀 필요도 없거니와, 그 난이도도 상상을 초월하니, 이건 무의식 속의 세상이다.
확실해.
'하지만 누구의 세상이지?'
누구긴 누구야, 그 괴물이겠지.
한때 인간이었으니 의식이라는 것이 어딘가에는 티끌이나마 남아있었을 수도 있다.
난 지금 그 의식에 끌려들어온 신세인거고.
물론 이런 무의식에서 나갈 방법이 없는 건 아니다.
첫째로, 이것이 환상임을 인지할 것.
둘째, 이 세상에서의 자신을 버릴 것.
한마디로, 그냥 자살하면 끝이다.
모 거장 영화감독의 영화가 떠오르는 설정이다.
꿈에서 벗어나고 싶으면, 자살하면 그만이라니.
'...그냥 바로 나가버릴까?'
아니다, 이건 너무 섣부른 판단이야.
괴물의 무의식에 들어온 게 이번 기회가 유일할 수도 있는데.
이전에는 그냥 졸도하거나, 숫자 몇줄만 보고 끝냈으니까.
"...정보는 최대한 얻고 나가자. 어떻게 들어온 곳인데."
그런 심정으로 하염없이 황야를 걸어다니기로 결정했다.
***
"오."
체감시간으로 대략 세 시간 즈음 걸었을까.
저 멀리, 자그마한 주점 하나가 보이기 시작했다.
창문으로 따스한 빛까지 흘러나오는 걸 보니 확실히 주변의 폐허와는 다르다는게 느껴졌다.
홀로 빛나니 이런 모래폭풍 사이에서도 눈에 확 띄기도 했고.
딸랑~
"실례합니다..."
주점의 문을 열자, 청량한 종소리가 울렸다.
인사를 하며 들어갔음에도 안에서는 그 어떠한 소리조차 들려오지 않는다.
주인이 없는건가?
"저기요?"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어 주점을 돌아보려는 찰나.
주점의 구조를 확인한 내 얼굴은 순식간에 굳어간다.
"...뭔데, 이건."
알고보니 이건 그 괴물의 무의식이 아니라 나의 무의식이었나?
여긴 대체 뭐지?
굉장히 익숙한 구조의...주점이었다.
물론 루시의 몸으로 살아오며 방문한 주점이 마냥 한 군데만 있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이 주점은 특히나 뇌리에 각인되어 있다.
"...아무도 없는거 맞죠?"
그야, 윤서아에게 납치되었을 때 끌려들어갔던, 해방자들의 아지트였으니까.
트라우마로 가득 차있는 공간.
다시는 오기 싫었던 공간이다.
본래 세계에서야 이미 한창 재건축중이라 사라진 지 오래였지만, 어째서 이게 여기에 남아있는가.
"으음..."
조심스럽게 주점 안으로 발을 들이밀자, 낡은 마룻바닥이 삐걱이는 소리를 낸다.
적막한 주점 안에 내 발소리만이 울려퍼졌다.
"꺄아아아악...!"
그러다, 주점의 바 저 뒷편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몸이 턱ㅡ굳었다.
"뭐, 뭐야, 씨발."
분명 비명소리였다.
심지어, 목소리가 굉장히 익숙하다.
한 평생 들어왔던 목소리, 나의 목소리였다.
다만 조금 감정이 섞이고, 더 여려진 목소리라고 해야하나.
마치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가 내는 목소리같았다.
끼익...
조심스럽게 바 뒷편의 문을 열고 들어가자, 익숙한 숙소의 구조가 나온다.
저 끝까지 자리잡은 긴 복도, 양 옆을 채운 여덟 개의 문.
방 하나하나가 그 벽을 굳건히 지키고 있다.
내 발걸음이 옮겨가는 곳은, 복도 가장 깊숙한 곳의 어두운 방.
"그으으윽ㅡ!"
저 방의 문 사이로, 계속해서 나의 비명소리가 새어나온다.
고통에 가득 찬 목소리.
떨리는 몸을 부여잡고 방 앞에 선 나는, 고민했다.
"...꼭, 봐야하나?"
이미 눈치챘다.
이건 결코 타인의 무의식이 아니다.
나의 의식이 반영된 시점에서, 결코 타의에 의해서만 영향을 받는 무의식이 아니다.
'인간이 무엇인가?'
본질부터 하나로 연결되어있는 존재.
결국, 타인이 타인의 무의식에 간섭하는 순간, 결국 간섭하는 타인의 의식 또한 간섭당하는 타인의 무의식에 영향을 줄 수밖에 없다.
미친듯이 복잡한 말이지만,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다.
한마디로, 여기가 비록 남의 무의식일 지언정, 내가 들어오며 나의 의식 또한 영향을 주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이건...
"이 세상이 내 생각마저 반영하진 않을거라 생각했는데..."
나의 트라우마.
인생의 한 구석을 장식한, '루시'로서의 인생의 시작점.
고통받고, 구원받고, 구원한, 그런 인생의 시작이었다.
루시로서의 진짜 인생은, 어쩌면 윤서아에게 유린당하는 그 때가 시작이었다.
지금까지 살아온 내가 그렇게 느끼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이렇게 나타난 걸 보면.
끼이익...
무거운 소리와 함께 천천히 열리는 문.
복도의 빛이, 어두운 방 안으로 스며들어간다.
조금씩, 조금씩.
문이 모두 열리고, 빛은 모두 들어간다.
하지만 빛이 의미하는 건 구원이 아니다.
그저 '명백한 진실'뿐.
빛은 구원해주지 않고, 그저 진실을 조금 더 명확하게 보게 해줬다.
"카학, 그흑..."
붉게 물든 침대 위에 누워있는 건, 다 찢어져 맨살을 모두 드러내보이는 교복을 입은 채, 축 늘어져있는 나.
지금의 모습보다는 조금 더 성숙한 모습이다.
아카데미에 다닐 적, 적어도 키 150까지는 오던 모습.
그녀의 눈은 온통 눈물로 범벅되어있다.
적나라하게 드러난 뽀얀 복부는 이미 미친듯이 헤집어져 걸레짝이 된 후였다.
차마 봐주기 힘든 모습이다.
그 속에 들어있는 붉은 내용물이, 모두 처참하게 찢어발겨진 모습은.
가냘프게 떨리는 몸이, 수축된 동공을 통해 뇌리에 각인된다.
내가 저런 모습이었나.
'아니, 난 저런 모습은 아니었잖아.'
아니었나?
저게 정녕 나 맞나?
어째서 지금 나는 날 보고 있는거지?
콰직!
순간 들려온 고깃덩이를 물어찢는 소리에, 다시 정신이 현실로 되돌아왔다.
쿠득, 콰득.
계속해서 재생되는 '루시'의 몸을 유린하고 있는것은 서아도 뭣도 아닌 나 자신.
머리가 검게 물든, '나' 였다.
'내'가 세 명.
모두, 현재 내 키와 비슷한 모습이었다.
침대에 누워있는 루시보다 훨씬 어린 모습.
방 안을 가득 덮는 피분수 속에서 웃고있는 것은 그 셋 뿐.
거대한 구멍이 뚫린 루시의 몸 속으로 계속해서 고사리만한 손을 집어넣는 것도, 그 셋.
그 속에서 내장을 끄집어내는 것도, 전부 그 셋.
가히 지옥도다.
내가 나를 유린하고, 먹어치운다.
솜인형마냥 찢어지는 침대위의 루시와 눈이 마주쳤다.
하지만 그녀는 날 보지 못하는 듯, 초점이 나에게 오질 않는다.
'...환상인가.'
전부 환상.
트라우마 또한 환상.
절망 또한 환상.
기쁨은?
행복 또한 환상인가?
모르겠다.
"아."
어쩌지.
지금 너무 깊게 생각하고 있는 것 같은데.
뭐랬더라, 한서우가.
"으...돌겠네."
"크흣, 히익!!"
루시의 하복부에서 뽑혀나온 창자가 내 발 끄트머리에 떨어졌다.
맨발에 말랑거리는 내장의 감촉이 닿는다.
역겹다기보다는 애처로운 느낌이다.
찬찬히 앞으로 몸을 움직였다.
침대에 묶여 발버둥치는 루시에게로.
순간 검은 '나'들이 나를 바라봤다.
저들은 나를 볼 수 있는건가.
하지만 나에게 어떠한 제지도 안하고, 그저 다시 활짝 웃는 표정으로 루시의 복부 속으로 손을 쳐넣는다.
그러면서 마구 휘젓는 모습이, 꼭 모래로 장난을 치는 어린아이들같다.
"...아직까지 남아있었구나, 이런 생각이. 나에게는."
살며시 침대에 누워 헐떡이는 루시에게 손을 갖다댔다.
보드라운 피부의 감촉이, 벌벌 떨리는 근육의 감촉이, 매끄러운 복부를 타고 흘러내리는 핏줄기의 감촉이 느껴진다.
혈액과 눈물은 모두 하나가 된 채 구분할 수 없을 지경.
복부에 갖다댄 손이 루시의 뱃가죽 속을 헤집는 그들의 진동을 모두 전한다.
도무지 상상이라고 보기에는 어려운 감촉.
허나 분명 상상인 것들.
"...결국 이런 절망도 다 환상일 뿐인데, 아직까지 왜 가지고 있던건지."
한서우가 떠오른다.
마지막도.
우리가 원하는 건 과거가 아니라 그저 미래일 뿐이라는 말.
현재또한 과거의 연장선.
우리의 목적지가 있는 곳은 미래 뿐.
"...하하."
살며시 웃음이 새어나왔다.
실소는 아니었다. 단순한 깨달음의 웃음.
"복잡하게 생각할 거 없잖아."
과거는 절망 뿐.
잊을 필요는 없다.
허나 그것에 묶여서는 안된다.
내가 한서우에게 말했던 내용이다.
하지만 정작 나는 그걸 지키지 못했나봐.
하기사 당연한 이야기다.
보통 사람들이 말하는 이상향은 아직 자신이 도달하지 못한 것이니까.
그렇기에 나는 한서우처럼 되고 싶었다.
"...잘 있어라, 빌어먹을 새끼들아."
한 순간에 검은 '나'들의 모가지가 모조리 잘려나갔다.
루시의 뱃속을 헤집던 작은 손들부터 시작해, 그들의 몸은 서서히 증발하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웃음소리가 들려온다는 것.
그러나 그게 소름끼치는 웃음소리가 아니라, 그저 순수한 목소리였다는 것.
침대 위에 죽은 듯 누워있던 루시도 증발한다.
검은 가루를 흩뿌리며.
"...그래, 전부 나였지."
나에게 고통을 주는 것도, 고통을 끌고 가는것도, 한 구석에 남아있던 희망을 좀먹던 것도.
"후우...이런 환상이 왜 이제야 나타나는 건진 모르겠네."
혹시 그 괴물이 뭔가 특별한 거라도 있었던걸까.
쿠구구궁...
묵직한 진동을 내며 주점이 가라앉기 시작했다.
입 한 구석에 미소를 띄운 나는 여유롭게 그 주점을 빠져나왔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