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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해주세요, 마수님!-137화 (137/162)

〈 137화 〉 3부 17. 패착과 오만

* * *

­쿠웅!

예상하지 못했던 결과는 아니다.

자신들의 '진화'를 위해 소수의 희생도 감수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 애들인데...

목숨을 그렇게 하찮게 여기는 부류라면, 보통 자신의 신념을 굽히는 경우는 거의 없다.

지원을 요청하지 않아 다행이다.

상대방이 엘로힘이라는 것의 힘을 불완전하게 받아들였다고는 해도, 그게 인간을 초월하는 경지인 건 당연하니까.

신의 발톱이 인간보다 강한 건 어쩔 수 없는거다.

태어나기를 그렇게 태어났는데.

인간이 그런거지.

"예상대로야, 역시."

사방에서 휘몰아치는 검은 마력들을 보며 중얼거렸다.

한서우는 이미 뛰어들어오는 저돌적인 짐승들에 맞서 검집을 씌운 대검을 휘두르는 중이었다.

아직 인간 상대로는 대검을 써본적이 없다, 이거지.

살육은 본능적으로 싫어하는 타입인가보다.

뭐, 그렇다면야 내가 죽이면 되는거지.

굳이 한서우한테 찝찝한 감정 만들게 하는것도 싫고.

­콰직!

땅 위로 퍼져나간 금빛 실에서 온갖 가능성이 느껴진다.

모두가 길이다.

마음만 먹는다면, 나는 이 실 안에 녹아들 수 있다.

이게 역시 힘의 본질이라는건가.

금빛 실이 본질이라니, 검은 신격 치고는 참 밝은 색이다.

"선택이 그렇다면야...나도 죽이는데 꺼릴 이유는 없지."

상대는 이미 인간을 그만뒀다.

이거 어디서 많이 본 클리셰인데.

"사망플래그도 씨게 세웠네, 불쌍하기는."

인간을 그만둔 놈들은 대부분 그 끝이 좋지 않다.

너희들도 그렇겠지.

­콰각.

거센 파공음이 들려온다.

아니, 파공음이라기에는...

지나치게 날카롭네.

꼭 칼이 벽을 가르려 애쓰는 소리같다.

­쿠우웅!

사태를 인지한 나는 곧바로 고개를 숙였다.

­피잇ㅡ

뒤이어 머리 바로 위로 지나가는, 붉은색의 참격.

귀가 멀 듯한 굉음이 들리며, 뒤에 자리잡고 있던 거대한 빌딩의 폐허가 조각조각 주사위처럼 갈라지며 무너져내렸다.

"우와, 미친..."

직접적인 타격도 아니라 오로지 '마력'이었다.

원거리에서 저딴 수준의 위력을 구사하다니...

[...결코 너희처럼 인생이라는 것에 굴복하지는 않는다. 나는 우리의 위에 절대적인 존재가 있다는 것을 부정하겠어.]

"웃기고 있네."

이성주가 흉악하게 생긴 붉은 검을 들고있었다.

길이가 어찌나 긴지, 한서우의 대검보다 두 배는 더 길다.

얇고, 긴 장검.

"고작해야 넌 가족이라는 것에 소속감을 느끼고 싶었을 뿐이야.

[멋대로 판단하지 마. 나는...]

"멋대로 판단은 개뿔, 스스로도 모순적인 행적에 의문을 가져본 적은 없냐?"

인류의 진화를 추구한다며 포장해봤자, 결국 살인자인건 변함없다.

동료를 배신하고, 가족을 배신하고, 그 끝에는 배신하고 들어간 집단의 수장마저 배신했다.

가볍고, 박쥐같은 녀석이다.

"넌 그때그때 자신의 상황에 맞춰 합리화만 지껄일 뿐이야, 이성주."

[나는ㅡ 인류가 스스로의 길을...!]

­콰앙ㅡ

한서우가 휘두른 대검에, 검은 마력을 뒤집어쓴 사냥개 한 명이 이성주와 내 사이를 가로질러 건너편 벽으로 날아갔다.

그 사이, 이미 이성주와 내 눈은 싸늘하게 물들었다.

교집합은 없다.

오로지 여집합.

상대는 자신이 잘못된 걸 이미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부정하고 있을 뿐.

차라리 자신이 궁극적으로 옳다고 믿었다면 나도 그에 대한 시선이 조금은 달라졌으리라.

어차피 옳고 그름은 결국 주관적이라, 누가 보느냐에 따라 달라지니까.

그러나 저 새끼는...알고 있다.

알고 있으면서도.

"위선자는 너다, 이성주."

[...너.]

"너의 목표는 자신의 안위, 소속감, 오로지 자신의 행복뿐, 그 외의 거창한 이유는 그저 자기 위안을 위한 같잖은 핑계들 뿐이잖아."

이성주의 얼굴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그러고보면, 이성주가 지금 가장 원했던게 뭐더라.

짐승에서 인간으로 거듭나는 것.

즉, 인간에서 엘로힘과 같은 준 신적인 존재가 되는 것.

그 이유는ㅡ

자신의 가족, 이유리, 이유나와 같은 힘을 얻음으로서, 옆에 있다는 것에 소외감을 느끼지 않기 위해서.

'웃기는 일이지.'

어차피 그 둘은 처음부터 이성주를 멀리하지 않았는데 말이야.

그냥 지 혼자 열등감에 부들대다가 자폭한 것 뿐이다.

배신에 배신을 거듭하고선.

종착역은...

"...이유리 손톱은 괜찮냐?"

[그 입 닥쳐ㅡ!]

그 순간, 천지가 뒤흔들리며 굳센 콘크리트들조차 가루로 붕괴되며 무너진다.

쩌렁쩌렁 울리는 메아리가 먼지에 매몰된폐허를 덮었다.

"루시!"

"아무 일도 없어, 괜찮아."

먼지를 뚫고 한서우가 튀어나왔다.

달빛조차 비추지 않는데도 잘 찾아오네.

대검은 이미 검집이 많이 금이갔다.

용케 부서지지는 않았다.

"사냥개들은 얼마나 처리했어?"

"처, 처리라니."

"...얼마나 무력화시켰어?"

한서우가 손가락 두 개를 펼쳤다.

"두 명?"

"아니, 열 두 명."

세상에, 검집만으로도.

이새끼도 역시 탈인간이야. 인간인지 의심해봐야한다.

[그 말, 후회하게 해주마. 니가 뭘 잘못했는지 처음부터...뼈저리게 느끼게 해주지.]

안개속에서 소름끼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파앙!

뒤이어 발생한 풍압에 폐허를 덮고있던 먼지가 한순간에 증발했다.

걷힌 안개 너머에서, 붉은 장검을 쥐어잡은 이성주가 눈에 들어온다.

이미 반쯤 검게 물든 오른팔에, 붉은 안광까지.

피부는 잿더미가 되며 시시각각 떨어지고 있었다.

"...얼마 못가겠네, 저거."

"저 사람을 회유할 방법은 없는거야?"

한서우가 걱정스럽게 중얼거렸다.

"너도 참 병적이야, 그러고보면."

"...왜?"

"니가 지금까지 죽인 사람은 연구자들밖에 못봤다. 뭐, 연구자들도 사람은 아니다만."

병적일 정도로 사람이 죽는걸 싫어한다.

그 덕에 영웅이 될 수 있었던 거겠지만.

"넌 여러모로 저 아저씨랑 다르네."

"...칭찬이야?"

"당연히 칭찬이지, 빡대가리야."

한서우의 등짝을 퍽 때렸다.

"검집 빼, 쟤들은 이미 인간이 아니야."

"...인간을 위한다고..."

"그저 핑계지. 다른 놈들은 몰라도, 이성주 저 병신은 더욱 더."

가만히 놔두면...

"같은 인간마저 죽일거야. 이미 죽인 인간만 두 자릿수가 넘어가겠지만."

그 말을 들은 한서우는 잠시간 멍하니 나를 바라봤다.

말없이 주변을 둘러보고선, 검은 살점과 '학자'의 심장을 보더니 하는 말.

"...그래."

카각, 하는 묵직한 소리와 함께 대검이 뽑혀나온다.

먼지가 걷히며 폐허 속으로 들어오기 시작한 월광이 그 위에서 빛났다.

'신념 하나만큼은 확고하네, 얘도.'

상대가 자신의 세계에 어긋남을 확실시하면 망설임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오로지 인간을 지키기 위해서.

결단이 확실한 놈이다.

그리고 전장에서 가장 필요한 아군은, 한서우같은 놈이고.

다시 고개를 돌려 바라본 이성주는 이미 반쯤 정신이 나가있었다.

연구도 제대로 안 된 시점에서, 무지성으로 심장만 먹어치웠구만.

"...갈 땐 제대로 보내줘야지."

얼마 지나지 않아, 거대한 폭음이 터져나오며 주변의 폐빌딩들이 차례차례 무너지기 시작했다.

***

워낙에 멀리 떨어진 곳이라 그런지, 캠프에서부터 사람이 오지는 않았다.

그도 그럴게, 애초에 공식적인 기관들이랑은 적대하는게 연구자들인데 캠프 옆으로 전이할 이유가 없지.

어떻게 이 우주로 의도적으로 전이할 수 있었냐는 둘째치고...

뭐, 간단히 생각해본다면 학자가 신격을 받아들이기 이전, 그의 '물리적' 심장까지 가지고있는 놈들인데..

불가능한게 뭔가 싶긴 하네.

여하튼.

결국 그들이 별 개짓거리를 다해서 신격을 받아들인다 해도, 아니, 신격이 아니라 엘로힘의 불완전한 상위차원 간섭능력이라고는 해도...

결국 그들은 엘로힘에게조차 미치지 못한 반쪽짜리였다.

인간이 아무런 준비도 없이 엘로힘의 힘을 받아들이려했다.

전투 도중 절반은 그 여파로 온몸이 잿가루로 붕괴하며 리타이어했다.

나머지는 아예 전투 도중 정신이 나가버려서 죽이기는 손쉬웠고.

[끄극...]

몸과 분리된 사냥개가 마지막 단말마를 내뱉었다.

목에서는 질척이는 검은 액체가 흘러나온다.

­쿠웅!

어느샌가 평지로 변해버린 폐허는 이제 그 굉음이 잦아들고 있었다.

한동안 미친듯이 휘몰아치던 바람도, 불길도 전부 사그라든다.

고개를 돌린 곳에서 보인 건, 손잡이를 잃은 채 검신만 남아있는 피로 된 장검이었다.

[...하, 하하.]

이미 오른팔이 잿더미가 되어 떨어지기 시작한 이성주.

저 손에 쥔 칼덕에 나도 배와 가슴이 한번씩 꿰뚫리는 치명상을 당했지.

어차피 눈 한번 깜빡이면 금방 나아서 별 효과는 없었지만 말이야.

'그러고보면 이성주는 질 걸 알고 싸웠던건가.'

이전에 이 세계로 돌아온 뒤, 이성주와의 첫만남 때 눈앞에서 심장을 뽑혔다.

그때는 신격이 있었지만.

'하긴, 이성주는 지금 내가 학자한테 신격을 모조리 빨린 상태라는 것도 알잖아.'

내 신격이 모두 사라졌다는 것, 이성주 자신은 엘로힘의 힘을 받아들였다는 것.

그런 생각에 근거해 승산이 있다 판단하고 덤볐던 걸 수도 있겠네.

패착은 뭐...내 마력이 이미 신격을 대체할 수 있을 정도로 방대했다는 점이겠지.

[...나는...]

"...핑계는 그만 둬. 어차피 다 끝났으니까."

이성주가 무릎을 꿇은 채 바닥에 주저앉아있다.

오른팔에서 시작된 붕괴는 점차 몸으로 퍼져나간다.

[그래, 그렇지. 하긴 니들은 태어나면서부터 이 세계의 주인공이었을테니. 자신이 특별하다는 감각을 가지고 살아온다면 이해 못할법도 하지.]

"...허."

이새끼가 이젠 죽을때 되니깐 머리가 헤까닥 돌아버린건가.

내 기억을 전부 보여줘?

'아니, 분노는 삭여야지.'

차근차근 들어오는 기억이라면 몰라도, 내 기억을 한번에 모두 받아들이면 쇼크사할 가능성이 크다.

설령 살아남는다 해도 정신분열에 무기력증, 외상 후 스트레스 증후군, 공황장애가 복합으로 올테니...

그리고, 그건 이미 살아있어도 지옥이고.

어차피 살아남을 가능성은 없다.

쇼크사를 안한다고 해도, 몸 전체가 엘로힘의 힘을 감당하지 못하고 붕괴할테니까.

[왜, 내 말이 틀렸나?]

"죽을때까지 그렇게 생각하고 싶으면 하던가. 근데..."

한서우를 뒤에 두고 이성주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머리채를 붙잡고 나와 눈을 마주친다.

"살짝만, 맛보기만 해보자. 내가 정말 나면서부터 이랬던건지."

그래, 조금이라면 괜찮을거야.

죽으면 뭐, 어차피 죽을놈이니까.

하지만 아직 죽여서는 안된다.

그러니 아주 잠깐의 기억만 보여주자.

최초의 엘로힘, '탐구자'의 아공간에 억겁의 시간동안 갇혀있을 때 겪은...

그런 아주 짧은 사건들만.

"루시!"

한서우가 뒤에서 부르기에 뒤를 돌아봤다.

"...화난거야?"

"아니, 화나기는. 그냥...괘씸하지. 이 애새끼가 대체 뭘 알고 우리에 대해 지껄이나 싶어서."

[...애새끼라니.]

순간의 자그마한 짜증에 놓여있던 내게, 한서우의 표정이 눈에 들어왔다.

그 표정을 보니, 방금 내가 하려던 일이 얼마나 터무니 없는 일인지 깨달았다.

"뭐, 방금 하려던건 좀 심했던 것 같고."

"뭘 하려 했던건데?!"

밤하늘의 별이 눈에 들어온다.

"억겁의 시간말고, 이 년 정도면 충분하겠지. 충분히 축소해서, 중요한 것만."

연구자들에게 있던 시간들.

"먹고 맛없으면 뱉어라. 입 막아둘거지만."

[대체 뭘...]

이성주가 질문을 채 하기도 전에 몸에서 금빛 실이 뻗어나온다.

하늘하늘 뻗어진 한가닥의 실이, 이성주의 이마를 파고들었다.

[컥, 커헉...]

하루 단위로, 생살이 찢기고 내장이 뒤틀리던 경험을 하게 시켜주는 것 뿐이다.

얘한테 이정도는 껌이겠지. 지도 호언장담 했는데.

'호언장담은 아닌가?'

자신의 불행을 자랑하는 것 만큼 멍청한 짓이 어딨나 싶지만, 얘는 그랬지.

오히려 나는 쪽팔려서 숨기고싶을 지경인데.

[어헉, 억...]

이성주가 눈을 까뒤집으며 뒤로 엎어졌다.

몸을 바들바들 떨며 경련하는 중이었다.

"뭐, 얘는 알아서 잘 버티라 해보고."

"...괜찮을까?"

"어차피 얼마 안지나서 죽을건데 뭔 소용이야."

오늘은 하늘이 맑다.

이곳은 언제나 맑으니까.

'...이성주는 끝난건가.'

비록...그 죄악의 매듭을 짓지는 못했을지언정.

결국 잿가루가 되는 건 똑같구나.

­파아ㅡ

그리고, 우리가 자리를 뜨려던 그 순간이었다.

"에, 어라?"

"루시? 이거 네가 한거야?"

"그럴리가 있겠냐?"

순식간에 우리 주위를 무수한 잔해들이 둘러쌌다.

검은 돔의 형태로 둘러싼 구조물이 순식간에 형성되었다.

"뭐야, 이거?!"

"이 돔...전이 전조같은데."

지금 누군가가 이곳으로 전이하고 있었다.

'하필' 이곳으로.

노린 것 마냥.

"...돌겠네, 진짜."

일은 좀 나눠서 오면 좋으련만.

검은 돔 안이 환한 빛으로 뒤덮일 때까지 내가 바랬던 소망이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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