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3화 〉 3부 13. 작전 타임
* * *
손 위에 고이 모여있던 잿빛 덩어리가 바스라졌다.
이거 콘크리트 아닌가? 왜 이렇게 쉽게 부서지는거지.
혹시나 싶어 눈앞의 건물을 있는 힘껏 밀어본다.
"끄응..."
아니다. 역시 이건 그냥 평범한 폐건물이다.
방금 내 손 위에서 바스라진 콘크리트 덩어리와는 달리.
분명 그 콘크리트 덩어리는 이 건물에서 떼어낸건데 강도가 다를 수가 있나?
'상식을 기대하면 안되지.'
다른 우주잖아.
물리법칙정도는 이상하게 뒤틀어놨을 수도 있지.
분명 우리 세계를 모방한 건 맞지만 창조주의 실력이 개판이라 그런지 물리법칙도 어설프게 만들어놨다.
건물에서 콘크리트 조각 조금 떼어낸다고 건물이랑 콘크리트를 전혀 다른 물건 취급하면 되나.
초보적인 실수야.
아무튼, 지금 중요한 건 학자 먼저 찾는거니까 훈수질은 적당히 하자.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하는거지..."
"그걸 알았으면 처음부터 고생 안했겠지."
내 투덜거림에 마스가 핀잔을 줬다.
틀린 말이 아니었다.
적이 명확하다면 모르겠는데, 걔는 애초에 물리적 실체를 가지고 있는지조차 확실하지가 않잖아.
물론 엘로힘이라면 당연히 그냥 생물체나 마찬가지다.
하지만 신격을 모조리 흡수해버리고 뒤틀린 엘로힘이라면...
'그건 살아있는게 맞다고 볼 수 있나?'
3차원의 자신의 몸은 아바타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어차피 죽어버려도, 상위차원의 본체가 남아있는 한 끝도없이 꺼내 쓸 수 있는 것.
이런 실정이니...유일한 희망은 한때 나에게 남아있던 작은 양의 신격뿐이라고 봐야겠네.
"한 눈 팔지 말고 제대로 관찰해라~"
"너나."
그런 푸념을 중얼거리며, 마스와 둘이서 도시를 정찰(투어)하고 있었다.
그렇게 도시를 돌아다닌지 이제 기껏 2시간정도 지났을까.
푸른 하늘에 검은 것이 생겨났다.
"...야, 마스. 저거 봐."
"눈치 못채는 놈이 이상한거다."
저 돔이 생겨나기 직전, 온풍이 찬바람을 휩쓸었기에 못 알아차리기 힘들긴 하다.
'검은 돔...'
아, 저게 혹시 우리가 이곳으로 전이될 때 나타났다는, 그 돔인건가?
이쪽 우주로 넘어올 땐 반드시 전이 지역 주변을 잔해로 이루어진 검은 돔들이 한순간 둘러싼다고 했으니.
의심하고 있던 그때, 품 안의 무전기가 지직거리며 내 추측이 사실임을 알려주었다.
"4사분면 지대 정찰 인원, 근처에서 전이 전조 발견. 근처에 있는 인원들은 속히 지원 바랍니다."
"누가 또 온 모양이네."
하릴없이 도시를 돌아다니던 것도 이쯤에서 멈춰야 할 것 같다.
그나저나, 방금 전이된 사람들은 우리가 안내해줘야 하나.
우리도 아직 여길 잘 모르는데.
뉴비가 뉴비한테 가르쳐준다는거랑 같은 격 아닌가.
그러니 그냥 적당히 길 안내만 하고 끝내면 될거다.
행선지를 틀며, 주변에서 흩날리는 미세한 검은 먼지들을 콜록콜록 뱉어냈다.
***
카득, 카득.
"뭐야, 갈 데까지 가보자는 거야?"
흐릿한 안개 속에서, 이성주가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단검을 고쳐쥐었다.
눈가로 흘러내린 피에 더욱 섬뜩해지는 건 분위기 뿐만이 아니었다.
"...넌 대체 뭐가 문제였던거냐, 이성주."
"문제? 많지. 어쩌면 삶이라는 것 자체가 문제일 수도 있고."
이성주의 뒤에 자리잡은 건, 마치 거대한 보석과도 같은 무언가.
그리고 그 거대한 보석을 지고 가는 두 명 남짓의 사람들과, 검은 전이마법진.
"말해봐, 이유리. 그 사서라는 인간의 연구는 끝났다고 했지?"
이유리는 침묵했다.
"그래서, 그걸로 알게 된 사실이 뭐야? 너희 그 빌어먹을...이유나와, 네가 대체 무슨 존재인지, 알게 됐어?"
"나는 언제나 열려있었어. 네가 비록 우리와 다르다고는 할 지언정...가족이라는 건 변함 없었잖아."
단검에 비친 녹빛에, 이유리가 손가락을 움찔거렸다.
"인간도, 인간이 아닌 것도 같다고 볼 수는 있겠지. 극소수는."
"..."
"그래도 상식적으로 생각해보면, 짐승이랑 인간이 다르다고 생각하는 건 당연한 거 아니야? '상식적으로' 판단을 좀 하라고."
막을 수 있는 데까진 막았다.
사서도 한계선까지는 무리하지 말라 그랬고.
결국, 이유리는 그들이 떠나가는 모습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기껏 정보 받아쳐먹고 찾아왔는데.'
사서의 아카식 레코드로 얻은 정보는, 미래를 결정해 주지는 않는다.
단순히 현재만을 더 손쉽게 해줄 뿐이지.
"언젠간 매듭을 지어야 하지 않겠어, 이유리?"
"네 누나다. 그리고 방금 얘기 말이다...짐승은 누구고, 사람은 누구지?"
만신창이가 된 이성주가 이유리를 바라봤다.
"뭐, 비유긴 하지만...본래 열등한 건 언제나 가장 많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고들 하지."
별안간 섬광과 함께 번쩍이는 검은 마법진.
화사한 빛에, 이성주의 비틀거리는 모습도 실루엣만으로 드러났다.
"인간과 신, 둘 중에 누가 더 많다고 생각해, 누나는?"
번쩍.
검은 빛이 지하의 야트막한 폐허에 비췄다.
"피곤한 새끼..."
지속적으로 손톱을 매만지며, 발신기로 어딘가를 향해 연락을 시도하는 이유리.
하지만 곧 들려오는 권역외를 경고하는 알람에, 눈을 찌푸렸다.
'맞다, 오늘 넘어간다 그랬지.'
사서는 저 너머의 우주로 이미 넘어가버렸으니.
"우리가 그 심장을 알고있다는 인식만 심어주면 충분하다 했으니...이정도면 되려나."
나머지는 사서 그 놈이 다 알아서 하겠지.
나와 이유나 사이에 연결된, 텔레파시와 관한 연구도 최근에 다 끝났댔으니.
한숨과 함꼐, 더러운 시멘트 바닥에 남겨진 검은 마법진을 발로 박박 닦았다.
***
"야이씨, 여긴 왜 온거냐?"
"뭐, 오면 안되는 이유라도 있나? 애초에 여기 가장 먼저 와야될 게 나인데, 오히려 늦게 도착한거지."
돔 근처로 갔을 때, 우리 외에 다른 사람들이 지원을 위해 온 것 같지는 않았다.
처음엔 야박하다고 생각했으나, 결과적으론 그게 다행이었다.
그 돔 너머로 도착한 게, 다름아닌 한서우와 사서였기 때문.
이유는 모르지만, 일단 다른 사람들이 지원오기 전에 이들을 숨겨야겠다고 판단한 나는, 서둘러 그 둘을 이끌고 근처의 폐건물 사이로 들어왔다.
숨기는 이유 따위는 나중에 생각해내면 된다.
한동안 사서와 한서우를 멍하니 바라보던 마스가 가장 처음 꺼낸 말은.
"...이 아저씨가 사서야?"
이거였다.
...아저씨?
"야, 조용. 너랑 비교해도 나이차이 별로 안 나 보인다."
"몇살인데?"
그러게, 사서가 몇살이었더라.
이러나 저러나 이딴건 알 필요 없다.
"아무튼, 너랑 한서우가 왜 같이 있어?"
"아, 그건 내가 설명할게."
한서우가 사서와 만나게 된 경로는 간단했다.
연구자를 쫓겠다며 혼자 싸돌아다니던 한서우가 결국 막판에 실패하고, 그 직후 사서가 나왔다는 것.
사서를 만난 뒤 내 반응을 보자 사서에 대한 의심이 사그라들었다지만...
'그렇게 절묘하게 나타나면 보통 흑막으로 생각하지.'
사서 이새끼가 꼴에 폼 잡는건 엄청나게 좋아한다.
능글맞게 웃기 좋아하는 건 덤이다.
"자, 그럼 시작하지."
"뭐?"
한창 잘 진행되고 있던 이야기를 끊고, 도중에 난입한 건 사서.
내 후드 주머니 속으로 손을 뻗더니, 안에 들어있던 구슬 몇개를 쥐어갔다.
"한 개, 두 개...아, 거기 밖으로 빠져나온 거 몇개지?"
"다섯 개, 주머니 안에 있는 것까지 합하면 여덟 개."
"몇 개 정도는 잃어버렸을거라 생각했는데 생각외로 꼼꼼하군."
생각외?
개새끼가.
"제일 칠칠치 못한 건 너지, 이새끼야. 아무리 급하다 해도 아카식 레코드같은 걸 손으로 들고 올 생각을 해?
여전히 사서의 손에 들려있는 거대한 책을 가리켰다.
무슨 마법이라도 걸려있다면 모를까, 얘는 아공간 하나만을 전적으로 믿고 거기에다 인류 최고의 보물같은걸 마구 쳐넣는 모양이다.
"어차피 여기서 다 끝낼건데, 뭐 어떤가. 다 끝나면 이런 책 따위는 필요 없을지도 모르지."
"아니, 존나 쓸모있다. 한 장이라도 뜯어먹으면 그 시기 기록이 죄다 날아가는 거니까 보존해둬야지."
저거 날아가면, 3차원에서 세계의 지식에 간섭할 방법이란 전무하다.
내가 아는 상위차원에는 저것보다 몇십배는 업그레이드된 완벽한 상위호환 버전의 아카식 레코드가 존재하지만...
지금 우리의 목적은 그 상위차원과 우리 우주를 격리시키는 거니 말짱 도무룩, 강 건너 진수성찬이다.
몇번 거대한 책을 소리나게 펄럭이던 사서를 바라보던 한서우가 입을 열었다.
"그나저나 그 구슬이 뭔데 그래? 왜 둘이 그걸 가지고 있어?"
사서와 내가 왜 구슬을 가지고 있냐는 말인가.
"아니, 그게 아니라 '어떻게' 그 구슬을 가지고 있냐고 물어보는거야. 느껴지는 마력의 양만 해도 가동중인 어비스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막강한데."
"초고대문명 로스트테크놀로지라고 생각하면 편하다. 그 이상 들어가면 피곤해."
"로스트 테크놀로지라고는 해도 기껏해야 수십년전 기술이다만."
사서의 눈치없는 핀잔에 눈을 찌푸렸다.
"SOP, 내 고향 지구에 있던 초상능력자 단체...비스무리 한거래. 솔직히 나도 내가 살던 곳에 그런게 있었는진 몰랐지만."
"아, 하긴...원래 살던 곳은 마력이 미칠듯이 희박하다고 했으니까..."
그래. 내가 원래 살던 곳은 마력이 희박했어.
내가, 신이 죽은 곳이 아니니까.
어쨌든 같은 3차원 우주라고, 자그맣게 영향을 받긴 한 모양이다만 그래봤자 수십억 일반인들에겐 별 의미조차 없었다.
물론 그 별 의미조차 없는게, 나중에는 전 인류의 마수화라는 개연성 안드로메다로 보내버린 전개로 끝이 나버렸지만.
본론으로 돌아와서, 한서우에게 구슬에 대한 나머지 설명을 한다.
"...이렇게, 현실과 상위차원을 격리시키는거야. 하지만 비록 격리시킨다고는 해도 상위차원의 간섭을 격리시키는거라..."
"이 우주에 남아있는 마력이 사라지는 일은 없을거다. 그래도 상위차원과 조금이라도 연관이 있는 엘로힘이나 신격같은 것은 그 자취를 감출테지만 말이지."
내 말을 받는 사서.
어느샌가 시멘트 바닥에 물기로 그림을 그리고있는 사서를 발견했다.
"어디서부터 시작해야하는지 막막했나?"
"아니? 나 혼자서도 충분히 잘 할 수 있었는데?"
"개뿔, 차원의 틈새도 발견할 수 없었을거면서."
사서가 도움을 주겠다고 하는 말이다.
말이 얄밉지만 어쨌든.
"이제 그런 것 따윈 아무 상관없다. 연구가 끝났어."
"뭐?"
연구? 갑자기 그게 무슨 말인가.
그 답은 알아서 입을 여는 사서의 목에서 나왔다.
"이유리와 이유나 자매의 특이점, 텔레파시에 대한 연구가 최근에 막 끝난 참이다."
...맥거핀으로 남을 설정같았는데 이걸 여기서 푼다고?
타이밍도 참 절묘해.
폐건물의 구석에 모인 사서와 나, 한서우와 마스.
이 기묘한 조합의 인원을 둘러싸고, 사서가 책을 열었다.
"지금부터 작전타임이다. 잘 새겨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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