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0화 〉 3부 10. 생명
* * *
꽉 막혀있던 감옥같은 돔이 녹아내렸다.
그와 동시에 들려오는, 조금 더 명확해진 '바람 소리'.
공간이 넓어졌음을 간접적으로 알리는 바람소리가 세차게 불어왔다.
방금 그 돔은 정말 물리적인 영향력까지 가지고 있었던 거구나.
자칫했다간 이 공간에 갇힐 뻔했어.
그런 안도감에 숨을 고르며 눈 앞의 괴생물체를 바라봤다.
여전히 눈만 끔뻑이며 끄륵거리는 모습이었다.
"...왜 그러는데. 쟤가 무슨 말이라도 했어?"
내 양 겨드랑이에 손을 집어넣고 뒤로 끌어낸 마스가, 조심스럽게 물어왔다.
물론 말해줘봤자 딱히 거기서 얻어낼 수 있는 단서도 없었기에.
"글쎄다, 말이 통해야 알지."
하며 어물쩍 넘어갈 뿐이었다.
쿵쾅쿵쾅 뛰는 심장을 진정시키고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직 다리가 살짝 후들거리지만 그래도 걸을 수는 있다.
방금 그 숫자들이 대체 무슨 정보를 담고 있었길래 정신적 데미지가 이렇게 큰 건지.
그 망할놈의 '무의식'이라는 것이 내가 인지하지도 못한 걸 이해하게 해준다.
덕분에 쓸데없이 정신적으로 타격만 입어버리고.
"저건 그대로 놔두고 갈거냐? 안 죽여?"
"그래, 딱히 위험한 것 같지도 않고...그냥 저렇게 자리에 가만히 앉아있는다면야."
나에게 정신적 타격을 입힌 그 혐오스럽게 생긴 괴물은, 여전히 땅에 앉아 눈알만 데굴데굴 굴리고 있었다.
생물이라기에는 마치 돌덩이에 눈깔이 달린 모습 같았다.
"뭐, 가자. 쟤한테서 뜯어낼 것도 없어 보이는데."
"하긴..."
내가 걸음을 옮기자, 마스도 몇 번 괴물을 뒤돌아보는 듯 하더니 조심스레 날 따라왔다.
이 거대한 폐허가 무엇인지 알아보기 위해서 길을 나선다.
뜬금없이 나타난 이 거대한 초차원이 무엇인지 알아보기 위해서.
눈 한번 깜빡이고 나니 전혀 다른 우주야.
세상 개판으로 돌아가네, 진짜.
***
"배고파."
"난 안 배고픈데."
"넌 맛 느끼려는거 빼고는 밥도 안먹잖냐."
"꼬우면 너도 나처럼 되던가요~"
물론 그러려면 형용할 수 없는 온갖 고통을 한번씩 다 겪어봐야겠지만.
그런 의미없는 잡담을 하며 휑한 도시를 거닐었다.
아무리 걸어도 생물이라고는 보이지 않는다.
우리가 이전에 만난, 그 붉은 살덩어리가 이 우주에서 만나본 생명의 전부였다.
설마 이 우주에는 전부 그런 것들밖에 없는 건 아니겠지?
식물도 없이 온통 눈만 쌓여있는 걸 보니, 식물조차 없을 가능성도 있다.
도대체 이 우주는 뭔 꼴로 돌아가는거야.
말 없이 세 시간 가까이 도시를 걸었다.
다행히 이 도시 전체가 마천루는 아닌 모양이다.
어느정도 걸으니 주변의 건물들도 차츰 낮아지고, 점차 지평선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도시의 바깥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저 멀리 도시가 끝나는 지점이 보이자, 조금 쉴까, 하며 마스에게 말을 걸었다.
"마스, 배고파?"
"하루종일 아무것도 안먹었으니 당연하겠지?"
"내 팔이라도 먹을래?"
"...뭐? 너 또라이냐?"
죽는 게 문제지, 그깟 자존심이 문제냐.
하고 한번 쏘아붙이자 이건 자존심따위의 문제가 아니라며 일축하는 마스.
"이건 인간 존엄성의 문제다. 아무리 재생된다고는 해도 어떻게...그..."
"뭐가 문제야? 당사자가 괜찮다는데."
"개소리말고. 게다가 너 통증도 그대로 느낀다며."
"까짓거 참으면 되지, 어때?"
뱃가죽 찢겨도 쇼크사는 개뿔, 잘만 움직이는데.
그런 말을 들은 마스가 얼굴을 구기며 중얼거린다.
"...불로불사같은 것도 익숙해지면 당사자가 이상해진다더니, 사실이었나..."
"뭔 소리야, 또."
"역시 익숙해진다는 게 제일 무서워. 으..."
이 대화 이후로 유독 마스가 나와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내가 인간으로 느껴지질 않는다나, 뭐라나.
효율을 생각해서 한번 해본 말인데, 왜 저렇게 민감하게 반응하는건지.
저러다 굶어죽으면 내 탓 아니야.
그렇게 한동안 거리를 걷고있었다.
그리고, 하늘은 어둑해지기 시작했다.
"자, 우리한텐 두 가지 선택지가 있다. 도시 안에서 자고가거나, 밖에서 캠프를 차리거나."
손가락 두개를 펴며 마스에게 말했다.
"어떻게 할래?"
"그야, 도시에서 자는 게 더 좋겠지. 허허벌판보다는 방한도 잘 될 거고, 숨을 수도 있으니까. 게다가 시간도 절약할 수 있지."
"그래, 그럼."
그날은 근처 자그마한 아파트에 들어가서 밤을 지내기로 했다.
미국식 아파트라 그런지 천장이 꽤나 낮았다.
아, 이건 우리나라도 똑같으려나.
바닥이 조금 더럽네, 라는 감상을 느끼며, 낯선 곳에서 잠이 들었다.
이번에는 옆에 온기도 느껴져서 그런지, 잠에 들기는 그리 어렵지 않았다.
***
깡ㅡ
"아악! 뭐야!"
"오, 진짜 철이네."
"그럼 진짜 철이지, 뭐겠어 멍청아!"
손에 들린 헬기의 문짝을 땅으로 쾅 던졌다.
우주가 달라서 물질의 법칙도 다를거라 생각했는데, 이 철은 똑같나.
마스가 머리를 붙잡으며 꽥꽥 비명을 지르는게 들렸지만, 가볍게 무시하며 평원 위에 놓인 고철더미를 향해 다가갔다.
"그나저나 이건 뭐야. 왜 이런게 여깄어?"
"그걸 어떻게 알아...으, 머리 존나 아프네..."
길을 나선 우리가, 도시를 빠져나오고 얼마 지나지 않아 마주친 것은 '헬기'였다.
멀쩡한 헬기는 아니고, 산산히 조각난 헬기 말이다.
평소였다면 '아, 그냥 과거에 이런 헬기가 쓰이다가 버려졌구나'하고 넘어갔겠지만...
"이건 최근까지 쓰이던 기종이잖아. 이런 게 여기 있을 리가 없는데..."
내가 '신우주'로서 존재하던 우주에는 없던 헬기 기종.
이건 루시로서 살던 그 우주에나 존재하던 기종이었다.
여기가 완전히 다른 우주인줄 알았는데, 그런거라면 이게 설명이 안되잖아.
사건은 또다시 미궁으로 빠져들었다.
"게다가 파편이 비단 한 개만 있는 것도 아니네."
"이 평원에만 헬기 추락한 게 다섯 개네."
주변을 둘러보자, 새하얀 평원 위에 이따금 보이는 검은색 고철더미들이 시야에 들어온다.
전부 이 헬기와 똑같은 기종.
모두 군용이다.
"...이거 혹시 X성탈출 같은 거 아니냐?"
"불안한 소리 하지 마라. 위험하게."
아니, 왜. 그럴 수도 있잖아.
여기가 미래의 지구고, 우리는 모종의 이유로 시간을 뛰어넘어서...
"어. 어제 그 괴물이다."
"?"
머릿속으로 마구 망상을 하던 도중, 생각을 끊은 마스의 한 마디.
그 말에 마스가 바라보는 곳으로 시선을 돌리자, 새하얀 눈밭과는 어울리지 않는, 그로테스크한 붉은색이 보인다.
꿈틀대면서 여전히 이동하는 중이었다.
어제의 그 생물과 비슷하지만, 확실히 다른 개체.
붉은 살과 검은 철로 이루어진 외형은 동일하지만, 그 이목구비가 역변한 듯 다르다.
뭐, 괴물이니 이목구비같은 세세한 건 별 상관이 없으려나.
"우리쪽으로 오는 것 같아?"
"아니, 그냥 제자리만 빙빙 도는 것 같은데."
"가볼까?"
"...뭐하러?"
이 적막한 세계에서 유일하게 움직이는 생명체니까, 당연히 가보고싶지 멍청아.
게다가 이전에 만난 그 괴물도 딱히 공격성은 없어보였으니.
"잔말말고 따라와. 수틀리면 튀면 되지."
"너무 상황에 대해 낙천적인데."
그럴리가.
낙천적이기보다는, 언제든 최악의 상황을 가정하고 있다.
말만 이렇게 하는거지.
저 괴물같은 것들이 일관적이지 않은 개체라면, 선공받고 가장 먼저 리타이어 할 수도 있다.
어쩌면 또 내가 상상조차 하지 못한 뜬금없는 일이 벌어질 수도 있고.
"그래도 뭐, 마주하지 않으면 그 실체조차 모르는거니까. 일단은 가봐야하지 않겠어?"
"틀린말은 또 아니네."
그리 말하며, 내가 앞에 선 채로 뽀득뽀득, 눈 밭을 가로지르며 그 괴물을 향해 걸어갔다.
[끄윽.끄륵.끅.]
여전히 괴이한 소리를 내는 살덩어리다.
보기만해도 불쾌해지는 온갖 붉은 살덩이, 철, 눈깔은 덤이고.
"...봐, 얘도 공격은 안하는 것 같네."
"다 이런건가? 생긴거랑 너무 다르네."
손을 살짝 뻗으면 그대로 자리에 풀썩 주저앉아버리는, 어찌보면 1회성 NPC와도 같은 괴물이다.
한번 앉으면 우리가 떠날때까진 일어나지도 않고.
"흐음..."
앉아버린 그 괴물에게서, 이전과 같은 정신적 데미지를 또 한번 입을까봐 거리를 둔다.
이번에는 거리를 두며 괴물을 자세히 살펴보기 시작했다.
살덩어리, 살덩어리, 철골...
"엥?"
"뭐야, 왜?"
나와 함께 괴물의 주변을 뱅뱅 돌던 마스가 별안간 고개를 갸웃했다.
마스가 손짓하는 곳으로 가 시야를 집중해보니,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무언가가 보인다.
"...저게 뭔데?"
"연합 계급표. 세계연합..."
"...설마, 우리쪽 우주?"
내 물음에 마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연합 계급표가, 이 괴물한테서 나온다고?
"대체 왜 이게 여기서 나오는건데??"
"내 말이!"
농담삼아 했던 혹X탈출 얘기가 사실일 가능성이 점점 높아진다. 이게 대체 뭔 상황이야.
진짜로 시간이 흐른 미래의 우리 지구인가?
"추락한 헬기부대에...연합군 계급표까지...이거 진짜..."
아니야, 어쩌면 평행우주 비슷한 걸 수도 있다.
하지만 여긴 완전히 다른 우주라고, 판단했는데...
그저 기존에 있던 무언가가 뒤섞인 그런 기워붙인 우주...
기껏해야, 거대한 구조물이나 지형따위를 뒤섞어 두었을 뿐인...
"혹시 이 우주로, 우리 이전에 넘어왔던 사람들이 있던건가?"
"어쩌면..."
그래, 저게 가장 가능성이 높다.
분명 얼마전에도 도시가 바다 밑에서 떠올랐다고 했었지.
심지어, 그게 똑같이 폐허가 된 도시라면...
그것을 매개체로, 이곳으로 넘어온 이들이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이야기라면, 이 괴물이 이곳으로 넘어온 군인이거나...
'괴물이 군인을 죽이고 우연히 그 물건을 얻게 된 것이거나.'
괴물은 우릴 공격하지 않았다.
나는 고사하고, 마스조차도.
그렇다면 이 괴물이 그 군인이었을 가능성이...크다는건가.
"ㅡㅡㅡ!"
심각하게 상황을 보고있던 도중, 저 멀리서 들려오는 메아리.
그 소리에 화들짝 놀라며 마스도, 나도 퍼뜩 고개를 돌렸다.
"ㅡㅡ!"
저 멀리서, 눈밭을 가로지르며 누군가 우리에게로 달려오고 있었다.
분명한 생명체다.
너무 멀어서 그냥 딱 '사람'이라는 것만 알아볼 수준이긴 하지만.
그 사람이 우리 둘에게 양 손을 흔들고 있다.
이 세계에 와서 처음으로 만난 사람이지만...
'저거 익숙한데.'
어디선가 많이 본 듯한 상황이다, 이거.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