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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해주세요, 마수님!-127화 (127/162)

〈 127화 〉 3부 7. 탈진

* * *

그런 마음이 또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그냥 저 멀리 일어나는 일들을 다 무시해버리고, 나 혼자만 산다면 어떻게든 잘 되지 않을까, 하는 그런 막연한 희망.

또는 헛된 소망.

결국 그런 건 전부 의미없는 짓이었다.

본디 인간이란 게 본질부터 하나로 연결되어 있는 것인데, 어찌 저 멀리 일어나는 일이 나에게까지 영향을 미치지 않을거라 단언할 수 있겠는가.

영혼이란 게 없어서 결국 군체와도 같아져버린, 덧없는 생명체들이다.

나만 따로 뚝 떨어뜨려놓고 생각하는 것도 어쩌면 오만일지는 모르겠지만.

그냥...

세상이 그런걸, 뭐 어떡해.

이상주의자는 살기 어려운 세상이다.

다행스럽게도 난 이상주의자는 아니었다.

­­­­­­­­

"비명도 안지르나?"

"몸이...내 몸 같지가 않아..."

결국 그 일련의 사건 이후 마침내 현실격리장치(진)을 발견한 난, 마침내 그 개고생을 끝내고 편히 쉴 수 있었다.

몸속에 박힌 파편 때문에 자꾸만 고장난 인형처럼 움직여대서, 일단은 파편부터 빼내기로 했다.

하지만 여기는 도서관이다. 병원같은게 아니란 말이었다.

마취약도 없다는 소리다.

내가 불사였기에 망정이지, 만약 진짜 중환자가 왔다면 이미 배 가르는 시점에서 쇼크사했다.

­콰드득

"아읏."

"..."

한동안 그렇게 말없이, 내 뱃속을 헤집는 소리와, 사서가 이따금 신음을 흘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모양새가 어째 이상한데..."

"...어떻게 말이냐?"

"장기밀매하는 것 같잖아."

사서가 내 머리를 한 대 쥐어박았다.

솔직히 감각도 없어서 방금 때렸는지도 모르겠다. 그냥 내 눈에 사서가 주먹을 쥐는 게 보였다는거다.

"결국 성공했군."

"뭐...그렇지."

멍하니 고개를 돌려 저 탁자 위에 있는, 자그마한 흰색의 구슬을 바라봤다.

속에서 파도와 같은 것이 물결치는 영롱한 생김새의 구슬이었다.

저 작은 것이, 내가 사서한테서 받은 리모컨보다 더 값진 역할을 한다니.

저렇게 소형화 시킬 능력이 있었다면 리모컨도 좀 작게 만들지 그랬어.

"나..좀 잘게..."

"푹 쉬어라."

가슴께까지 들어올려진 후드티는 내 몸을 여과없이 드러낸다.

여전히, 여기저기 상처가 수두룩한 모양새였다.

하지만 뭐, 저것도 내가 지금까지 쌩고생 한것의 증거나, 휘장같은거라고 생각하면 딱히 보기 싫지는 않았다.

서서히 몽롱해지는 시야와 함께, 쌔근쌔근 잠이 들었다.

­­­­­­­­­­

"이걸로, 지금 도서관은 무방비나 마찬가지다. 전 인류의 보고가 무방비 상태로 노출되어 있다는거다."

"인류의 보고던, 뭐던. 어차피 사람들은 도서관의 존재조차 모를걸."

"..."

사서가 얼굴을 찌푸렸다.

기분 더럽겠지. 뭘 어째, 사실인데.

사서도 아는지 얼굴만 구길 뿐 아무런 반박도 하지 않았다.

"시간과의 싸움이다."

"뭘?"

"균열을 활용하는거다. 차원의 틈새인 그곳에, 이 구슬을 각자 박아넣는거야."

아, 균열 오랜만에 나왔다.

잔해들이 나오는, 해방자들의 주 적.

지금 사서가 하는 말은, 그 균열 속에 이 구슬을 박아넣는 거라고 한다.

"근데 그건 하나뿐이잖아. 하나로 충분하겠어?"

"그럴리가, 복제해놔야지."

"어떻게?"

사서는 이 질문을 기다렸다는 듯, 씨익 웃으며 말했다.

"어떡하기는, 너의 그 막대한 마력이다."

"...뭐?"

상상도 못한 대답이었다.

"아니, 그냥 복제하는거면 일반적인 초상능력 수준에서 끝나지 않아? 왜 하필 나야?"

"이건 말했다시피, 선구자들의 오버테크놀로지 장치다. 선구자들은 마력이 희박한 저쪽 세상에서조차 마법사 행세를 하고 다녔던 사람들이야. 필시 기본 마력이, 너에 미치진 못하더라도 방대했을 게 분명하지."

"그런가...?

그렇다, 라고 중얼거린 사서는 아무것도 걸치고 있지 않은 내 몸 위로 담요 한장을 덮어준다.

아, 그러고보니 나 왜 아무 옷도 안입고 있었지.

괜히 얼굴이 붉어지려 했지만, 이것가지고 쪽팔려 하는게 더 쪽팔려서 겨우 참았다.

뭐, 옷이야 다 찢어지고 피에 절여졌을테니 그냥 벗겨놔둔 거라고 하자.

서아도 그랬으니, 남들이라고 다르게 행동할 이유는 없다.

아무튼.

사서는 곧 구슬을 가져와, 내 앞 탁자 위에 조심스럽게 올려놨다.

"마법식을 가르쳐주겠다."

"그걸로 이걸 복제하라고?"

"그래. 아마 들어가는 마력은 무지막지 할거다. 물건 자체의 격도 격이다보니, 복제하기도 극악의 난이도일 게 분명하고.

일단 한 번은 무조건 해내야한다.

자칫하다 부서지기라도 하면 그날로 세계멸망.

"뭐, 네 그 마력이라면 걱정할 필요는 없겠지만. 사실상 마력으로 신격의 역할도 할 수 있는데, 이거라도 못할까."

"거 자기 아니라고 막 믿네."

"그게 좋은 거 아니겠나?"

사서가 탁자위에 마법식을 새기기 시작했다.

이제껏 배웠던 것과는 차원이 다른, 무려 마법진 3개가 연달아서 겹쳐있는 굉장히 복잡한 마법진이었다.

"작동 순서부터, 차례대로."

"..."

"자, 한다."

사서의 말에 마법진으로 조용히 마력을 흘려보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사서의 손길에 따라 조심스럽게 마법진을 기동시킨다.

그와 동시에, 도서관은 별안간 진동과 함께 눈부신 빛에 휩싸였다.

­­­­­­­­­­­

­콰당!

"아욱!"

도서관에서 나오는 루시와 마주쳤다.

곁에는 아무도 없는 걸 보니, 뒤이어 누군가 따라나오진 않은 것 같다.

"...마스?"

날 알아본 루시가 그리 말했다.

루시를 번쩍 안아든 난 차로 향하며 말했다.

"사고 친건 없지? 뭐, 사람 죽인거라던가."

"내가 죽었다면 모를까, 뭔 사람을 죽여. 미쳤냐?"

루시의 말에 살짝 놀라며 루시가 입고있는 옷을 살펴봤다.

루시답지 않은 짧은 스커트에 새하얀 셔츠였다. 그 위에는 새하얀 털자켓.

아래쪽이 나풀대는걸 보니, 아마 속바지조차 없이 속옷만 입은 모양이었다.

결코 루시가 자의로 입은 옷은 아니었다.

"그...사서라는 양반이 입혀준거냐?"

"아니? 이유리가 입혀준건데."

루시의 드러난 다리와 팔에는 언뜻언뜻 붉은 피들이 튀어있었다.

원체 피부가 하얘서 그런건지 저렇게 조금 튀어있는 건데도 전부 티가난다.

"...또 피본거냐."

"안아팠어. 걱정마."

또, 또 이렇게 그냥 넘어가려고 한다.

애초에 루시가 피볼 정도면 결코 일반적인 선에선 안끝났다는건데, 적어도 동맥 하나정도는 끊어졌겠지.

한숨을 푹 쉬며 루시를 차로 집어넣었다.

"아, 마스! 어비스 예약좀 잡아둘 수 있어?"

꽁한 표정으로 조용히 자켓 주머니의 무언가를 만지작 거리던 루시가 말했다.

의아함에 고개를 갸웃거리자, 계속해서 말을 잇는 루시.

"지금 일어나는 이 사태들, 금방 해결할 수 있어서 그래."

"그게 뭔 말이야."

"설명하긴 귀찮고, 그냥 일단 예약만 잡아놔봐. 언제든 사용할 수 있게."

"지금 그걸 가능하다고 생각하는거냐..."

언제 이용할 지 정해두지도 않은 예약이라니.

그냥 언제든 원할때 가면 이용하게 해달라는 요청이나 마찬가지였다.

솔직히 히어로 협회쪽에서 그걸 허락해줄 것 같지가 않은데.

"...된다니?"

­"루시 부탁이란 거 들으니까 된다던데? 물론 감시역 동원하긴 할건데, 일단 그 부탁은 허가인가봐."

됐다.

반신반의 하는 심정으로 성화연에게 전화를 걸어보니, 다음날 오전에 그리 전화가 왔다.

옆 침대에서 고양이마냥 몸을 웅크리고선 잠들어있는 루시가 보인다.

여전히 세상 모르게 잠들어있었다.

"...허."

­"뭐,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잘 써봐. 루시가 부탁한거면 히어로 협회도 나름 생각이 있어서 허가해준 걸 테니까."

전화가 끊겼다.

한동안 멍청해진 느낌에 멍하니 창밖의 풍경을 바라보며 침대 위에 앉아있었다.

"...음."

루시가 대단한건가, 아니면 그냥 인맥을 잘 탄 건가.

잘 모르겠다.

머리를 긁적이며 씻기 위해 화장실로 들어갔다.

­­­­­­­­­­

아침에 일어나자 느껴진 건, 여전히 적응되지 않는 침대의 보드라운 느낌이다.

멍하니 눈을 비비적거리며 일어나니, 화장실쪽에서 샤워기가 작동되는 소리가 들려온다.

듣기 흉한 노랫소리도 들어오는 걸 보니, 아마 씻고 있는 건 마스인 듯 했다.

"흐아암..."

늘어지게 하품을 하며 호텔 구석의 컴퓨터로 다가가 자연스럽게 인터넷을 켰다.

전 세계에서 일어날 마력파를 미리 알려주는 사이트로 들어가기 위함이었다.

구슬을 박기 위해서 지금부터 준비해야할 것이 너무 많았다.

일단은 해방자들과 협력하는 덕에, 나는 많아봤자 구슬 2개정도만 떨어뜨려두면 된다.

'복제하느라 힘들었지.'

무려 100개 가량을 하루 종일 복제했다.

온 몸이 찢겨지고 얼마 안지나서 마력까지 죄다 쏟아붇고 나니, 아예 그냥 죽어버린 느낌이었다.

복제를 끝낸 후에 1시간정도 기절해 있었다는 사서의 말이 아직도 기억난다.

"아우."

고개를 휘휘 젓고선 잡념을 덜어냈다.

눈앞의 모니터에선 세계 곳곳의 마력파 예방 경고가 붉은 점으로 깜빡깜빡 빛나고 있는 중이었다.

'가까운 곳부터 가볼까.'

해방자들이 움직이니, 그렇게 빡세게 할 필요도 없을 것 같고.

방해꾼만 없으면 이번 일은 술술 풀릴 터였다.

"마스ㅡ!"

­"큽, 으? 왜? 왜?!"

마스가 놀란건지 샤워기를 떨어뜨리며 외쳤다.

난 컴퓨터에 있는 위치를 머릿속에 기억하며, 오늘 오후 어비스를 사용하겠다고 말한다.

생각보다 빨리 어비스를 사용하겠다 한 것에 놀랐는지, 마스도 살짝 말을 더듬는 모양새였다.

뭐, 행동이란 건 빠르면 빠를수록 좋으니.

­"알겠어!! 씻고 나가면 전화할게!"

"그래."

대답을 들은 난 컴퓨터를 끄고선, 나도 씻기 위해 옷을 벗고선 욕실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텅, 하고 문이 열리자 뿌연 연기가 욕실 밖으로 퍼져나왔다.

"우와아아아악!"

"아, 씨. 뭐야."

문이 열리는 소리를 듣고선 잠깐 날 보더니, 소스라치게 놀라는 마스.

마스답지 않게 몸을 웅크리고선 얼굴을 한껏 붉힌다.

"뭐야, 미쳤냐?"

"나가, 나가 미친새끼야!! 지금 씻고있잖아!!"

"그게 뭐 어때서. 같이 씻으면 뭐, 닳기라도 하냐?"

"아아아아아악!!!!"

아무래도 마스가 어딘가 망가진 것 같았다.

뭐, 애가 저렇게 아픈데 내가 배려해줘야지, 어쩌겠어.

한숨을 푹 쉬며 옆에 걸려있던 수건을 몸에 두르고선 마스가 다 씻기를 기다리기 위해 다시금 밖으로 나왔다.

다시 부드러운 침대 위에 앉고선 무릎을 안은 채 멍하니 시간을 떼우기 시작했다.

­"다음부턴 나 씻고있을 때 들어오지마!! 놀라서 뒤지는 줄 알았잖아!!"

"거, 사내새끼가 더럽게 시끄럽네."

누가보면 치한이라도 들어온 줄 알겠어.

기다리다 지쳐서 폭, 하며 침대 속으로 쓰러졌다.

그로부터 마스가 나온 건 거의 15분 가까이 흘렀을 무렵이었다.

"미친년..."

"아니, 대체 뭐가 문젠데?"

"됐다. 됐어..."

아무래도 마스가 마스답지 않았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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