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6화 〉 3부 6. 정신차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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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로 사냥꾼은 무언가 달라졌다.
그저 구속하고 숨기만 하는 것이 아닌, 언젠간 죽을 삶을 위해 가능한 한 모두 누리자는 태도로 변했다.
언젠간 죽을수도, 어쩌면 얼마 안가 죽을 수도 있으나 그것이 결코 삶다운 삶을 살지 않는 것보다 나쁘리라 생각하지는 않았다.
짐을 챙기고, 사냥꾼은 소녀와 함께 오두막집을 떴다.
사냥꾼을 배려해 안가도 된다는 소리를 늘어놓던 소녀도 결국은 들뜬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는 듯, 길을 나서는 내내 해맑게 웃고 있었다.
그들의 여정은 길었다.
1년. 전쟁의 손길이 미치는 최전선에서 탈출하기까지.
5년, 그 후로 넓은 세상을 돌아다니며 만났던 사람들과의 인연을 쌓은 시간.
그리고 10년, 그들은 온 세상을 돌아다녔다.
그저 빈민층만이 아니라 상류층 사람들도 보았고, 많은 이들의 삶을 옆에서 지켜봤다.
언젠가 쌓은 좋은 인연을 가진 노인의 임종을 곁에서 지켜보기도 하고, 아무 걱정 없이 각 국가의 거리를 돌아다녀보기도 했다.
그들이 세상을 돌아다니는 동안, 세상은 격변하고 있었다.
소위 '마력'이라 불리는 것이 대중의 앞에 드러나고, 초상능력자들이 전 세계 곳곳에서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 세계 위로 떨어진 신이 가진 힘의 여파였다.
그로 인해 하늘의 별자리가 격변하고, 태양이 요동치고, 밤이 밝아지고, 낮이 어두워졌으나, 사람들은 죽지 않았다.
오히려 그것조차 삶의 일부분으로 자리잡아간다.
비현실이 점차 현실이 되고, 사람들은 익숙해져간다.
고작 10년여간의 세월 안에, 그들을 이단으로 부르던 정교회조차 힘에 굴복하고 무릎 꿇었다.
더이상 비현실은 비현실이 아니게 됐다.
소녀가 가진 힘도 그렇게 점차 세상 속으로 녹아들었다.
평범한 하나의 사람으로, 그런 인생으로.
"늙지 않는구나."
그렇게 수십년간 세상을 돌아다니던 사냥꾼이, 수염이 덥수룩한 입을 열며 한 말이었다.
소녀는 여전히 소녀의 형상 그대로, 아무런 티 없이 말랑하고 부드러운 몸을 가진 채 있었다.
늙어가는 사냥꾼과는 대조되게, 소녀는 활기조차 잃지 않았다.
수많은 인생을 겪으며 성숙해졌지만, 그럼에도 그 몸뚱아리 하나는 불변이었다.
사냥꾼은 50대에 진입할 무렵부터, 언젠간 소녀와 헤어져야 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리 걱정되지는 않았다. 그녀는 이미 충분히 성숙해졌고, 혼자서도 세상을 살아갈 수 있을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그랬더라면.
분명.
"뭐야, 뒷 이야기는 안 해줘?"
"들어봤자 그냥 기분만 더러워지는 이야기니 말이다. 모르는 게 더 나아."
"그래도 내 전생이라며, 끝까지 얘기는 해줘야지."
사람을 화나게 하는 두가지 방법 중 하나는 이야기를 끝까지 안하는 것이라고 했다.
하물며 그 이야기가 나에 관련된 것이라면 더더욱 기분이 더러울 수밖에 없다.
한참 앵기는 날 바라보던 사서는 결국 한숨을 푹 쉬며 입을 열었다.
"단순하다. 그냥, 그 탐구자 자식이 다시 나타나서 세상을 뒤흔든거지. 탐구자를 제외하고서라도, 다른 모든 엘로힘들 전부가."
"...모든 엘로힘이라니?"
"그 일 때문에 전 세계의 기록은 불타버리고, 몇몇 극소수만 남아 현재까지 내려오고있지. 2000년전에 있었던 대전쟁이야."
이 세상에 그런 역사도 있었다는건가.
하긴, 역사서에 지나칠 정도로 내용이 없다는 게 이상하기는 했다.
고작해야 2000년 전인데, 원래 세계에서는 그 이전의 역사까지 기록되어 있었단말이지.
"엘로힘 걔들이, 신이라는 놈 하나 잡으려고 지구 전체를 개판내 놨다는 거냐?"
"잘 이해했군."
"그래서, 결과는?"
사서가 입을 다물었다.
"...사냥꾼은 살았다만, 그 여자애는 갈가리 찢겨서 심장만 남았지. 그 심장을 차지하려고 엘로힘 사이의 전쟁도 있었고, 그것때문에 본래 지구에 있던 위성 두개중 하나가 그냥 완파됐다."
"어우, 씨발."
"그게 너라는거다."
"어쨌든 지금은 아니잖아."
심장이야 이미 수십번 수백번 뜯겨봤다.
그때의 나처럼 겨우 한번 뽑혀나갔다고 요절하지는 않았다.
'음, 그때의 나랑 지금이랑 동일인물은 아닌 것 같은데.'
아무리 생각해도 괴리감이 너무 심하다. 성격이던, 말투던.
어차피 지금의 나도 아닌데, 그냥 별개의 인물로 생각하기로 했다. 어차피 동일인물인거 알아봤자 아무 쓸모도 없는걸.
"그나저나 그 사이에 뭔가 드라마틱한, 그런 이야기가 있을 줄 알았는데."
"그럼 넌 이게 드라마틱하지 않다는 소린가?"
"아니, 그건 아니고. 그래도 뭐, 그런거 있잖아. 연극식으로 대사도 조금 더 맛깔나게..."
"말을 말자, 말을."
어떻게 지가 죽은 이야기를 듣고도 저딴 말이나 지껄일 수 있는거지, 라며 중얼거린 사서는 다시 내 허리에 줄을 묶기 시작했다.
"아니, 잠깐! 잠깐!"
"왜?"
"너 아직 말 안해줬잖아!"
날 의아하다는 눈길로 바라보는 사서.
그런 사서의 면전에 냅다 소리쳤다.
"죽은 후에도 의식을 유지하는 방법의 선례가 거기 있었다며! 그건 알려줘야지!"
"아, 맞군."
"뭐가 맞군이야 미친새끼야! 자칫하면 또 노가다나 반복할 수도 있었어!"
사서는 한번 말을 곱씹으며 생각을 이끌어내보더니, 곧 떠올랐다는 듯 날 바라보며 말했다.
"내가 사냥꾼은 살았다고 말했었지?"
"...그래, 기억해."
"그 사냥꾼과 관련된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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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를 쫓던 추격자와, 사냥개들에 의해 피투성이로 달빛이 비치는 들판 위에 죽은듯 쓰러져있던 소녀의 주위로, 공간이 일그러진다.
그 사이로 나오는 온갖 팔다리들은 소녀의 보드라운 복부를 파고들어 내장을 헤집고, 그 사이로 심장을 찾는다.
이미 생물이라기 보다는 놀잇감으로 다뤄지는 듯한 모양새였다.
저 멀리서 절규하는 사냥꾼은 이미 그들의 안중에는 없었다.
세상과 흐릿해지고, 경계가 옅어지던, 죽음에 가까워지던 소녀는 평생의 힘을 쥐어짜냈다.
자신의 사지가 뜯겨져 검은 촉수에 들려있던 그 상태에서도, 소녀는 누군가를 지키고 싶었다.
어쩌면, 이 우주에 와서 처음으로 맺었던 인연을.
마침내 굵은 촉수가 소녀의 작은 가슴에서 심장을 뽑아낸 순간, 금빛 실이 사냥꾼으로부터 연결됐다.
그리고, 그곳에서 사냥꾼은 전쟁이 끝날때까지, 자그마한 우주 속에 있었다.
소녀가 죽는 순간 만들어낸, 오직 꿈과 환상으로 가득 찬 우주 말이다.
행복과, 이룰 수 없는 꿈들만이 현실을 이뤄내는 그곳에, 사냥꾼은 엘로힘들의 전쟁이 끝날 때까지 안전하게 있었다.
그리고 전쟁이 끝나는 순간, 사냥꾼은 소녀에 관한 모든 것을 잊은 채 새로 태어났다.
그 자그마한 우주가 사라지고 들판에 남은 것은 한 사람의 소년이었다.
멍하니, 아무런 지식조차 없는 듯한, 그러나 순진한 소년 말이다.
그 소년이 처음으로 들판에 나왔을 때 본 것은, 푸른 하늘과 하늘을 날아다니며 지저귀는 새들이었다.
그 다음으로 시선을 내리자 보인 것은, 들판 위에 갈가리 찢겨진 채, 숨만 썌근쌔근 쉬고 있는 자그마한 소녀였다.
홀린 듯 그 곁으로 다가간 소년은 점차 금빛 실이 옅어지는 소녀의 눈을 바라봤다.
녹색 눈은 이미 생기를 잃은 채였지만, 그 곁에 떨어져있는 심장은 자그마하게 뛰고 있었다.
이미 심장의 본질은 모두 빼앗겨 껍데기만 남은 상태였지만, 그 조차 어떻게든 될거라 생각한 소년은 심장을 들어 소녀의 작은 가슴속에 우겨넣었다.
그러나 소녀의 입에서 새어나오는 건 고통에 가득 찬 신음 뿐, 그 무엇도 변하지 않았다.
무지했던 소년은 그저 가슴에 차오르는 감정만으로 소녀를 붙잡고 울기 시작했고, 소녀는 죽었다.
그 뿐인 이야기다.
"소년이라니. 사냥꾼이."
"외모 묘사는 없는 것 같군, 그냥 지나가는 단역이야."
"흐음..."
어딘가 찝찝했지만, 그냥 넘어가자.
더 깊게 생각해서는 뭔가 괜히 마음만 더 아파질 것 같다.
그도 그럴게, 저 이야기는 나름대로 '비극'이지 않은가.
결코 행복한 결말이라고는 볼 수 없었다.
어정쩡하게, 그냥 소녀만 참살당하고 만 이야기였다.
순애물인줄 알았던 만화가 갑자기, 뜬금없이 나타난 촉수가 여주인공을 갈가리 찢어버리고, 그 내장과 피로 샤워를 하는 꼴을 보이면 대체 뭔 생각을 하겠는가.
기분만 미친듯이 더러워지는거지, 그냥.
"하아...그래서 요지는."
"니가 알아내야지, 내가 뭘 어떻게 하겠나? 이야기속의 너는 사냥꾼을 지키려고, 심장이 뽑히는 순간까지도 의식을 유지하고 있었다. 어쩌면 그걸 이용하면 될 지도 모르지."
"뭐, 어린애들 만화에 나오는 것 마냥 사랑과 우정으로, 이런거 하라는거냐?"
"그렇게까지 말하진 않았다. 차라리 지금 심장을 뽑아줄까? 그렇다면 그때의 기분을 더 잘 이해하게 될 지도 모르지."
사서가 손을 위협적으로 말아쥐었다.
트라우마에 꺄악, 비명을 지르며 소파에서 굴러떨어졌다.
"장난이다, 장난. 애초에 그런걸로 됐으면 지금 이미 성공하고도 남았겠지."
"개새끼..."
"앞으론 죽을때마다 이 이야기를 잘 명심하도록. 어쩌면 이번엔 진짜로 성공할 수도 있으니."
다리를 바들바들 떨며 다시 무저갱 속으로 다가갔다.
보기만 하면 굉장히 아름다운 우주가 저 속에 펼쳐져있었다.
"후우..."
몸을 다잡는다.
가슴에 손을 대자, 몸 안의 심장이 두근두근 뛰고 있는것이 느껴졌다.
'단순하게 생각하자.'
이야기는 복잡하게 해체하고 해석할 필요가 없다. 단순히 저 이야기를 듣고, 내가 뭔 감정을 가졌느냐만 중요하다.
대체 뭘로 인해 의식을 붙잡고 있을 수 있는지를.
대체 어떻게, 초월적인 존재들에 의해 사지가 갈가리 찢기는 순간까지도 의식을 유지하고 싶다는 생각을 할 수 있었는지를.
"흡!"
눈을 뜨고선 곧바로 무저갱 속으로 뛰어들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사방에서 날아오는 가시가 내 작은 몸을 갈가리 찢어버렸다.
"...패인가?"
"아으, 흐, 아니야..."
"기절하기 전에 다시 빼야 할 것 같은데."
"쿠흑, 하으...."
일단 귓속의 핏물때문에 제대로 들려오지는 않지만, 사서와 이유리가 대화하는 내용만큼은 얼추 이해가 갔다.
일어나지도 못해 자꾸 정수리부터 꼬라박는 날 보던 사서는 한숨을 푹 쉬며 내 복부에 박힌 가시를 콱 쥐었다.
"히익! 잠깐! 잠깐!"
"숨 참아라."
푸걱!
"커헉..."
보기 싫은 광경이었다.
난 사서의 손을 멈추고선 피를 토하며 말을 이었다.
"일단, 일단 죽어봐야지. 나 아직 안죽었어."
"...? 뭐. 빼지도 말아달라는거냐?"
"아니, 그냥 큰것만 빼고 바로 저 속으로 밀어넣으라고."
몸속의 파편은 뭐, 나중에 배 째고 빼면 되는거지.
지금까지는 그 파편이 계속 몸 속에 남아서 아플거라 생각하고 그때그때 뺐지만, 이제는 그럴 필요 없다.
지금 중요한 건, 죽는 것 그 자체.
"그럼 잘 참아라."
끄덕끄덕.
고개를 끄덕이자, 사서가 움직이지 못하는 내 목덜미를 들고선 다시 무저갱 속으로 떨어뜨렸다.
"허억, 헉..."
고통은 뇌를 잠식시킬 듯, 녹아내릴 듯 몰려온다.
그럼에도 정신만큼은 버텨야만 했다.
죽음조차 그저 하나의 고통이다. 별개로 생각할 필요 없어.
콰드드득!
"끄하아아아악!!"
수십개의 가시가 몸을 꿰뚫고, 온몸의 내장을 뒤틀었다.
피가 쏟아져나오고, 시야가 붉게 물든다.
아무래도 피눈물이 흘러나오는 것 같다.
씨발, 이정도로 몸이 찢어졌는데 당연히 피가 안나오는 게 이상하지.
목에 박힌 가시때문에 어쩐지 숨조차 제대로 쉬어지질 않는다.
허파가 찢어져서 쉬는대로 전부 빠져나간다.
고통에 몸이 잠식되서, 떨어져나가는 순간 그저 눈을 감았다.
눈을 감고선, 그저 정신만 집중했다.
오로지 원하는 것만, 오로지 바라는 것만.
그것에만 집중한다.
육체는 껍데기고, 정신만이 본질이다.
이곳에서는 정신이 내 본질이었다.
내 보드라운 복부에 쳐박힌 가시들은 이제, 그냥 고깃덩어리에 박혀있는 돌덩이밖엔 되지 않았다.
그렇게 고통이 점점 옅어지고, 세상과의 경계가 흐릿해진다.
죽음과 가까워지지만, 결코 닿지는 않았다.
가까워지면 가까워질 수록 죽음이라는 것 자체가 멀어져간다.
죽을 수 없는 몸이라는 게, 이런 거구나.
파앗ㅡ!
그리고, 암흑으로만 가득 찬 내 시야에는 금빛의 실가닥이 한줄기 보이기 시작했다.
한줄기, 두줄기, 세줄기.
늘어나며.
사아아...
마치 뿌리와도 같이, 공간 전체를 휩쓰는 거대한 금빛의 줄기들.
내가 떨어졌던 바닥을 금빛의 실이 한가득 뒤덮기 시작했다.
그리고ㅡ
'찾았다.'
자그마한 보석을, 찾아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