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5화 〉 3부 5. 옛날이야기
* * *
"케헥, 흐윽..."
"어때, 정신은 유지됐나?"
"씨바알...제발, 작작좀..."
아파. 아프다.
굉장히 아프다.
오로지 원초적인 고통이었다.
옆에서 응원하는 새끼들은 이런 거 경험해본 적도 없겠지.
뱃속에서 꿈틀대는 가시를 붙잡고선 뽑아냈다.
"쿨럭, 커흑..."
"다시 들어갈 수 있겠나?"
꿱 하고 기절해버렸다.
.
.
.
내 상태는 지금 제정상이 아니었다.
아니, 제정상인게 오히려 이상하다.
거진 3시간동안 온몸이 찢기고 터지고 난도질당했다.
복부와 허리쪽은 이제 사실상 괴생명체라 봐도 좋을 정도로 끔찍한 모습이었고, 도서관은 피비린내로 가득 들어찼다.
옆에서 계속해서 물걸레질을 하는 이유리가 보이지만 그런거에 신경쓸 틈이 없을 정도로 내 몸은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다.
눈물이 도무지 멈추질 않았다. 어딘가 고장나버린 건 아닌데, 그냥 씨발 존나게 아파서 그런거다.
도대체 사서 이새끼는 뭘 기대하고 이 지랄을 반복하는거지? 이건 그냥 선례도 없이 막무가내로 내가 성공할거라 생각하는거잖아?
"선례는 있다."
"뭐?"
"선례가, 분명히 존재한다는 말이다. 다만 이걸 너한테 말하기엔 조금 조심스러워서..."
사서는 그 말을 끝으로 말을 줄였다.
다시금 보드라운 속살이 돋아나는 배를 조심스럽게 만지며 물었다.
"뭔데 그래. 사람 궁금해지게."
"알 필요 없다고 말했다."
"야, 야. 쫌. 나 이 고생 하는데 한번정도는 들려줘도 되잖아. 게다가 선례라며?"
사서는 날 바라보며 한숨을 푹 쉬었다.
이유리도 물걸레질을 멈추고 은근슬쩍 우리 둘의 이야기를 엿듣는 중이었다.
"말하면 믿을건가?"
"내가 미쳤다고 믿냐?"
"그럼 그냥 어른이 옛날이야기 해주는 셈 치고 들어라. 토 달지 말고."
"넹넹."
다리를 모으고선 앉았다.
상처에서 피가 터져나와서 다 찢어진 옷을 벗고선 사서의 코트를 빼앗아 입었다.
"씨발년..."
"뭐, 뭐?"
"됐다, 그냥 들어라."
갑작스럽게 자리에 일어나선, 아카식 레코드로 다가가는 사서.
자연스럽게 유리돔 내부로 손을 집어넣더니, 그대로 책을 빼왔다.
"뭐야, 어떻게 한거야?"
"나만 할 수 있다. 어차피 너는 알아도 못 해."
"신기하네..."
큼, 하며 한번 헛기침을 하고선 그 거대한 책을 펄럭거리며 넘기는 사서.
마침내 페이지를 찾은 듯, 쉴새없이 앞으로 넘어가기만 하던 페이지가 툭, 하며 멈췄다.
"루시, 한가지 묻지. 너는 전생이라는 걸 믿나?"
"아니, 안믿어. 넌 인간 꼭두각시 가설도 모르냐?"
"인간은 영혼이 없다는 말 말인가?"
"그래, 그거. 너도 상위차원이랑 연관되어 있으면 잘 알 거 아냐?"
인간은 어차피 영혼이 없다. 그냥 단순히 거대한 한 덩어리로부터 뻗어나온 가지일 뿐이다.
극단적으로 생각하면 거리를 지나가는 사람 아무나 한명 콕 찝어도 나라는 거고, 역사의 위대한 위인이나 역적도 나라는 것이다.
"하지만 루시, 넌 상황이 다르지."
"그게 뭔 개소리냐."
"너의 근원은 두개라고. 알고 있나?"
고개를 끄덕였다.
이 세계의 신과, 본래 인간으로서의 나.
그렇게 둘이 융합해 지금의 내가 만들어졌다.
"뭐, 신이 이세계로 전생해서 내가 됐다는 말이라도 하게?"
"오? 어떻게 알았냐?"
"그걸 씨발 말이라고 지껄이세요? 나도 거짓 진실 분간은 할 줄 알거든요?"
말이 되는 소리를 지껄여야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하지만 사서는 날 귀엽다는 듯 바라보며 피식 웃을 뿐이었다.
"뭐, 그래. 어차피 싸가지 없는 꼬맹이도 어른이 얘기 들려줄때는 얌전해지는 법이니까."
"아니 이 새끼가...!"
"자, 쉿. 옛날이야기다. 아주아주 먼, 옛날이야기."
사서가 조용히 이야기를 시작했다.
"루시 넌 마력이란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나?"
"알지. 그냥 마법같은거 일으키는 힘이잖아. 초현실적이고, 비현실적인거."
사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초현실적이라는 말이 중요하지. 마법이란 것이 과학적인가?"
"하하, 무슨 판타지에서 과학을 논해. 정신 나갔냐?"
"그런거다. 애초에 마법이란 건, 이 우주의 법칙과는 너무나도 엇나가있는 개념이야. 오로지 상상의 산물로서만 존재하던 것."
사서가 하고싶은 말을 파악하지 못하겠다.
"우리 세계에 마력이 등장하기 시작한 건, 2000년 이전."
"...마법에도 역사가 있었구나."
"그리고 그 2000년 이전의 역사는 죄다 소실되어 현재로선 암흑기라고 불리는 시대지. 하지만."
사서가 아카식 레코드를 들었다.
"이 안에, 그 모든 정보가 담겨있다."
"..."
"그리고 이 세계에 마법이 등장하게 된 계기는 너와 깊숙하게 연결되어 있다, 루시."
마법 자체가 신이 죽으며 남기고 간 하나의 유해와도 비슷한 개념이니.
"상위차원의 힘이 우리 3차원에서 물질화된 것. 그게 바로 마력이다."
"허억, 허억..."
수염을 덮수룩하게 기른 숲속의 사냥꾼 하나가 숲을 가로질러 뛰어왔다.
이 근방에선 아무런 사람조차 살지 않을텐데, 방금 일었던 그 거대한 폭발은 무어란 말인가.
"...!"
그리고 사냥꾼은, 언덕 너머에서 보지 말아야할 것을 보았다.
마치 불쾌의 산물이라고 할 만한 것, 촉수, 어쩌면 검은 덩어리.
온 천지를 뒤덮은, 하나의 개념.
자칫하다간 정신을 잃을 정도로 너무나 압도적인 위용이었다.
인간으로선 범접할 수 없는 것이, 이 숲에서 흉흉하게 꿈틀대고 있었다.
그러나 어딘가 이상했다.
그 거대한 '색'은, 마치 다치기라도 한 것 마냥 본인의 본질조차 제대로 지키질 못했다.
위태롭게 비틀대고, 꿈틀대며, 몸의 조직이 후두둑 떨어져 내린다.
마치 피라고 표현해야 옳을 것 같은 검은 액체가 폭포처럼 쏟아져내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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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냥꾼은 공포에 질렸다. 마치 온 하늘이 뒤흔들리는 것 같았다.
저 거대한 것은 지금 공포에 질려있다. 어째서 저런 것에서조차 공포라는 감정이 존재하는 걸까.
저렇게 위대한 존재조차 두려워 하는 것이ㅡ
콰아아아앙ㅡ!
사냥꾼이 생각을 마치기도 전, 그 검은 존재는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다는 듯 사라져버렸다.
잠시간 멍하니 정신을 추스르던 사냥꾼은, 곧 그 존재가 서있던 곳을 향해 황급히 뛰어갔다.
똑, 똑.
물방울이 떨어져 내리는 듯, 보석에는 작은 물결이 번지고 있었다.
영롱한 빛이 어두운 밤의 들판을 조심스럽게 밝혔다.
그 빛에 홀린 듯, 사냥꾼은 보석에 손을 가져다 댄다.
사르륵...
사냥꾼의 손가락이 닿은 곳으로부터 퍼져나가는 작은 물결.
이윽고 그것은 사냥꾼으로부터 인간이라는 종의 정보를, 정신과 그 모든것을 습득하기 시작했다.
자신의 인생, 아니 신생 처음으로 접하는 3차원 세계의 정보였다.
"이런..."
그리고 사냥꾼이 정신을 차렸을 때 그의 손에 안겨있던 것은, 새하얀 은발을 가진 채 곤히 잠들어있는 자그마한 여자아이였다.
.
.
.
사냥꾼은 그 여자아이를 정성스레 길렀다.
비록 자신의 자녀는 아닐 지언정, 그는 이미 딸을 한번 잃어본 경험이 있기에 더욱 노력했다.
세상은 이미 전란의 소용돌이에 휩싸인지 오래라, 사냥꾼은 절대로 소녀를 숲 밖으로 내보내지 않았다.
소녀 또한 그것을 자연스럽게 여겼고, 결코 밖을 향할 생각따윈 하지 않았다.
"고양아ㅡ"
다만 지나치게 순수했던 점이 그 결점이 됐을까.
결국 소녀는 난생 처음보는 생물을 따라 숲 밖으로 나가게 되고, 그곳에서 사람들을 만났다.
자신의 또래인 친구들부터, 이미 모두 커버린 성인들까지.
지금까지 사람이라고는 사냥꾼만 보아왔던 소녀에게 그곳은 신세계였다.
거의 하루 종일 숲 근처의 마을에서 보내던 소녀는, 결국 밤 늦게 사냥꾼의 집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대체 어디 갔다 온거니! 새벽 내내 찾아다녔다, 뭘 하다 이제 온거냐!"
"아저씨, 아저씨! 밖에 사람들이 엄청나게 많이 있었어요!"
그 말로 시작한 소녀는, 사냥꾼의 표정이 험악해지는 것도 모른 채 계속해서 하룻동안 마을에 있던 일들을 떠들어댔다.
또래 아이들을 만나 문명의 놀이를 배운 것부터, 신기한 뾰족한 막대들을 들고다니던 어른들까지.
그렇게 점점 소녀가 신나서 이야기를 계속하고 있을 때, 사냥꾼은 불시에 소녀의 뺨을 후려쳤다.
사냥꾼의 억센 손길을 버티지 못한 소녀는 순식간에 땅으로 엎어졌다.
"...?"
"내 말을 지금까지 뭘로 들은거냐, 밖엔 나가지 말라고, 사람들을 믿지 말라고 몇번이나 말했더냐!"
"하지만..."
"프림로즈!!"
소녀는 충격을 받은 듯, 멍하니 사냥꾼을 올려봤다.
이토록 험악해진 사냥꾼의 얼굴을 본 건 처음이었다.
소녀가 맞아본 것도 인생의 처음이었고, 누군가에게 이토록 매도를 들은것도 처음이었다.
한동안 멍하니 사냥꾼을 올려다보던 소녀는 결국 집 밖으로 뛰쳐나가버렸다.
하룻동안 있었던 그 마을을 찾기 위해서, 그 아름다운 문명의 흔적을 다시금 맛보기 위해서.
사냥꾼은 곧바로 뒤쫓아갔지만, 마치 신기루라도 되는 것 마냥 홀연히 사라진 소녀의 자취만을 쫓을 뿐이었다.
.
.
.
소녀가 마을에 도착하고서, 며칠간은 그곳에 숨어지냈다.
사냥꾼을 혼자 버려두고 왔다는 죄책감, 공포감등이 솟아올랐으나, 결국 소녀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저 첫 날 자신을 맞아주었던 친구들과 어른들을 믿으며, 어떻게든 그곳에서 살아가고 있었다.
끼잉, 끼잉...
그러던 어느 하루는, 소녀가 죽어가는 강아지 하나를 발견했다.
길가에 버려진 채 외로이 죽어가는 강아지였다.
그 강아지를 불쌍히 여긴 소녀는 손을 뻗어 강아지의 몸에 생기를 불어넣어주기 시작했다.
그저 본래 있던 것의 위치를 바꾸는 것. 강아지는 화사한 빛과 함께 생기를 되찾고 활발하게 뛰어다니기 시작했다.
그런 강아지를 기쁜마음으로 바라본 소녀는 일어나 다시금 친구들에게 향하려 했다.
그러나 소녀가 뒤돌았을 때 본것은, 경악하며 자신을 바라보는 무수한 이들의 시선.
친구라 여기던 이들조차 두려워하며 다가오지 못했다.
어째서ㅡ 냐고 물으려 했지만, 말을 섞지조차 못했다.
빠각!
프림로즈는 그대로 쓰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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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참이 지나서, 집을 떠나 소녀를 찾으러 마을까지 내려온 사냥꾼이 조심스럽게 주변을 물색했다.
밤하늘의 어두운 불빛에 사람들은 사냥꾼을 발견하지 못했다.
그렇게 한동안 주변을 돌아다니던 사냥꾼이 발견한 것.
자그마한 신음소리에 고개를 돌려 숲 깊은곳을 바라봤다.
마을로부터 자그마한 길이 나있는 외딴 곳이었다.
그리고, 사냥꾼이 그곳에 도착했을 때 보인 건, 온몸이 처참하게 난도질당한 채 죽어있는 소녀의 시신이었다.
"..."
사냥꾼은 울지 않았다.
다만 소녀의 시체를 담담하게 안고선, 다시 집으로 향할 뿐이었다.
소녀의 여린 배와 가슴에 박힌 창과 못들을 뽑고선, 가지런하게 옷을 입혀줬다.
눈물로 얼룩진 소녀의 얼굴을 씻기고, 피로 흠뻑 젖은 소녀의 몸을 청결하게 닦았다.
넋이 나간듯한 표정의 사냥꾼은 멍하니 화환을 만드는 작업에 열중했다.
"으윽..."
"?!"
그리고 어느 순간, 뒤에서 들려온 신음소리에 사냥꾼은 황급히 뒤를 돌아봤다.
조심스럽게 침대에 누워있던 소녀는 어느샌가 일어나 사냥꾼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째서 살았느냐, 어떻게 살아났느냐,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거냐.
사냥꾼은 모든 물음을 입 속으로 집어삼켰다.
중요한 건, 소녀가 살아있었다는 사실, 단 하나뿐이었다.
"?!"
사냥꾼은 소녀에게 달려가 몸이 으스러져라 꼭 껴안았다.
다시는 잃지 않겠다 다짐하며.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