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3화 〉 3부 3. 타차원
* * *
"뭐 하다 이렇게 늦게 돌아온거야."
"애초에 난 널 배려해줄 이유가 없다."
"아, 협력관계 추구한 건 너잖아! 왜 자꾸 나한테만 뭐라 그러는데!"
사서는 얼굴을 확 구긴 채 투덜거렸다.
그래도 결국 내 말을 들어주기는 하는 모습이었다.
"그래서, 이번엔 또 무슨 일로 찾아온거냐?"
"이거 돌려주러."
후드티의 주머니에서 검은 리모컨 하나를 꺼냈다.
리모컨을 알아본 사서는 눈이 휘둥그레지며 나와 리모컨을 번갈아 쳐다본다.
"정말이냐? 이제 아예 쓸모가 없다고?"
"그래. 어차피 이젠 신격도 없는데, 굳이 쓸 필요는 없을 걸?"
내가 건네는 리모컨을 사서가 조심스럽게 받아들었다.
마지막에 확 낚아챈 사서는 곧바로 품속에 리모컨을 집어넣는다.
고맙다는 말은 한마디도 없이 그냥 지 챙길것만 챙기는 모습이 얄미웠지만 딱히 태클을 걸지는 않았다.
사서에게 본론을 꺼내려던 그 순간, 갑작스럽게 중앙의 붉은 카펫에서 새하얀 빛이 발산되기 시작했다.
"윽..."
눈을 떠보자, 눈앞에는 웬 여자가 있었다.
어디서 많이 본 얼굴인데 도무지 어디서 본 얼굴인지 떠올려낼 수가 없었다.
"...?"
그 여자는 날 한번 슬쩍 바라보더니, 곧 사서에게 다가가 귓속말로 뭐라 속삭인다.
"뭐야, 쟤 누군데."
"넌 알 필요 없다. 현재로선 그냥 협력자라고만 생각하면 편해."
사서는 또 숨기는게 뭐가 그리 많은지.
사서의 말을 무시한 채 여자의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봤다.
"...아!"
"뭔데, 또."
사서가 짜증스레 중얼거렸다.
귓속말을 마친 여성은 한발짝 뒤로 물러서 나를 향해 돌아섰다.
정면을 보니 확실히 누군지 알 것 같았다.
"왜 저렇게 이성주랑 닮은거야?"
"그야 얘가 이성주 누나니까, 멍청아."
"허??"
정말 개뜬금없이 만났다.
이성주 그녀석, 연구자에 소속되어 있었는데.
"가족이 그렇게 갈라져도 되는거야?"
"어차피 이성주는 배신하고 연구자쪽으로 달라붙은 거니 말이다. 지금은 재결합을 구실로 서로 협력하고 있는 중이다."
다시한번 이유리를 바라봤다.
이유리는 이상할 정도로 아무 말도 없이 나만 바라보고 있는 중이었다.
"멍청하게 생겼네요."
"야!"
날 보고 처음 꺼내는 말이 기껏해야 저런거라니.
사서는 그 말에 한바탕 크게 웃고선 나를 향해 다가왔다.
"그래, 일단은 먼저 시작한 얘기는 끝내자. 루시, 필요한 게 있다고 했지?"
"아니, 이유리는..."
"무시해라, 일단. 지금은 너랑 전혀 관계 없는 일이다."
투덜거려도 사서는 굽힐 기색이 없어보였다.
한숨을 푹 쉬고선 곧 본론을 꺼내기 시작했다.
"지구 자체를 상위차원과 격리할 방법을 찾는 중이야."
"개소리군."
"아니, 말좀 들어봐."
시작부터 부정하려는 사서새끼였지만 일단 어떻게든 붙잡아 세우고 대화를 이어나갈 수 있었다.
"그 리모컨 있잖아, 어떻게 개량할 수는 없어?"
"그게 가능했다면 진작에 했겠지. 내가 그것조차 시도해보지 않았을 줄 아나?"
"아니면 그것도 있잖아! 도서관에 장치되어 있다는 그 현실격리장치!"
도서관에 장비된 현실격리장치는 지금까지 도서관을 상위차원으로부터 격리시키고 있었다.
그 말은, 아무리 짧게 잡아도 최소 십년 가까이는 상위차원으로부터 격리할 힘이 있는 장치라는 것이다.
"...그건 나도 잘 모르겠다. 도서관을 외부에서 관찰해본 적은 없으니 말이지."
"그럼 지금부터라도 한번 관찰해보면 되는거잖아?"
"하지만 그것조차 잘못 돌아갈 가능성이 커. 어쩌면 아예 도서관 자체의 특성이라, 그걸 지구 전체로 옮기는 건 그냥 불가능할 수도 있지."
이마를 짚었다.
"그럼 넌 지금 사태를 어떻게 해결하려고 하는건데?"
"사실 나도 지금 어떻게 돌아가는 상황인지는 잘 모른다. 나또한 인간이니 관련 정보들을 모조리 잊어먹을 수밖에 없지."
"뭐 씨발?"
어이가 털렸다.
사서는 지금 제대로 정보조차 모으질 못했다는건가?
"그럼 대체 지금 상황을 어떻게 알고 있는건데??"
"이거다."
사서는 품에서 자그마한 수첩 하나를 꺼냈다.
수첩을 펼쳐보니, 안에는 웬 시같은 것들이 잔뜩 써져있는 모습이었다.
"이게 뭐야?"
"상황을 기록해둔 암호같은거지. 후에 정보변질이 일어나더라도 언제나 읽고서 기억해낼 수 있게 말이야."
"오..."
수첩을 흝어봤다.
대충 이렇게 보면 그냥 싸구려 시집같아 보이는데, 이런걸로 정보변질에 대항할 수 있다는 소리인가?
"그럼 암호를 사용하는 외부에서도 이런 정보들을 습득할 수 있는거...아닌가?"
"그럴 수도 있겠지. 하지만 지금은 사태가 일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았어. 아마 위화감을 느끼는 사람들이 나타나기엔 너무 이른 시간일거다."
그렇댄다.
결국 현재로서는 우리밖에 행동할 사람이 없다는 소리였다.
"확실한 정보가 없다면 아마 국제연합단위에서 움직일 일은 없을거야. 지금으로서 필요한 일은 일단 이 대대적인 망각사태를 어떻게든 일단락 시키고, 사람들의 협력을 구하는거지."
"...가능할란진 모르겠군."
"일단 해봐야 알겠지."
소파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직 몸 여기저기 쑤시긴 하지만 그래도 움직이는 것엔 아무 문제 없었다.
"야, 뚜껑 열어봐."
"...뭐?"
"도서관 외부 관찰 못했다고 했잖아. 이번에 한번 해보게."
"미쳤나?"
"아니, 오히려 내가 제일 정상일거다."
사서가 한숨을 푹 쉬었다.
"마스 넌 여길 또 왜 온건데?"
"당연히 구경하러 온 거 아니겠냐?"
성화연이 마스를 향해 질책하자, 마스가 장난스럽게 말했다.
고개를 저으며 다시 앞을 바라보는 성화연.
그곳에는 무수한 초상능력자들이 모여 각자 엄청난 양의 마력들을 발산하고 있는 중이었다.
"이게 다 해류 안정화때문에 이러는 거라고?"
"그래. 지금 이것만으로도 벅찬 상태야. 연계마법이 제대로 정착될 때까지 사람의 힘으로 버텨야 한다는건데, 12시간 단위로 돌려써도 힘든 건 매한가지고."
갑작스럽게 일어난 전 세계적인 기후이상 사태에 대응하는 하나의 방식이었다.
현재의 기술력으로 기후이상을 막을 방법은 꽤나 많았다. 물론 그 기술력 대부분이 초상능력과 마력에 의존하는 것이니 초상능력자는 필수였다.
여튼, 아무리 기술력이 좋다고는 해도 결국 그 기술을 제대로 써먹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한데, 그를 위해서 버티기 용으로 투입되고 있는 초상능력자들이 바로 여기 모인 이들이었다.
"초상능력자 없는 국가에서는 아예 빌려가고 있댄다. 우리나라는 그나마 상황이 좋은거야. 이렇게 돌려막을 인원도 있으니까."
"네, 네..."
마스는 퉁명스레 중얼거리고서는 주변에 모인 기자들과 합류해 사진을 찍어대기 시작했다.
하늘에 쌓인 먹구름이 위험하게 넘실대도 여기 모인 이들은 결코 이 자리를 벗어날 수는 없었다.
기후이상이 초래할 영향력은 아무리 예측을 해봐도 도저히 감조차 안잡혔으니 말이다.
자연은 혼돈이라는 사실을 누구보다 뼈저리게 체감하는 그들이었다.
쿠구궁...
수평선 저 너머에서 거대한 먹구름이 몰려온다.
지금은 기껏해야 겨울인데도 저런 거대한 먹구름이 몰려오는 걸 보면 이미 말 다한 것이다.
그 먹구름을 발견한 수백, 수천명의 초상능력자들은 한층 더 마력을 힘껏 발산하기 시작했다.
그들로부터 생성된 온갖 마법의 합작들은 그 이상기후를 어느정도 흩어내고 완화하며 언뜻 제대로 작동하는 듯 싶었다.
물론 이상기후들이 저런 먹구름으로만 나타날 리는 없겠지만, 일단 현재로선 눈에 보이는 걸 완화하는게 최선이었다.
쿠구구구...
그렇게, 몇 시간을 그렇게 버텼을까.
갑작스럽게 해안가 주변에서 거대한 지진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 대피! 모두 대피시켜!"
해안가를 소란스러운 사이렌 소리가 가득 메운다.
여전히 이상기후 안정화를 위해 해안가에 남아있는 초상능력자들을 제외하고선 전부 안전구역으로 대피하기 시작했다.
근처의 평지에 마련된 캠프를 향해 이동하자, 저 멀리 안개에 쌓인 바다의 전경이 보이기 시작했다.
사아아ㅡ
바다로부터 지상을 휩쓰는 한줄기 바람.
여느때처럼, 평범하게 부는 바닷바람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 순간 그곳에 모인 모든 이들은 결코 저것이 평범한 대기의 움직임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본능적으로, 공명계열 초상능력자가 아닌 이들조차 감지할 수 있을정도로 엄청난 양의 마력이 바다로부터 퍼져나온 것이다.
"...!"
안그래도 소란스러웠던 캠프는 한층 더 시끄러워지기 시작했다.
동시에 울리는 굉음에 모두가 화들짝 놀라며 저 앞의 바닷가를 주시하기 시작했다.
부우우우ㅡ
마치, 뿔나팔이 울리는 듯 웅장하면서도 묵직한 소리.
바다에 구멍이 뚫리기 시작했다.
천지를 휘어잡는 엄청난 굉음에 모두가 귀를 막은 채 자리에 주저앉았다.
쿠구구...
지상을 휩쓸던 지진은 한층 더 격렬해지며 텐트 몇개가 무너져 내렸다.
그렇게, 그 혼란스러운 상황이 몇분 정도 흐른걸까.
서서히 잦아들기 시작한 굉음과 지진에 사람들은 조심스럽게 귀에서 손을 때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세상에."
그리고 그들은, 그 일련의 사건의 근원지였던 바다를 바라보고선 하나같이 말을 잃었다.
충격을 먹어 멍하니 서있는 사람들도 있는가 하면, 저게 대체 무슨 일이냐고 통신기의 너머로 미친듯이 소리치는 이들도 있었다.
휘오오오...
구멍난 바닷속에서 솟아올라와 있는건, 말 그대로 하나의 '도시'였다.
반쯤 침수된, 이미 사람들이 살 것 같지 않은 폐허가 된 도시.
먹구름과 안개에 가려 실루엣만 보이는 상황이었지만, 오히려 그런 상황이 더욱 소름끼치게 다가온다는 사실만큼은 변할 수가 없었다.
"...사람들 더 모아라."
현장지휘관이 그리 중얼거렸다.
그리고 그 날, 전 세계의 주요 해안에선 거대한 마천루들이 바다로부터 솟아올랐다는 보고가 이따랐다.
콰앙ㅡ!
"살살해, 미친년아!"
"장비가 없으니까, 이렇게, 하는 거 아니겠냐!"
한편, 도서관에서 난 미친듯이 땅을 향해 주먹을 내려치고 있었다.
어찌나 단단한지 내 마력으로도 깨질 기색을 보이질 않았다.
"아니, 진짜 외부로 나가는 문 같은건 없는거냐?"
"당연하지. 차라리 이번에 하나 만들어두는 것도 좋을 것 같군."
헐떡이며 사서에게 묻자 짜증날 정도로 평온하게 대꾸했다.
한번 이마의 땀을 쓱 닦고 난 나는 다시금 땅을 부수는 작업에 열중하기 시작했다.
쿠구궁!
책장에서 책 몇개가 후두둑 떨어졌다.
주변에서 책을 정리하고있던 이유리는 한숨을 푹 쉬며 다시금 책이 떨어진 자리를 향해 이동했다.
들려온 욕짓거리는 어쩌면 당연한 불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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콰아아아앙ㅡ!
몇 시간이 흐른걸까.
미친듯이 땅을 내려쳐 이미 송장이 되어버린 내 몸은 도무지 움직일 기색을 하지 않았다.
그래도 마냥 헛된 일은 아니었다는 듯, 땅에는 크게 균열이 생겨나고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 힘을 쥐어짜내 바닥을 내려친 그 순간, 엄청난 굉음과 함께 뿌연 연기를 내뿜으며 땅바닥은 터져나갔다.
"콜록, 콜록..."
이미 주변의 책장에서 책들이 전부 떨어진 뒤라, 이유리도 내가 하는 뻘짓을 구경하고 있었다.
그렇게 수시간을 고생한 끝에, 내가 도서관에 만들어낸 하나의 구멍.
"아으, 손이야..."
마력으로 강화했는데도 이미 손은 반쯤 작살나있었다.
호호 불며 깨져나간 바닥을 바라본다.
고오오...
부서진 바닥의 파편들은 저 멀리 떠다니고 있었다.
그 안으로 보이는 건, 하나의 넓디 넓은 별바다.
"...너도 처음 보는거지?"
"굉장하군. 역시 선구자들이란..."
이유리가 선구자 타령을 사서를 흘겨봤다.
"누가 갈래?"
"당연히 루시 네가 가는 거 아닌가?"
나도 사서를 흘겨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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