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6화 〉 2부 마지막. 과거와 현재와 미래
* * *
개판났다.
얘들이 지금 갑작스러운 사태에 정상적으로 사고조차 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주변은 온통 고함소리에 시끄러운 소리들로 가득 차 있고, 난 괜찮다고 극구 거부하는데도 기어코 병원으로 끌고와 이렇게 병상에 앉아있는 중이었다.
"아무 문제 없습니다. 정말로요.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굉장히 이상한 부분이 많긴 한데..."
검사상으로 아무 이상 없다는 의사의 말에도 여기 가둬두고 있는 중이었다.
근데 대체 왜 나만 가둬두는건데?
거기에 나만 있었던 것도 아니고, 한서우랑 마스도 있었는데.
"조사단이 기밀사항쪽이랑은 상당히 거리가 있는 지위다 보니 어쩔 수 없다. 그냥 니가 이해해."
"...미치겠네."
그러니까, 파편과의 전투가 일어났던 그곳에 트럭과 헬기를 한무더기 끌고 온 사람들은 전부 조사단 소속이었다는 말이다.
그렇다보니 아예 날 그냥 어린애로 보고있다.
한서우나 마스같은 성인이면 몰라도, 어떻게 좆만한 꼬맹이인 내가 거기서 멀쩡할 수 있겠냐는 논리지.
"하다못해 시설이라도 좀 좋으면 별 말 안하겠는데."
게다가, 결국 뭐가 됐던 이곳은 분쟁지역. 그나마 남아있는 병원과도 같은 시설이 여타 다른 국가에 있는 곳들처럼 깨끗하고 튼튼하리라 생각하면 오산이다.
벽 구석구석에는 미처 다 닦지 못한 때들이 남아있었고, 병원 전체에는 퀴퀴한 혈향과 곰팡이냄새가 진동했다.
딱 야전병원같은 생김새였다.
"그래도, 아무 문제 없으니까 조금 있으면 풀어주겠지."
"루시 너 좀 더 자세히 조사해보겠다고 난리치던 의사들도 있었긴 한데, 우리가 알아서 처리할 거니까 걱정 말고."
성화연과 마스가 침대 옆에서 말했다.
[Próximas noticias...]
라디오에서 알아듣지 못할 언어가 마구 흘러나오는 것이 귀에 들어온다.
주변도 소란스러워서 제대로 쉬지도 못하겠고.
그렇게 주위의 흐름에 말려들어 나까지 멍해지려는 그 때, 병실의 문을 똑똑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
문을 열고 들어온 것은 한서우였다.
성화연은 분위기를 눈치챈 듯, 조용히 마스의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우리는 일 때문에 바빠서... 지금은 가봐야할 것 같네. 둘이 얘기 잘 해."
"...? 난 지금 일 없는...읍!"
마스의 얼굴을 콱 쥐어잡고선 병실 밖으로 끌고나가는 성화연.
잠시 그 모습을 바라보던 한서우는 이내 침상 곁으로 다가와 풀썩 걸터앉았다.
"...루시."
"에...네?"
어딘가 모르게 느껴지는 어색함에 무심코 존댓말로 대답해버린다.
한서우는 잠시 멈칫 하더니, 이내 풋 하고 웃으며 말했다.
"응, 오랜만이지?"
"아...응."
"나한테 뭐 묻고싶은 건 없어? 어떻게 기억하고 있냐라던가, 아니면 그동안 어떻게 지냈던가..."
사실 시간의 격차라는건 생각보다 꽤나 크다.
9년전 아카데미에 다닐 적의, 그 17살 소년은 어디가고 26살의 어엿한 성인이 되어 다들 1인분을 하고다닌다.
난 아직도 땅딸막한 꼬맹이인데 말이야.
이 감정은 이미 성화연을 처음 만났을 때부터 느껴왔던 거다.
뭐, 진부하긴 하지만...그래도 남들 다 저러고 다닐 때, 나는 아직도 붕 뜬 듯 세상에 돌아다니잖아.
그래도 나도 마냥 헛살지는 않았다고, 그나마 인간관계라도 있는 게 어디야.
이런 세상에서 아마 제대로 된 친구조차 없었다면 진작에 다 놔버리고 포기하지 않았을까 싶다.
"사실 어떻게 기억하고 있냐는 건 물을 필요 없어."
"응?"
"이미 서아 만나고 왔거든."
"아...1학년 때, 총공습 며칠전에 있었던 그 실종자 말이구나."
하긴, 한서우는 아직 윤서아가 누군지 제대로 모르는구나.
만나본 적도 없으니.
그러고보니 윤서아는 정말로 사라진걸까 하는 잡념이 머릿속으로 두둥실 떠오른다.
어차피 몇초 지나고 바로 사라졌지만.
"얼마 전에, 기억해내고 난 후에는...솔직히 나도 잘 모르겠어. 내가 그때 기뻐했던건지 슬퍼했던건지."
"그게 뭔 말이야?"
"나마저 루시 널 잊었던 게 자괴감들었어, 끝까지. 그럼에도 결국은 기억해내고 찾을 수 있었다는 건 기뻤고. 두가지 감정이 한꺼번에 휘몰아친거야."
고개를 푹 숙이며 말을 이어가던 한서우를 잠시 바라보던 난 중얼거렸다.
"...징그러워."
그 말을 들은 한서우는 눈을 땡그랗게 뜨고선 날 바라보더니, 곧 내 표정을 보고선 푸흐흐, 하며 웃었다.
여느때처럼 나긋나긋한 웃음소리였다.
"응, 그래. 따지고보면 다 웃긴 일이야. 전부."
"애초부터 감정이고 자시고, 비난의 화살이 틀어진 것 같아 보이는데."
"그래도, 좋잖아."
잠시간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던 나는 입을 열었다.
"하긴...나도, 어릴적부터 동화를 동경해왔으니까."
"...해피엔딩을 싫어하는 사람이 어딨겠어?"
"사람이 원래 본성 끝까지 비틀어지면 그렇게 될 수도 있는 법이야. 인터넷 좀만 둘러봐라, 너도 치를 떨 걸."
한서우는 또 한번 웃음을 터뜨렸다.
너무 사람좋게 웃는 목소리라, 나도 덩달아 기분이 풀려서 그냥 피식 한번 웃어줄 뿐이었다.
"근데, 루시."
"?"
"동화를 동경하는 건 모두 마찬가지야."
뭔 소리를 하는건지 몰라서 잠시 침대에 걸터앉은 한서우의 얼굴을 올려다봤다.
안대로 가려지지 않은 내 하나뿐인 눈을 잠시간 바라보던 한서우는, 곧 자리를 털며 일어난다.
"이상적인 현실을 그대로 구현해둔 게, 동화라는 환상이니까."
"그렇지."
"근데 마냥 환상이라고 치부하면서, 동경만 해서는 아무 소용 없잖아? 결국 현실이랑 환상은 같은거야."
뭔가 심오한 말이네.
그래도 꽤나 멋진 말이라 딱히 태클을 걸진 않았다.
"그럼..."
병실의 문을 열자, 복도의 소란스러운 소리가 한꺼번에 안으로 휘몰아쳤다.
한서우는 나가기 전 나를 한번 바라보며 마지막 한마디를 건넸다.
"가끔은, 자신이 동화속 주인공이라고 생각해보면 어때?"
"...주인공은 너잖아."
"루시 넌 언제나 나보고 주인공이라고 하더라. 진짜는 못보고 말이야."
마지막으로 생긋 웃은 한서우는 곧 손을 흔들며 문을 닫고 나갔다.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보던 나는 다시금 고개를 돌려 창밖으로 흘러가는 구름들을 바라봤다.
"만화 주인공 아니랄까봐, 있어보이는 말은 잘하네..."
침대에 폭 안겼다.
몇 시간 전까지 느껴지던 시선도 하나를 제외하고선 전부 사라진 모양이라, 맘 놓고 편히 쉴 수 있었다.
잘박거리며 자갈밭을 밟는 소리가 점차 커진다.
병원뒷쪽의 작은 공터에 서있던 여성은 그 소리를 듣고선 발걸음의 주인을 향해 몸을 돌렸다.
"...왔습니다."
"만나본 기분은 어때?"
"오묘하네요."
한서우는 이유리를 바라보며 말했다.
이유리는 그 말을 듣고선 조금 물러나 뒷짐을 지며 돌아섰다.
"...하나 물어볼 게 있습니다."
"물어봐."
"정말로, 이게 전부 진실인건지...궁금해요."
한서우의 손에 들려있는 건 작은 가방.
그 속에 담겨 있는 것은, 5권 가량의 두꺼운 책이었다.
"...보장해. 그건 저 너머에서 가져온 것들 뿐이니까."
"..."
한서우는 고개를 푹 숙이고선 잠시간 가방을 꼭 껴안고 바라봤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이유리는 입을 열었다.
"학자에 의해서 이곳으로 도피하기 이전에, 온갖 곳을 돌아다니며 모았던 그 세계의 정보중 하나야. 그리고 그게 해방자들이 선구자라는 작자에게서 들었던 세상의 모습이고."
책의 내용은 한 시리즈의 만화책이다.
비록 완결까진 나지 않았지만, 그래도 엄연히 출판까지 되어있는.
그리고 이 책들은 모두 저 너머의 지구에서 넘어온 것들이다.
이유리가 말하길, 이 책의 존재 자체가 저 너머의 지구의 정체를 확실시 할 결정적인 증거라고 했다.
"선구자들의 문헌 중에서도 가장 중요하게 기록되어 있는 구절이라 말이지."
저 너머 세계의 인간들이 모두 이곳으로 넘어와 마수가 되기 직전, 두 세계의 융합을 미리 알렸던 것.
징조, 조짐.
두 세계의 사이를 잇는 만화경이었다.
흔히 '구원해주세요, 검성님!'이라는 제목의 만화로 알려져 있는 책.
한서우는 이유리에게 책을 넘겨받은 후 꼬박 하루 가량을 정독하는 데에 열중했고, 모두 읽고 난 뒤 한서우의 심정은 형용할 수 없이 심란해졌다.
성화연은 이미 이야기의 초장부터 반신불수가 된 채 영구적인 장애를 안고 살아갔다.
마스는 몰려드는 마수와의 전투로 희생됐고, 그가 아는 서울의 모습마저 초토화 된 채였다.
비록 그 모든 과정이 3년여에 걸쳐 서서히 일어난 일이라고는 해도 말이다.
루시는 초장에는 나오지조차 않았다.
다만 이야기의 중후반부, 완전히 황폐화된 한반도로 건너갔을 때 이야기속의 한서우가 발견한 꼬마였다.
끔찍하게 어딘가 망가져 결손되어 있던 그 소녀는 이야기의 후반부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 소녀는 루시라는 이름조차 아니었다.분명 모습은 완벽하게 루시와 같았지만 말이다.
그저 알파라는 암호명 비슷한 것으로 불러달라고만 했다.
그리고, 그 평범했던 소녀를 결국 종반부에 와서는 한서우 자신이 숨통을 끊어버린다.
로엘로아흐 프로젝트의 실체와, 그 모든 것을 종식시킬 수 있는 '코어'의 발견.
연구자에 의해 완전히 꼭두각시가 되어버린 '알파'.
코어를 완성시키기 위해 저 너머 종이의 자신은, 죽기 싫다며 훌쩍이는 소녀의 심장을 적출해 대검에 박아넣었고, 그 길로 모든 것은 끝이났다.
마침내 전쟁이 끝났을 때 그의 발밑에 남은 건 소중했던 무수한 이들의 시체, 그리고 순진무구했던 작은 소녀의 온기뿐이었다.
맨발에 채이던 차가운 시신들의 거죽은 죽어나간 생명들의 잔류였을 뿐이다.
그 뒤로 더 거대한 무언가를 암시하며 이야기는 계속해서 이어졌지만, 이 이후의 이야기는 없다.
책은 거기까지였다.
"대체 이 책을 저에게 보여주시는 이유가 뭡니까?"
"난 궁금한거야. 과연 네가 어떤 반응을 보여줄 지. 왜, 너도 그렇지 않아? 정작 가장 중요한 단서를 얻었는데 그 당사자에게 보여주질 않으면 아무 쓸모도 없는 거잖아."
혼란스러운 마음에 그리 물어봤을 때, 이유리가 답한 내용이었다.
그 어지러운 마음을 정리하고, 한데 뭉쳐서 응어리쳐놨다.
그럼에도...
"루시를 만나고 나니까, 그래도...이런 것 따위, 아무런 상관조차 없는 건 알겠네요."
한서우는 가방을 열고선 안에있는 책들을 모두 떨궈냈다.
그러고선 라이터에 불을 지펴 그 위로 툭, 던진다.
서서히 치솟기 시작하는 불길.
이유리는 그 모습을 보고서도 딱히 기분나빠하는 눈치가 아니었다.
오히려 살짝 웃으며 안도하기까지 했다.
한서우는 책이 모두 잿더미로 변해버린 걸 보고 나서야 몸을 돌렸다.
마지막으로 떠나기 전 한서우가 중얼거린 말에, 이유리도 만족스럽게 그 자리를 떴다.
"어차피 이야기 같은 건, 전부 과거의 이야기이고, 기록된 것일 뿐이니까요."
"...그래?"
"비록 그 모든 불행이 루시에게 돌아갔다고는 해도, 모두 살아있습니다. 성화연도, 마스도, 다른 이들도. 심지어 루시도요. 살아있기만 한다면...언제나 행복해질 기회는 있잖아요."
낭만적인 사고방식이네, 라며 조소했지만 한서우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현실에 과거는 없으니까요. 언제나 현재와 미래만이 존재할 뿐입니다. 과거도 전부 환상일 뿐이에요."
그 환상과 현실이 같을 뿐이지만 말이다.
분홍빛으로 물들기 시작하는 하늘을 배경으로, 병원 주변의 소리는 여전히 시끄럽기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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