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5화 〉 2부 44. 자아
* * *
내가 지금 마약이라도 한건가.
눈앞에 헛것이 보인다.
하지만 눈을 비비고 다시 앞을 바라봐도 저게 한서우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었다.
"왜??"
왜 쟤가 저기서 튀어나와?
아니, 물론 한서우가 이 근처에 있을거란 건 알고 있었지만, 얘가 어떻게 알고 여길 찾아온거지?
심지어 저 괴물까지 알아서 떨어져나갔다.
현재의 상황을 현재의 내 두뇌로서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까드득
적막만이 감돌던 폐허에 다시금 괴성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한서우의 발밑에 깔려있는 괴물에게서 쏟아져나오는 소리들이었다.
"얘기는 나중에 하자, 루시."
"네?"
이젠 내 이름까지 알고 있다는건가.
대체 뭐가 어떻게 된건지.
일단 혼란스러운 마음부터 억눌렀다.
한서우는 고개를 돌리며 발밑에 깔린 검은 괴물을 돌아봤다.
그러고선 누더기 대검을 높이 치켜들어, 콱, 하며 땅으로 내리쳤다.
쿠웅!
비정상적일 정도로 울리는 거대한 충격.
그와 동시에, 아래 깔려있던 괴물은 산산히 터져나갔다.
휘이이...
고요하다. 싸늘한 정적만이 남았다.
"...?"
대체 어떻게 죽인건가, 싶었지만 한서우라면 그럴수도 있겠다 싶었다.
탐구자조차 한서우때문에 자신의 죽음을 위장해서, 나를 따로 대체현실로 끌고들어갔는데 말이야.
아마...저런 파편에 불과한 엘로힘이라면 압도적인 격차로 쳐발리는 게 당연하겠지.
어떻게 엘로힘을 죽일 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야.
아니 그나저나 저거 내가 다 잡아둔건데, 와서 막타만 치고 가져가네.
의미없는 불평을 투덜거리며 유독 조용해진 한서우를 바라봤다.
"...한서우?"
"쉿."
괴물은 분명 터졌음에도 아직까지 심각한 한서우.
뭔 일인가 싶어 주변을 둘러봤다.
그리고 잠시 후, 주변의 시야를 꽉 채우는 기이한 현상.
사아아...
마치 검은 먼지가 수두룩하게 모여 공중을 부유하는 듯 했다.
서서히 뭉쳐지고 하나로 합쳐져, 이내 공중에서 하나의 형상을 만들어낸다.
"와..."
"조심해."
결국 이정도로도 죽지는 않는다는 거구나.
뭔가 보스전 최종페이즈같아 보이긴 한데, 그래봤자 파편에 불과한 놈이니...
그러다 저놈에게서 연결되어 있는 하나의 가닥을 발견했다.
그 검다란 선은 저 지하에서 쭉 연결되고 있는 중이었다.
검은 먼지들로 이루어진 그 선은 짧아지고 짧아져 마침내 완전히 끊겨버렸다.
저게 뭔 의민진 알 수 없는데, 일단 생긴걸로만 봐선 뭔가에서 저 먼지를 떼어내 자신의 몸을 구축하는 것 같다.
그리고 그 뭔가란, 저 아래쪽에 있는 엘로힘의 봉인된 육체일 거라는게 제일 높은 가능성이지.
본체에게서 조금씩 떼어내서 자신의 육체를 재생시키는거다.
주객전도가 따로 없네.
'어차피 본체는 봉인당한 상태고, 사실상 자아를 가지고 움직이는 쪽은 저 괴물이니까.'
더 강한쪽이 주인의 자리를 차지하는 건 오히려 당연한 것일지도 몰라.
몸의 재생이 끝나가고 있는 파편을 바라보며 머릿속으로 마법진을 구상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문득 한서우를 바라보며 물었다.
"한서우, 하나만 묻자."
"응?"
"넌 나를 기억하고 있는거야, 아니면 그냥 이름만 아는거야?"
내 말에 한서우는 뜸을 들였다 입을 연다.
"기억해. 전부."
어딘가 서글프면서도 밝은 목소리였다.
그 말에 나는 피식 웃으며 다시금 저 앞을 바라볼 뿐이었다.
고오오...
잠자는 듯 잔류하는 공기와, 마력과, 신격.
폭풍전야와도 같이 적막했던 공터가 다시 무수한 폭음으로 잠겼다.
마치 최종페이즈마냥 현란한 등장씬을 보여줬던 저 파편은 예상대로 이전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이었다.
이전의 모습이 그저 지성없이 막무가내로 전부 꺠부수는 모양새였다면, 이제는 야비하게 나온다.
자신의 몸을 지키고, 마법마저 일전의 규모만 큰 마법이 아닌, 한 점에 집약된 마법을 구사한다.
위력은 줄었지만, 정밀도가 늘었다.
그 덕에 폭발이 그렇게 크지는 않았다.
다만 하나하나가 위력적이었을 뿐이고.
마치 위력 자체의 수준이 다른 총을 보는 듯 했다.
마력으로 집약된 총 말이다.
한서우와 나의 경우, 나는 압도적인 화력으로 밀어붙이는 경향이 있고, 한서우는 육탄전으로 깔아뭉개는 타입이다.
사실상 내가 자칫 잘못하면 전부 휩쓸리게 할 수 있는, 위험천만한 듀오라는거다.
그래도 꼴에 한서우라고 본인이 나에게 맞춰준다.
마력을 감지하는 능력덕에 내 마법마저 한 수 먼저 파악해 움직임을 생각하고, 내 마법이 놓치는 틈 사이사이로 대검을 쑤셔넣는다.
그리고, 저 검은 먼지덩어리는 조금씩이지만 떨어져나가기 시작했다.
재생하던 이전과는 다르게.
쿠우우웅ㅡ!
그리고 그렇게 몇분정도 지났을까.
마침내, 마지막 남은 검은색의 덩어리도 산산히 찢겨나가며 움직임은 멈췄다.
정말로, 아무런 재조차 남기지 않았다.
다만 그 자리에 남은 것은 검은색의 기이한 덩어리 뿐이었다.
쉴 새 없이 모습을 변화시키는 성게같은 덩어리.
'크로체 때와 똑같네.'
크로체도 죽고나서 남긴 게, 저것과 비슷한 끊임없이 요동치는 덩어리였으니.
"...한서우, 괜찮아?"
온몸이 생채기로 뒤덮인 한서우를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 덩어리의 옆에 서 숨을 고르고있던 한서우는 날 바라보며 말한다.
"난 문제없어. 당연히."
끝난건가.
분홍빛으로 물들기 시작한 하늘을 바라봤다.
"...아."
그러고보니, 마스.
황급히 뒤를 돌아 서둘러 파편에 휩쌓인 연구소의 부지를 바라봤다.
"마스ㅡ! 살아있냐ㅡ!"
지하를 향해 뚫린 구멍 너머로 소리치자 소리가 메아리치며 울렸다.
잠시간 메아리만이 감돌던 구멍의 내부에서 마스의 목소리가 들려온 건, 바로 직후였다.
"살아있으니까 걱정마라! 금방 나갈게!"
마스가 저 아래에서 뭔 짓을 한 건진 모르겠지만, 마스도 상당히 지친 목소리였다.
검기만 하던 구멍 내부에서 푸른 불길이 치솟아오르며 건물의 잔해들이 박살나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쿠궁거리며 점점 올라오는 굉음.
그 모습을 바라보던 나는 조금 뒤로 물러나선 무너지지 않은 곳의 위로 터덜터덜 걸어갔다.
"하아ㅡ"
그래도 폐허위에 퍼질러 누웠다.
지쳤어.
힘들다.
내가 상대할 땐 1시간 가까이 별 지랄을 떨어도 아무런 힘든 기색조차 보이지 않던 그 괴물이, 한서우가 합류하자 마자 고작 십 몇분만에 끝나버리다니.
내가 약한건가?
"몰라..."
"뭐가?"
혼이 빠진 표정으로 하늘을 바라보며 퍼질러 있으려니 시야 위로 한서우의 얼굴이 나타났다.
여느때와 다름없이 노란 눈이 빛나고 있는 모습이었다.
"...아니다."
"그나저나, 우리 할 얘기 엄청 많이 있지 않아?"
옆에서 다리뻗으며 앉는 한서우.
저 멀리서 트럭의 엔진음이 서서히 들려오기 시작했다.
한대...두대...아니, 어쩌면 조사단 인원중 가능한 한 인원은 전부 왔을 수도 있겠네.
잔잔하게 불어오는 선선한 저녁 바람을 느끼며 조용히 눈을 감았다.
"지금 들어가봐야 하지 않나?"
"...아직. 저녀석이 아직도 우릴 찾고 있는 것 같아."
이성주는 서서히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하는 저 공터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서있는 공터는 분명 방금전의 전투로부터 멀리 떨어져있었던 게 분명한데도, 이미 찢겨나간 듯 온통 나무들이 쓰러져있는 모양새였다.
'루시, 저 녀석...'
이미 루시는 우리의 시선을 눈치채고 있었던 모양이다.
전투마다 교묘히 저 파편의 공격을 우리가 시시각각 이동하는 방향으로 유도했기 때문이다.
우리의 정체까지 아는 진 모르겠으나, 누군가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것 하나만큼은 확실했다.
그 덕에 먼 곳에서 감시하는 입장인데도 공격 피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뭐, 루시의 감시야 이미 한참 전 히어로 협회의 조력자를 찾는 과정에서 이미 시작됐다.
일거수일투족까진 힘들지만, 그래도 뭔가 눈에띄는 변화점이 있다면 언제나 먼 곳으로 가 감시했지만...
'오늘처럼 직접적으로 우리의 시선을 눈치채고 방해하려한 적은 처음이다.'
어쩌면 전투로 인해 비정상적일정도로 상승한 감각이 우리의 시선을 눈치채게 한 것일 수도 있다.
뭐, 어찌됐든 루시가 자신을 감시하는 자의 존재를 알아낸 건 사실이니.
이전보다 더 주위를 살필 게 분명했고, 찰나라도 우리가 방심했다간 역으로 당할지도 모른다.
망했군.
"그나저나...저거, 가져올건가?"
대런이 이성주에게 중얼거렸다.
대런이 말하는 것은, 파편이 소멸하며 남긴 끝없이 요동치는 하나의 덩어리.
크로체의 그것과 같은 것이었다.
"물론, 가져가야지. 하지만 지금으로선 불가능해."
저곳에 있는 놈들만 해도 다들 마력과 경험이 단연 최상급이라 할 수 있는 놈들 뿐인데.
게다가 주변에서 사람들까지 모여들고 있다.
저 너머에서 헬기까지 날아오는 걸 보면, 아마 예술가의 결계가 한서우에 의해 부서진 뒤로 저들도 상황을 눈치챈 듯 하다.
그렇다면 지금으로선 저 요동치는 덩어리, 분신, 혹은 파편의 '자아'.
저것을 탈취하기 위해선 수송중, 혹은 완전히 다른 시설로 격리된 후가 적당할 것이다.
"어쩌면...이번의 사태로 엘로힘 관련 물품들은 실험은 고사하고, 되려 바로 파괴해버릴 수도 있다."
"그럼 그냥 우리만 좆된거고."
골치가 아파진 이성주는 자리에 푹 앉으며 표정을 찡그렸다.
그래.
이번 사태로 인해 인류는 엘로힘에 한해서라면 타협따위 없이 강경하게 나갈 수도 있다.
그저 파괴만 할 수도 있고.
자그마치 공식 기지 하나가 고작 하루아침만에 초토화된 사건이니, 과연 그것들을 보관해두다가 무슨 사태가 벌어질 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엄밀히 말해선 그 봉인된 엘로힘이 벌인 일이 아니었지만, 인간들은 보이는 증거들만으로 그렇게 판단할 것이 분명했다.
"예술가의 결계, 확실히 그것에...학자의 힘이 조금 섞여들어갔다."
예술가에 의해 벌어진 일이 아니라는 것은 시설 전체를 둘러싸고있던 결계를 통해 알 수 있었다.
예술가의 힘이 그저 내부와 외부, 소우주로 격리시키는 것에 불과하다면 방금 전의 결계는 학자의 소멸 관련 능력까지 덧붙여져 있었다.
쉽게 말하자면 애초에 사람들이 저 기지가 있었다는 것을 시작부터 잊고 말았다는 것이다.
"학자가 꾸민 일이야, 모두."
학자, 그 녀석은 과연 신격을 이렇게 뿌리고 다님으로서 무엇을 원하는 지 알 수 없다.
신격을 얻고 난 후에는 학자의 행동도 상당히 역변했다.
인공지능과 다름없던 이전의 상태와 달리, 마치 무언가를 갈구하는 것 마냥 끊임없이 '스스로' 생각하고 움직인다는 것.
마치...자아가 생긴듯한 모습이었다.
"뭐, 현재로선 알 방법은 없겠지."
조사단이 속속들이 저 앞의 공터로 모이며 사태를 파악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그 광경을 바라보며 둘은 조용히 등을 돌려 산의 아래를 향해 내려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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