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1화 〉 2부 40. 불쾌감
* * *
한 걸음, 한걸음.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겼다.
발을 옮길때마다 발끝으로 물결이 퍼져나가는게 꽤나 익숙한 광경이었다.
"...그 녀석이 만든 대체현실이랑 비슷하네."
내 인생에서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공간과 꽤나 닮은 모습이었다.
향수며 트라우마며 죄다 불러일으키는 모양새였지만, 딱히 새삼스러울 것도 없다.
사실상 의식의 심층부는 전부 이런 형태라 보면 되니까.
이전에 알테리지아에 의해 잠들었을 때도, 나의 이상적인 공간을 상상하지 못했다면 아마 전부 이런 형태로 나왔을 것이다.
수면 위로 비치는 무수한 별빛에 하늘을 올려다보니, 쏟아져내릴듯한 은하수가 저 하늘을 가득 메우고있는 모습이 보였다.
"이쁘긴 이쁘네."
조용하고 말이야.
걸었다.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이곳에서, 무언가의 온기가 느껴지는 곳을 향해 쉴 새 없이 걸었다.
솔직히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진 모르겠다.
알다시피 이곳에선 시간같은게 아무 의미 없으니...따져봤자 쓸모없긴 하겠지만.
"오..."
그리고, 얼마나 걸었을까.
무수한 밤하늘 아래의 수면을 걷던 내가 마침내 도착한 곳은, 은은히 빛나는 거대한 새하얀 보석이었다.
콩닥콩닥하며 작게 요동치는, 허공으로 50cm가량 부유하고 있는 거대한 보석.
내 심장이었다.
그렇다면 이곳은 내 몸 속인걸까?
'그럴리가.'
애초에 신의 육체같은 게 현실로서 존재할 리가 없잖아.
개념으로만 존재하는 환상속이다, 여기는.
무의식의 심층부일 것이다.
분명, 본래는 나만 존재해야 했던 곳.
하지만 이제는 그런 기척이 하나뿐만이 아니었다.
나를 제외하고도, 이 광막한 공간에 무언가 하나가 더 존재했다.
수면 위를 은은히 밝히던 새하얀 보석을 뒤로하고선, 알 수 없는 것의 근원지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본 것은 알 수 없는 것의 근원이었다.
"심장인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중얼거렸다.
만약 엘로힘같은 것에 심장이 있다고 하면, 필시 그런 것일거다.
성화연이 전하기로는, 그 수정액같은 엘로힘에 부여된 명칭은 '학자'라고 했었지.
대체 무슨 기준으로 이름을 정하는 건진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 학자의 근원이 저 앞에 있는 것이다.
스릉
물론 능력만 된다면 지금 당장 내 안에 들어와있는 저 부산물을 치워버리고싶다.
하지만 저것은 이미 내 신격을 모두 앗아간 상태.
사실상 이 공간의 주인은 눈앞에 있는 저 끓어오르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내가 방금 봤던 그 새하얀 보석이, 얘 입장에서 보면 부산물이지.
사실상 언제 내 심장이 갈가리 찢겨나가도 놀랍진 않은 상황이라는거다.
'이런 곳까지 신경쓸 자아가 없어서 다행이라고 해야하는건지...'
학습을 위해서라면 아마 신격의 사용도 마다하지 않겠지만, 그를 제외한 목적에서라면 얌전하다.
뭔가 위험하면서도, 안심되는 태도였다.
'기괴하네.'
그나저나, 저 끓어오르는 건 보면 볼수록 기분만 불쾌해진다.
심장마냥 두근두근 뛰는것도 아니고 그냥 끊임없이 확장했다가 기습적으로 수축한다.
일정하게 움직이는 패턴 없이 그냥 무작위적으로.
분명 고체일텐데 움직이는 건 끓어오르는 거품과도 같았다.
게다가 색도 이상하잖아.
검푸른 색이라니, 아무리 봐도...
'...아니, 색은 멋지긴 한데...'
막상 저런 비쥬얼이니까 끔찍한걸.
심지어 크기도 이전에 봤던 내 심장보다 몇배는 더 커서 무섭기까지 하다.
엘로힘이란 것들의 근원은 다 저렇게 기괴한 형태인건가?
'아니지, 내 중심에서 생각하면 안 되지...'
어쩌면, 정말로 어쩌면 전 우주적 관점으로 봤을 떈 저게 더 보편적인 형태일 수도 있다.
그래봤자 인간 기준으로 불쾌감 드는건 어쩔 수 없지만.
"끄응...!"
손을 깍지껴 위로 들어올리며 기지개를 켰다.
'언제 일어나려나...'
어차피 이것도 지금 꿈의 일환에 불과한데 말이야.
전부 환상이고.
생각하기가 무섭게 시야 가장자리가 일그러지며 눈앞에 보이는 밤하늘의 풍경이 아득해지기 시작했다.
'주인은 누군지...'
잠에서 깨기 직전에 생각했다.
처음 이 신격을 얻었던 나와, 이후에 신격을 모조리 빼앗아간 학자 둘 중 누가 이 공간의 주인인지.
'역시, 지금 가지고 있는 놈이 주인이려나.'
답은 잘 모르겠다.
창밖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으려니, 뒤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루시인가.'
너무 일찍 자서 벌써 잠이라도 깬걸까.
성화연은 밤새 피곤했으니 지금 일어날 것 같지는 않다.
루시는 차 안에서 자던거 그대로 호텔로 옮겨왔으니...지금 일어날 법도 하네.
"일어났냐."
역시나 짐작대로 뒤를 돌아보자 보이는 건, 눈을 비비적대며 침대 위에서 어기적거리며 일어나는 루시.
새벽 2시무렵이라 일어나기 적당한 타이밍은 아니다.
아직 자야할 시간인데.
확실히 해외 오니까 시차 적응 문제도 있네.
"끄응.."
루시는 잠시 휘청거리며 침대 아래로 내려와 내 곁으로 다가왔다.
"아직도 안자고 뭐 해?"
"그냥, 잠이 안와서 말이다."
루시가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날 올려다보지만, 난 그냥 피식 웃으면서 다시 창밖의 밤하늘을 바라볼 뿐이다.
잠시 뜸을 들이던 나는 곧 입을 열었다.
"루시."
"...?"
"저번에 나타난 그 지구 있잖아. 전부 네 신격때문에 벌어진 일이지?"
내 말을 듣고선 잠시간 골똘히 고민하던 듯한 루시는 다시금 옆에서 날 올려다보며 말했다.
"...아마, 맞지 않을까? 일단 내가 아는 사람한테 들어본 바로는 그런 것 같던데."
"정확히 말하면?"
"내가 기억하는 원래의 지구가 존재하던 우주가, 내 신격으로 인해 융합된다. 그거지."
"그럼, 그 지구는 원래는 네 기억속에서만 존재하는 곳이었다는거네?"
루시는 잠시 움직임이 일순 멈췄다가, 이내 말을 이해한 듯 고개를 갸웃거린다.
"...그런셈이지?"
"신격이 그 둘을 이어준거고."
끄덕끄덕.
아래서 작은 고개를 연신 끄덕거린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나는 다시금 창밖의 하늘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그럼, 그 신격이 학자라는 엘로힘에게 넘어간 이상, 그 녀석의 의식 속에 남아있는 무언가에 의해서 우리 우주가 완전히 변할 수 있지 않나?"
"...!"
충격을 받은 듯 입이 멍하니 벌어진다.
그러다가 내가 한 말의 의미를 온전히 받아들이고 나서는, 루시도 내가 올려다보는 밤하늘을 함께 올려다보기 시작했다.
"아."
나와 루시의 시선 끝에 있는 것은, 일그러진 듯 뭉개져있는 하늘.
쪼개져있는 밤하늘.
하늘이라는 천장의 타일이 조금 떨어져나와 있는듯한 모습이었다.
"이런."
루시가 작게 중얼거렸다.
일이 생각보다 꽤나 심각해졌다.
그러고보면, 내 신격때문에 두 우주간의 융합이 벌어졌다는 말에서 이미 눈치챘어야 했다.
그냥 무의식속에만 존재하는 기억조차 현실로 끌어들이는 정신나간 힘인데, 엘로힘같은 것에게 넘어가고 나서도 얌전히 있을거라 생각해서는 안됐던거다.
그렇다면 지금 뭔 행동을 취할 수가 있는건가?
'...아무것도 없네.'
힘도 없고 빽도 없고.
아, 물론 인맥은 있다.
이미 엘로힘을 한번 물리친 전적이 있는 전쟁영웅이 친군데.
물론 날 기억할거라 생각하진 않는다.
성화연이나 마스도 연락 안닿아서 아직도 내 소식 못 전해주고 있는 상황이니.
'돌겠네, 진짜.'
정말, 신격이라는 건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득보단 실이된다.
애초에 이 우주에 존재해서는 안될 힘이니 당연한 것이다.
본래 보다 상위차원의 존재의 것인데, 그걸 억지로 3차원의 형태로 우겨넣어서 내 몸속에 담아서 온거잖아.
탐구자 그 새끼는 후폭풍을 예상이나 하고 그런 짓을 한건지 모르겠다.
뭐, 결국 그날 밤은 그런 심란한 사실을 알게된 채로 다시 잠에 들었다.
목적은 최대한 빨리 어떻게 해서든 신격이라는 것을 이 우주에서 몰아내는 것.
기왕이면 아예 이 우주 전체를 상위차원에서 고립시키면 더 좋다.
그러면 일이 훨씬 더 쉬워지니.
'가능하려나...?'
물론 이쪽은 스케일이 너무 커.
우주 전체를 상위차원에서 고립시킨다는 게 말이나 되나?
지구조차 못벗어나서 아등바등 하는게 현재의 인류인데, 벌써부터 우주의 고립 차원의 고립 이딴거 논해봤자 아무 쓸모 없다.
어지러운 머리를 정돈하고선 고개를 휙휙 휘둘렀다.
부웅...
정돈되지 않은 아스팔트 도로위를 달리는거라 그런지, 계속해서 차가 통통 튀어오른다.
솔직히 멀미날 것 같은데.
지금은 수속절차니 뭐니 5시간 가량의 고문을 마친 뒤 드디어 남겨진 자유시간이었다.
어째 아침 일찍 일어나서 부랴부랴 간 것 같은데, 끝나고보니 점심시간이다.
분쟁지역이라 유독 절차가 복잡한 것도 한 몫 했다.
여하튼, 밥먹고 배도 든든하게 채웠으니 불평할 이유는 없지만.
빡
"게윽."
"루시, 창문에서 얼굴 때."
창문에 얼굴을 착 대고있다가 자동차가 튀어오르는 바람에 턱을 찧어버렸다.
붉어진 턱을 붙잡고는 투덜대며 창밖을 바라본다.
아무리봐도 그냥 평범한 도시의 모습인데, 이런 곳이 지구 최대의 화약고라니.
역시 정치같은 건 잘 모르겠다. 어쩌면 깊이 생각하기 싫은 걸수도 있겠고.
그래도, 군인들이 돌아다니면서 거리를 지키고 있는게 조금 무섭긴 해도 사람들이 살아가는 도시였다.
자세한 사정까지 알고싶을 정도로 정가는 도시는 아니었지만 말이야.
.
.
.
몇시간이 흘렀을까.
마침내 덜컹거리던 차는 안정화되고, 어느새 저 앞에 목적지가 보이기 시작한다.
"와우..."
솔직히 말해서, 오는 내내 이곳에 대한 평가는 점점 더 나락으로 치달았다.
내가 처음봤던 그 도시에서 한시간 가량만 차타고 벗어나면 죄다 오지에 폐허 뿐이고, 사람들이 많긴 많은데 그게 죄다 반군이며 군인이며 무장만 한 이들 뿐이라 사람사는 맛이 안난다.
폐허엔 수두룩하게 천막이 쳐져있고, 뭐 어디 하나 통과하려고 하면 절차가 또 미친듯이 복잡했다.
처음 몇번은 그래 그럴수도 있지라며 넘어갈 수 있었지만, 마냥 이쯤 되니 그냥 넘어갈 수가 없는거다.
그냥, 갈수록 짜증만 증폭된다.
그리고, 그런 고된 여정을 마치고 도착한 곳이 저 앞.
"저게 대체 어딜봐서 도시냐."
"...옛날엔 그랬지."
이 시점에서, 그냥 나락으로 치달았다.
더 이상 볼 필요는 없다는 평가로.
'멸망한 도시라 어쩔 수 없긴 하겠지만...'
대륙 전체가 이모양 이꼴이어서야 제대로 돌아가겠나.
눈앞에 보이는 건물들은 죄다 헤지고 터진 채였다.
심지어 정원 곳곳에는 피가 한가득 말라붙어있는 채였고, 무덤마저 수두룩하다.
게다가 갓 파냈다 덮은 듯 잔디조차 자라있지를 않았다.
그리고, 가끔가다 차 밑으로 밟히는 검은색의 덩어리들.
불쾌감이 최대수치로 치달았다.
한서우는 대체 이런곳에서 뭘 하려 했던건지.
탁.
마침내, 도시 내부에 자리잡은 대규모 조사단의 전초기지에 정차한 차에서 내리며, 도시 전체를 휘어감은 불쾌한 공기를 한껏 들이켰다.
어쩌면 익숙한 공기일 수도 있겠네.
혈향으로 한가득 차있는 대기라니.
꽤나 신선한 감각이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