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9화 〉 2부 38. 끊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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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일어난 걸 발견한 성화연은 곧바로 방의 불을 켠 뒤 나를 침대 맞은편에 앉혔다.
심각한 표정으로 날 바라보는 성화연이 어째 웃겨서 자꾸 실실 나오는 웃음을 감출 수가 없었고.
성화연은 투덜거리면서도 내가 하는 이야기를 모두 경청해주는 모습이었다.
그리고수십분 후, 이야기를 마친 뒤 성화연의 표정은 급격히 밝아졌다.
"그럼 앞으로 아무 걱정없이 그냥 돌아다녀도 된다는거야?"
"물론이지."
그도 그럴게, 내게 이제 신격같은 위험한 힘이 없다는 걸 알아챈 이상 히어로 협회가 날 더이상 잡아둘 명분이 사라졌음은 물론이요, 주변 사람들까지 휘말리게 할 걱정 없이 마음대로 돌아다닐 수 있게 됨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물론 히어로 협회에서 내가 가지고있는 정보같은 것으로 붙잡아둘 수는 있다.
'어차피 자유행동권이 생긴 시점에서 아무 의미없는 구속이긴 하지만.'
그래도 감시의 강도가 줄어든다는 건 결코 나쁜소식이 아니었다.
"그럼 앞으로 엘로힘같은 거 더 꼬일 걱정도 안해도 되는거지?"
"...그건 모르겠네."
성화연은 아무래도 기대하는 바가 더 많은 듯 했지만.
"그래도, 뭐 어때? 우리 오늘 출국이잖아. 그런 심각한 걱정같은 건 안해도 된다구."
"하긴, 그렇네."
기왕이면 자료조사 핑계로 여행가기로 결정한 거, 좀 더 달달하게 뽑아먹고 오면 되지.
시간도 이제 마침 새벽이라, 지금 준비해도 늦진 않는다.
이번엔 어비스가 아니라 비행기로 느긋하게 여행하기로 했으니 준비시간이 조금 빠듯하긴 하겠지만, 이런것도 나름 로망이잖아.
찌뿌둥한 몸을 쫙 펴며 분주히 움직이기 시작하는 우리였다.
띵동~
마스도 출발 한 시간 전에 호텔로 알맞게 도착했다.
카메라며 가방이며 바리바리 싸들고 온게, 얘도 나름대로 기대한 것 같네.
"한서우 찾으러 온거거든, 나는?"
마스가 그 말을 듣고선 그렇게 투덜거렸다.
'흠...'
그나저나, 마스도 날 대하는게 어째 조금은 편해진 느낌이다.
어쩌면 얘도 오랜 시간을 같이 지내면서 무의식중에 떠올려낸 걸 수도 있고.
비록 기억까진 몰라도, 관계만큼은 몸에 벤 걸 수도 있었다.
모두 좋은 징조였다.
성화연과 마스는 티격태격하며 서로 이야기하고 있다.
그런 둘을 바라보자, 뭔가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아득한 먼 옛날의 기억이 몰아쳤다.
이것도 나름 향수라는거네.
피식 웃으며 짐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근데 너 한서우가 어딨는지 알긴 해?"
"...마지막 목격위치로 가면 어떻게든 보이지 않을까."
성화연의 지적에 급격하게 쭈그러드는 마스.
그 모습을 본 성화연은 깔깔 웃으며 폰을 열었다.
"뭐, 단서가 아예 없는건 아니니까 걱정 안해도 돼. 우리쪽에서 이미 파악해둔 게 하나 있거든."
"오, 정말??"
화색이 된 마스를 향해 무언가 알 수 없는 지표를 보여주는 성화연이 설명을 덧붙인다.
"지난 3개월간 허가되지 않은 어비스 이용 건이야. 공식적으로 등록된 어비스라, 위치도 당연히 전부 공유되고. 그리고 5건중 1건이, 한서우가 마지막으로 목격된 장소 근처야."
"그렇다는건..."
"그래, 한서우가 연락 후 수개월 째 입국을 안하고 있는 지금, 한서우가 이용했을 이동수단은 이 어비스가 유력하다는거지."
그럴싸한 가정이네.
둘의 이야기를 유심히 듣던 난 생각했다.
"위치는 남미로 확정된 거 맞지?"
내가 성화연에게 말하자 고개를 끄덕인다.
"남미가 현재는 꽤나 불안정한 곳이긴 하지만...그래도 몇몇 지역 빼고는 아마 다 괜찮을거야. 한서우한테 무슨 일이 생겼는진 몰라도, 우리가 빨리 가봐야하는 건 확실하고."
"...따로 호위라도 요청해야하는 건 아니냐?"
마스가 살짝 얼굴을 찌푸리며 그리 말했다.
사실 호위가 필요할 정도로 우리가 약한 것도 아닐텐데.
막상 성화연이랑 마스, 저 둘만 해도 전쟁영웅으로서 치켜세워진 지 오래고, 나도 비공식적이긴 해도 산 하나정도는 통째로 날려버릴 수 있을만한 마력을 지녔는데 말이지.
아마 어디가서 맞고다닐 조합은 아닐거다.
"걱정 붙들어매고, 그냥 따라와라."
"...쳇."
내 말에 투덜거리는 마스.
그렇게, 시간이 될 때까지 기다리던 우리가 공항으로 출발한 건, 창밖으로 떠오르는 해가 방 안을 붉게 물들일 무렵이었다.
콰ㅡ앙!
인적 드문 공터에 굉음이 울렸다.
그와 동시에 번쩍이는 새하얀 빛은 어둡기만 하던 뒷골목을 밝게 비춘다.
"하아...하아..."
한서우는 누더기인 대검을 추스르며 눈앞에 밟힌 '잔해'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제는 이런 곳에서조차 나오는건가.'
이곳은 남미의 분쟁지역.
사람이 다른곳보다는 적을 지언정, 그래도 민간인들도 어느정도 있다.
군인들이 대다수긴 하지만, 이곳도 사람사는 곳이란 말이다.
하지만, 이런 곳에서조차 균열이 열렸다.
최근 증가하는 균열의 추세를 보면 예정된 일이긴 했지만, 이런 도시에서조차 균열이 열릴지는 반신반의 했다는 말이다.
"..."
그 덕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도시 전체를 둘러싼 온갖 비명과 절규를 들어보면 짐작할 수 있다.
쿠웅ㅡ!
거대한 폭음을 내며 무너져내리는 높다란 마천루.
대로변마다 서있는 무수한 자동차들은 이미 불타 망가진 채 였다.
길거리를 뛰어다니는 무수한 사람들은 결코 제정신이라 볼 수 없었다.
입에서는 과연 인간이 내는 소리인가 싶을 정도로 괴이한 소리만을 내뱉고, 행동거지는 짐승이나 다를 바 없다.
가히 혼돈의 도시라 불러도 과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이 도시에 있던 수십만의 인간들이 모두 저런꼴이라니.
'...특출나게 정신력이 강한 이라면 모르겠지만.'
그런 사람은 수백만명중 한명이다.
균열이 벌어진 일대에서 제정신을 유지하고 있는 인간은 사실상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는 소리였다.
'여기가 분쟁지역쪽만 아니었다면, 이미 전 세계적으로 논의되고도 남을 일이었다.'
하지만 이를 어쩌나.
결국 이런 도시에서 균열이 발생했다 한들, 그냥 한번에 쓸어버리고 적국에 의한 폭격이라 보도하면 끝난다.
사실상 감옥이나 다름 없다는 말이다.
가끔가다 동영상 공유사이트에 미스터리 관련 정보로 올라올 뿐, 그 이상으로 깊이 파고들어가는 사람은 없다.
여행하기도 어려운 지역일 뿐더러, 통제중인 군대에 의해 접근성조차 최악이기 때문.
"끝났나?"
"...그래."
한숨을 쉬며 벽에 기대어 앉자, 골목으로 들어오는 거대한 인영이 보인다.
"...델리지아."
"왜 그러나."
델리지아는 한서우의 말에 답하며 손에 쥐어진 검은 것을 터뜨렸다.
살짝 눈을 찌푸리는 한서우였으나, 이것도 어쩔수 없는 일이라 합리화하며 넘어갈 뿐이었다.
"물어볼게 있어."
"상관없다."
한서우는 델리지아와 만나기 전, 그러니까 입국하기로 결정했다고 전화한지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에서 균열에 휘말렸다.
서아시아의 미개척지역에서.
사람이 존재하지 않던 오지였으니 망정이지, 자칫하다간 사건이 더 커질수도 있던 상황이었다.
그곳에 나타난것이 델리지아.
균열에서 터져나온 잔해들을 능숙하다는 듯 처리하고, 한서우에게 협조를 부탁했다.
일단 델리지아가 한서우에게 균열과 잔해에 대한 개념을 설명해주긴 했으나, 아직 궁금한 건 수두룩했지만 말이다.
한서우는 침을 꿀꺽 삼키며 입을 열었다.
"...너희는 언제부터 이런 걸 알고 있었던거야?"
"너희라니...나는 애초에 초창기 멤버가 아니다. 나도 그저 도중에 알게된 사실에 불과하지."
그런가.
그리 중얼거리며 한서우는 배낭에서 생수통 하나를 꺼내 들이킨다.
"해방자들이 결국은...이런 것을 처리하던 놈들이라고?"
"맞다."
"하지만 어째서 줄곧 혼자서 활동한거지? 이런 사실을 정부에 알리면..."
말하다 말고 멈춘 채 생각에 잠겼다.
정부에 알리면? 뭐?
정부에 알리면, 뭐가 달라진다는 말인가.
결국에 균열은 예측조차 불가능한 자연재해나 다름없고, 사실상 걸린쪽이 폭탄을 떠앉은 샘이나 다름없는건데.
자칫 잘못하다간 자국민 수십만이 한꺼번에 날아가버린다. 오늘처럼.
결국 그들이 해방자들에게 부탁할 수 있는건 아무것도 없단 말이다.
해방자들은 원체 혼자부터도 잘 해내왔고, 그들이 하는 일은 양지로 올려보내기 힘든 일이었기 때문이다.
'민간인 학살.'
극단적으로 보면, 그런거다.
그들이 미쳐버렸다고는 해도 결국엔 인간이었고, 사람들은 직접 겪어본 이들이 아닌 이상 도의적으로 그런 일들을 용납할 수가 없는 것이다.
게다가 균열은 지금껏 인간이 적은 곳에서만 발생했잖아.
최근에 상황이 더욱 이상하게 돌아가면서, 이런 특수한 상황이 만들어진 것 뿐이고.
결국 사람들이 진실에 대해 접할 일은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해방자들은 지금 다 어디가고 너 혼자만 남은거야?"
"모두 저 너머의 지구로 넘어갔다. 최근의 동향은 모르겠군. 나는 이 지구의 감시자로서 남아있는거라..."
얼마 전 나타났다 사라난, 다른 우주의 지구쪽 말인가.
그렇다면 지금으로선 만날 수 없다.
"...이 균열이 얼마 전부터 기하급수적으로 늘기 시작했다고?"
"연구자들이 두번째 엘로힘을 소환했을 시점부터."
두번째 엘로힘. 예술가.
결국 이 균열이 전 세계적으로 늘기 시작한 것이, 그 시점부터였단 말이구나.
"루시하고는 아무 연관 없는거지?"
"...그건 솔직히 잘 모르겠군."
고개를 숙이는 델리지아.
한서우는 마지막으로 대검을 정비한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뭐, 상관없어. 결국 저것들이 적이라는 건 확실하니까."
"..."
골목밖으로 나서며 한서우는 중얼거렸다.
"...나아가다보면, 언젠간 만나겠지."
모든 것의 이유, 모든 것의 근원을.
한서우는, 나는, 알고 싶었다.
도대체 어쩌다 세상이 이지경이 된 건지, 도대체 어쩌다 내가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것을 잊고 말았던 것인지.
무작정 나아가기만 해서는 소용없다는 걸 알고 있다.
하지만, 방법은 이것밖에 없잖아.
그리 생각하며 루시의 심장 대신, 손에 쥐여진 대검을 굳게 쥐며 자리를 박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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