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8화 〉 2부 37. 신격
* * *
초점조차 제대로 잡지 못한 채 떨고있는 저런 모습이 정상이 아니라는 건 알겠다.
대체 무슨 일을 겪었길래, 루시가 저렇게 공포에 떨고 있는거지?
어지간한 일이면 비명조차 안지르던 루시다.
막말로 종전 이후 돌아온 루시가 지르는 비명은 한번도 본 적이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루시."
말을 걸어봐도 아무 대답조차 없다.
그저 멍하니 앞만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얘 왜이래요?"
"나도 잘 모르겠다. 한순간에 이렇게 변한거라서... 아까까지만 해도 멀쩡했던 놈이 고작 몇 초 지나고서 이렇게 됐더군."
사서조차 원인을 제대로 알지 못한다.
결국 원인은 전혀 모른다는 뜻이다.
눈앞에서 손을 흔들어봐도 아무 반응도 안하고.
"으음..."
현재로서는 뭘 어떻게 할 방도가 전혀 없다.
일단은 루시부터 데려가야겠네.
'병원에서 해결이 될까, 이게?'
애초에 루시 주변에서는 초상능력이라고 치더라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수두룩하게 벌어지니까.
아마 병원에서 해결이 가능할 거라는 가정은 버려야 할 것이다.
"아, 그러고보니..."
그렇게 루시를 안고 도서관을 떠나려 할 때, 사서가 내뱉은 말에 뒤를 돌아봤다.
"뭐 기억나는 거라도 있어요?"
"그래. 그 한순간의 잠시뿐인 감각이라 정확하진 않을 테지만...그 근처에서 과도한 양의 신격이 감지됐다."
"...?"
저게 무슨 소리일까, 하고 물어보려는 찰나 사서는 계속해서 설명한다.
"루시는 이미 얼마전에 현실격리장치를 사용했다고 말했다. 그 뜻은, 그 근처에서 신격이 느껴질 이유가 전혀 없다는 말이지."
"그 말은..."
"지금껏 신격이 존재한 생물은 루시밖에 없었다. 그곳에서 느껴진 신격이, 내 착각이 아니라면..."
꼴깍, 하고 침이 넘어갔다.
"루시의 근원과 연결된 존재가, 또 하나 생겨났다고 보면 된다."
"...!"
내 소매를 잡은 채 멍하니 떨고있는 루시를 내려다봤다.
'루시가 이렇게 된 것도, 전부 그것때문에 벌어진 일인건가.'
언제 제정신으로 돌아올 진 알 수 없다.
어쩌면 평생 이대로 살아갈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런 상황은 애초에 가정조차 하지 않았다.
루시는 모두가 잊었던 그 순간에도 살아서 돌아오지 않았는가?
비록 원래의 '인간'이라고 보기는 힘들지만, 그래도 루시는 루시의 모습 그대로였다.
'..깨어나고 나면 물어보자.'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럼..."
다시금 사서에게 인사를 전하고선 전이마법진을 통해 이동했다.
그리고 그 찰나의 순간 일어난 밝은 빛을 난 눈치채지 못했다.
"와우."
"...?"
이유리가 전이마법으로 막 도서관에 도착하고 나서 본 것은, 저 앞에 서있는 사서였다.
사서는 놀라며 이유리가 나타난 카펫을 바라봤다.
"타이밍 한번 절묘하군."
"아까부터 자꾸 무슨말이에요."
"알 거 없다."
어떻게 사람이 저토록 밋밋한건지.
투덜거리는 이유리였지만, 그래도 명목상 상관이다보니 그렇게 크게 따져물을 수는 없었다.
한숨을 푹 쉬며 소파에 앉은 이유리는, 여전히 멍청하게 데스크에 서있는 사서를 보고선 물었다.
"미리 왔으면 남아있는 해방자들 찾아다니고 좀 그러지, 여기서 뭐해요?"
"그건 미안하군. 나도 워낙에 정신이 없어서 말이지..."
사서의 말에 헛웃음을 흘리며 사서를 훑어보는 이유리.
하지만 사서의 코트에 흠뻑 묻어있는 피를 보고선 거짓말이라는 생각은 접을 수밖에 없었다.
'정말로 뭔 일이 있었던건가?'
하지만 몸에는 큰 상처같은 건 보이지 않는다.
저렇게 많은 피가 묻어나올 이유가 없단 말이다.
'그러고보니...'
이유리가 이곳에 온 직후 이상함을 눈치채지 못한 것도 이상했다.
일단 시각적으로만 본다면, 흠뻑 묻어있는 그 피들은 이미 옷에 스며든지 꽤 된 듯, 눈으로만 대충 훑어봐서는 옷의 조금 진한부분으로 볼 정도였다.
눈으로만 훑어볼때는 눈치채지 못한 이유였다.
하지만 고작 그것가지고 눈치채지 못할 리가.
저정도 양의 피가 묻어있다면, 분명 그에 걸맞는 혈향도 함께 났을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그 피, 누구거에요?"
"뭐?"
"왜 피에서 피 냄새가 안나요?"
피냄새를 덮어버리는 강렬한 라벤더향기.
그것이 이유리가 혈액을 눈치채지 못한 이유였다.
"아, 이거 말인가."
사서는 이유리의 말을 듣고선 코트를 팍팍 펴며 말했다.
"...이걸 지금 말해도 되는진 모르겠군. 언젠간 말해야 하겠지만, 아직 풀기 적당한 정보는 아니라 말이다."
"..."
능글맞은 사내다. 정말로.
이유리는 얼굴을 찌푸리며 다시금 소파에 몸을 뻗고 누울 수밖엔 없었다.
ㅡ어.
가만있자.
내가 어쩌다 이런 꼴이 된거지.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본다.
마지막에 어땠더라.
분명 엘로힘이 내 눈앞에 나타났고, 그대로 나에게로 손을 뻗어왔다.
그게 손이었는진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것은 일단 나에게 대화를 시도해왔다.
어째서 근원이 분명히 느껴짐에도 불구하고, 난 그저 인간에 불과하느냐.
'그녀석이 찾고 있던 건, 결국 심장이었던거지.'
내가 이곳에 온 직후의 상태였을 시점에는 내 몸에 내장따위는 없었다.
배를 갈라봤자 보이는 거라곤 그냥 별하늘밖에 없었고.
이성주와 만났을 때, 뒤에서 기습한 이유리에 의해 뽑혀나온 심장도 내장이 아니라 그저 찬란하게 빛나는 새하얀 보석이었을 뿐이다.
아마 이녀석은 그걸 찾고있었던 모양이다.
뭐 어쨌든, 얘가 쑤셔본 결과 내 몸에는 그런것따위는 없이 그냥 고깃덩어리만이 존재했을 뿐이다.
그러니 이제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는거다.
얘는 나를 이미 신 비슷한걸로 확정한 채 왔는데, 정작 그 증거가 아무것도 없다니.
허나, 그 속에서 느껴지는 신격만큼은 진짜다.
그리 말했다.
의심조차 아니고, 확신에 담긴 어투로.
말을 마친 엘로힘은 내 '속'에 접근했다.
근원으로.
그 후에 일어난 일은 정확하진 않다.
그게 나에게서 빼앗아 간건지, 아니면 그냥 같이 연결됐을 뿐인건지.
'...이게 가능한건가?'
그럴리가.
만약 이게 이미 알려져있던 방법이라면 탐구자도 이 방식으로 접근했을거다.
날 꼭두각시로 만들기 위한 계획도 필요없고.
'얘가 특이한거야.'
결국 그 이후로 줄곧 이런 상태다.
시야는 보이는데 몸은 못움직이고, 제대로 말을 걸 수 조차 없다.
몸은 또 쉴새없이 바들바들 떨리고 말이야.
대체 뭔 짓을 하고 간건지 모르겠네.
이제는 넘쳐흐르던 그 자신감도 어디갔냐는 듯 죄다 사라져있고.
'좀 가만히 놔두면 어디 덧나냐.'
물론 나에게 신격이란게 있는 시점에서 조용한 생활은 나가리라는 거지만.
양날의 검이라는거다.
그 수정액놈이 신격을 빼앗아간거라면 차라리 좋을 지경이다.
굳이 그런거 없어도 난 충분히 강한데.
심지어 그 신격조차 인간으로서 남아있기 위해 대부분 덜어낸 시점이라, 사실상 무의식적으로 현실조작 쓰는거 빼면 사실상 의미없다고 봐도 될 지경이다.
'...의미 없는 거 맞겠지?'
공간을 그냥 통째로 갈라버리는 게 무난한 수준이라면 무난한 수준인거다.
뭐, 아무튼.
이제 몸도 어느정도 풀려오고 있다.
하긴 당연한거다. 그런 상태가 평생을 지속된다는건 말도 안되는거고.
그냥 일시적으로 내 근원에 누군가 접촉하며 일어난 후폭풍이라고 볼 수 있었다.
'후우...'
성화연은 아직도 걱정스럽다는 듯 바라보고있긴 하지만, 막상 그렇게 심각한 상태도 아니긴 하고.
오히려 어떻게 처리해야할 지 고민이었던 신격을 가져가준 시점에서, 그 엘로힘은 적대적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감사하다고 절을 해도 모자랄 판이었다.
'그 녀석이 이제부터 그걸로 뭘 할 거느냐가 관건이겠지만.'
애초에 자아도 없는 녀석이니, 그 정도는 괜찮으려나.
걔는 오로지 학습에 온 힘을 쏟아붓는 녀석이었으니.
차에 탄 채 앞만 바라보고 있다는 건 꽤나 지루한 일이었다.
조수석에 앉았다고는 하지만, 키가 작아서 풍경조차 제대로 안보이고.
'그냥 나중에 일어나고 나면...그 때 성화연한테 뭔 일이 있었는지 말해주자.'
짧은 시간안에 너무 많은 일이 벌어졌다.
꽤나 뜬금없이, 우연에 의존한 일도 많이.
그러니까 지금은 조금 자둬도 문제 없겠지.
그리 생각하며 정신을 탁, 하고 놨다.
.
.
.
"끄응..."
시간이 얼마나 흐른걸까.
정신을 차리고보니 시야가 온통 까맣다.
몸이 풀려서 눈꺼풀이라도 감긴걸까.
다행이네.
조심스럽게 손가락을 꼼지락꼼지락 움직여보니, 달달 떨리긴 해도 움직이기는 한다.
손가락에서 팔로, 팔에서 온몸으로.
힘을 그렇게 분산하자 조금 쑤셔도 확실하게 원하는대로 움직이는 몸이었다.
"끄으윽..."
통증에 신음을 흘리며 조심스럽게 침대에서 일어나자, 통유리 너머로 찬란한 대도시의 야경이 눈에 들어온다.
툭.
"...?"
뒤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고개를 돌려 아래를 바라보니 보이는 성화연의 팔.
아마도 날 껴안고 자고있었던 모양이다.
몸은 이미 다 씻겨진 후라, 그다지 찝찝하게 느껴질 상황도 없는 상태.
살며시 침대에서 내려와 창문으로 다가갔다.
기지개를 쭉, 하며 펴자 수시간동안 굳어있던 몸이 비명을 지르는게 생생하게 느껴졌다.
"아구구..."
결국 기지개를 키자마자 바로 몸을 수그려 관절을 탁탁 두드려 줬다.
"루시?"
뭐, 이젠 성화연도 일어난 것 같네.
야경을 등지며 성화연을 바라봤다.
할 얘기가 많을 것 같은데, 아마 잘 이해할 수는 있겠지.
내게 신격이 사라졌다는 말을 듣고선 무슨 반응을 할 진 모르겠다.
그래도 성화연이라면 내가 살아서 다행이라느니 그런 말만 하지 않을까.
날 멍하니 바라보는 성화연을 향해 조용히 미소지어줬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