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7화 〉 2부 36. 인플레이션
* * *
"허?"
"잘못 들은거 아니다."
"???"
어, 그러니까.
방금 말대로라면...
"...여기가 대관령이라굽쇼?"
"그래."
왜, 거기 있잖아.
양떼목장 있는 곳.
내가 이전에 살던 지구에서는 거기에 양떼목장 있었어.
아무튼...
"그렇게 이동해놓고서는 아직 한국조차 못벗어난거냐?"
"애초에 도서관을 통해서 이동하질 않았으니까. 당연한거지."
뭐, 외국에 있을거라는 내 가정은 보기좋게 빗나갔다.
아직도 한국안에 있다는 기묘한 사실만 알게 됐을 뿐이지.
"아니, 그럼 성화연이랑 마스도 찾아가기 그리 어렵진 않을텐데..."
흠, 뭔가 기분이 묘하네.
아직 재생중인 복부쪽을 만지작대며 다시금 풀밭에 풀썩 누웠다.
한국에 이런곳이 있을 줄이야.
정작 여기선 양떼목장이 안보이니 잘 모르겠지만, 그래도 경치 하나만큼은 끝내준다.
정확히 말하자면 여긴 마수한테 한번 쓸렸다가 다시금 재생된 곳이니 양떼목장은 없겠지만, 아무튼 그런거라면 그런거야.
멍하니 겨울하늘을 바라보고 있자니 지금 상황이 대체 무슨 상황인지 서서히 자각되기 시작했다.
"...아, 또 성화연한테 혼나려나."
"뉴스에 이미 다 떴다. 근처 CCTV도 확보된 지 오래고. 비록 엘로힘이 나타난 직후의 영상은 정보소실때문에 나타나진 않았지만, 네가 거기 있었다는 것 만으로 이미 사람 풀어서 쥐잡듯 찾고 있을거야."
"아아앆!"
풀밭에 누운채 마구 팔다리를 휘저었다.
날 걱정해주는 사람이 있다는게 나쁜 일만은 아니지만, 이런 상황에서 남한테 피해를 줬다는 사실 자체가 나쁜일이라는거다.
정작 나 혼자였으면 남이 나때문에 고통받을 일 따위는 신경쓰지 않고 막 행동할 수 있었을텐데.
'내가 바랐던 삶이 이런거니까, 나쁠 것도 없지.'
어차피 그냥 행복한 불평일 뿐이네.
휴대전화는 이미 망가진 지 오래라 아마 성화연에게 연락하려면 사서의 폰을 빌려야 할거다.
근데 그자리에 있던 애들중에 전자기기가 제정상인 놈들이 있을리가.
사서의 폰도 제정상일 리는 없었다.
"일단 사람 있는데로 좀 내려가서...공중전화로 연락이라도 좀 해보자. 성화연 난리칠라."
"그 꼴로 내려가려고 하는건가?"
사서가 나를 보며 하는 말.
뭐가 문제인가 싶어 몸을 내려다봤지만, 딱히 크게 문제될만한 건 없어보인다.
"인간의 시점으로 생각좀 해보라고! 인간은 그냥 고깃덩어리가 아니란 말이다."
"아 왜, 또!"
"적어도 그 다 찢어진 옷은 어떻게든 가리고 가야지. 치한으로 오인받을 일 있나?"
아, 옷 문제였나.
사람들은 옷 보기 이전에 피 먼저 보고 까무러칠 줄 알았건만.
"넌 어떻게 생각하는 게 다 그런쪽이냐."
"...?"
"너도 일반인이랑은 사고방식이 한참 떨어져있는 것 같다."
사서에게 핀잔을 줘도 못알아먹는 모양새였다.
어쨌든, 지금 옷은 다 찢기고 헤져서 사실상 옷의 기능을 수행하지 못한다고 봐도 무방했다.
그냥 중요부위만 대충대충 가리고있는 수준이긴 했으니.
근데 피까지 덕지덕지 묻은 이런 모습에서야 치한은 커녕 되려 도움받아야할 아이로 인식될 가능성만 농후하다.
사실상 사서가 걱정할만한 일은 벌어지지 않을거란 말씀.
근데 막상 옷의 꼬라지를 인식하고 나니, 고원의 세찬 바람이 급격하게 춥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야, 야."
사서의 옆구리를 쿡쿡 찌르며 말한다.
"나 그 코트좀 줘라."
"도대체 어디까지 바라는거냐."
"아, 문제될 거 없잖아. 그냥 옷 없는 불쌍한 어린아이에게 기증하는 셈 치자구."
"...뻔뻔함도 어째..."
말은 그렇게 해도 투덜대며 코트를 건네주는 사서였다.
비록 키가 안되서 바닥에 질질 끌리지만, 흰 살 그대로 다 내보이고 다니는 것보단 낫지.
"가자, 가자! 자, 업어!"
"..."
사서는 기가찬건지 아무말도 안했다.
그냥 벙찐 얼굴로 날 바라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
처음 몇초간은 그리 생각했다.
하지만, 이내 생각이 바뀌었다.
"...이 미친새끼..."
세상이 다시금 회색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아무짓도 안했는데도.
그러고보니, 그 수정액 비슷한놈의 성질은 학습이었던가.
뭐든 닥치는대로 집어삼키고 자신의 일부로 흡수하는 놈.
"정신나갔네, 진짜."
얘는 그 아공간마저도 파악한 것 같았다.
그것도, 우리가 있던 그 아공간을 찢고 들어오던 그 한순간에 말이다.
대체 몇 번 봤다고 그 기술마저도 자유자재로 사용하는건지.
물론 자유자재인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그냥 말이 그렇다는거다.
자기 멋대로 아공간을 생성할 수 있는 시점에서 그건 이미 학습의 영역을 아득히 벗어나지 않았는가?
어차피 본질이 엘로힘 비스무리한 것이기에 그다지 놀라울 것도 없었다.
그냥 힘만 쫙 빠졌을 뿐이지.
이딴놈을 대체 뭐 어떤식으로 대응한단 말인가?
고오오...
공간이 찢어지진 않았다.
당연한거다.
이번엔 저놈이 바깥에서 침입한 게 아니라, 나와 함께 이곳에 가둔것이다.
'...흠.'
그러고보면, 대체현실 쓰는놈이 쟤 혼자만 있는것도 아니었구나.
대재앙 사태를 일으킨 그 엘로힘도 나와 싸울때 대체현실을 이용했다.
걔도 자유자재로 쓸 수 있었다는거다.
게다가 걔는 우주 전체를 상대로 대체현실을 만들어낸거지.
다시금 기억해본다면 눈앞의 저 빛무리보다 그 탐구자가 훨씬 넘사벽이라는 걸 알 수 있다.
하지만 걔는 원체 본질부터가 탐구자라 그런거고, 쟤는 그냥 인공지능 비슷한놈이잖아.
목적도 자아도 뭣도 없이 그냥 무차별적으로 학습만 하는 놈.
탐구자 걔는 본래부터의 목적이 상위차원의 간섭, 신의 포섭이라 그쪽방면에서 능통했던 것 뿐이다.
쟤는 어쩌다 우연히 이쪽 정보에 얻어걸려서 저렇게 공간관련 능력을 쓸 수 있게 된거고.
"에라, 모르겠다."
어차피 난 지금 껍데기뿐인걸?
아무리 쑤셔대봤자 정보 한톨조차 안나올거야.
...아마도.
저녀석은 내가 예상하기에 정보가 없으면 그냥 버려두고 떠날 가능성이 높다.
그냥, 그런 가능성을 노려보는 게 훨씬 맘편했다.
사아아...
소름끼치는 바람이 주변을 쓸었다.
그 바람에도 풀 한올조차 미동하지 않는게 살짝 무섭다.
그러다 저 지평선 너머를 바라봤을 땐 그만 놀라 까무러칠 뻔했다.
엘로힘 그쪽 부류 애들이 인간시점에서 보면 초월적인 존재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막상 노을마저 가려버린 채 세상을 뒤덮는 모습이 익숙해진다는 건 아니었다.
'...괜찮으려나?'
몰라, 쓸데없는 걱정이야.
신격도 없으니 대응도 못해, 아마 저거 상대하려면 한서우는 데려와야 할거다.
세삼 한서우 그녀석이 얼마나 대단한 놈인지 체감된다.
입만 삐죽 내밀며 자리에 폭 앉을 수밖에 없었다.
***
띡, 띡.
아마 세계에 존재하는 벙커중 가장 깊숙한 벙커였을 것이다.
지금은 SOP휘하의 주 연구시설일 뿐이었지만.
그런 깊은 수렁속에 몇개의 신호음이 오가고, 신호를 받은 기계들은 일제히 움직였다.
수백명의 연구진들은 분주히 주변을 움직이며 관찰객체의 변화를 기록하고있었다.
"...저게."
그들의 눈앞에 놓인 것은, 이론상으로만 접해왔던 '봉인'된 엘로힘.
무수한 코드들의 나열일 뿐인 검은 구체였다.
한때 엘로힘이었다는 증거는 그저 봉인의 현장이 기록된 영상뿐.
그럼에도 이곳에 모여있는 대다수의 고위직 인물들은 저것이 엘로힘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문헌에 기록되어있는 형태와 일치하다.'
선구자라는 이들이 남기고갔던 기록의 형태와 전부 일치했으니.
비록 현재로선 기관의 전신일 뿐인 단체라 하더라도, 그 정보의 신뢰성만큼은 이루 말할 수 없다.
그렇기에, 저 작은 구체가 지니는 가치도 기하급수적으로 치솟은 상태고.
'마침내, 가장 이상적인 샘플이 손에 들어왔다.'
나아가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은 어디가지 않는다.
언제나처럼 마음속에 똬리를 틀고, 지금처럼 그 적절한 순간에 분출될 뿐인 것이다.
연구소장 가엘은 그리 중얼거렸다.
'인간이란 한계가 없다.'
앞에 누가서든 그것을 짓밟고 끝까지 올라서고야 마는 종족이다.
그것은 가엘의 신념이었고, 그렇기에 그는 인간을 개개인이 아닌 종족단위로 봤다.
뭐, 이런 직책에 있어서는 그만큼 적합한 신념이 어딨을까 싶지만.
"준비해라. 곧바로 들어가지."
자칭 신이라는 것들도, 인간의 뇌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것들도.
어차피 전부 하나의 생명일 뿐이고, 생명인 이상 죽음은 반드시 있기 마련이다.
종전때의 탐구자라는 엘로힘의 말로를 보면 충분히 알 수 있다.
'그들도 결국 본질은 생명체다.'
하지만 태생적 한계라는 차이점때문에 인간은 그것들을 보는것만으로도 미쳐버리지.
억울하기 그지없는 현실이었다.
그렇기에, 현실을 뒤튼다.
그것이 가엘이 선택한 것이었다.
기잉ㅡ
격리실의 문을 열고 들어가자, 눈부시도록 환한 방 중앙에 미동도 없이 떠있는 검은 구체가 보인다.
'오늘부터 인간으로 다시 태어나는거다.'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것으로.
꼭두각시는 언제나 유용한 수단이었다.
"루시 얘는 또 뭐가 문제인거야...!"
끊겨버린 전화를 거칠게 침대위로 내려두며 말했다.
자유행동권이 주어진 지 겨우 하루만에, 이런 사태에 휘말리다니.
물론 의도한 일이 아니었다곤 해도 결국 그 일 때문에 감시영역 밖으로 떨어진 건 사실이었다.
자칫하다간 도로 회수될 지도 모르는 상황.
물론 루시는 그런것따위에 얽매일 바에 그냥 범죄자라도 되자는 심정이겠지만, 그랬다가는 루시가 원했던 일상과는 너무나도 멀어져버린다.
지금껏 얼마나 원해왔는지 뻔히 알고있었기에 아무말도 안하고 있었는데, 하필 라비 만나러 나갔다 온다는 오늘...!
"내일이면 출국인데..."
뭔가 일이 굉장히 꼬인 느낌이다.
전화 너머로 들려온 바로는 그 정체불명의 빛무리가 나타났던 그곳조차 결코 그냥 무시하고 넘어갈 수 있는 상황은 아니라고 한다.
사망자는 없지만, 정신이상자들이 수두룩하게 생겨났다고 했다.
오죽하면 일반병원으로 옮겨졌다가 곧바로 정신병원으로 수용되는 인물들도 생길 정도.
'...확실해, 그곳에 나타났던 건 엘로힘 개체야.'
정신오염에, 비정상적일정도로 요동치던 마력.
그리고 세계에서 산발적으로 발생했던 자그마한 마력파까지.
'아직 조금 더 조사해봐야 알겠지만...'
돌아가는 상황을 봐서는 이미 기정 사실이었다.
심지어 국제 천문협회는 한국시간 기준 다음날 새벽무렵에 중대발표를 한다고 한 모양이고.
뭔가 뒤틀린 건 확실했다.
'가만히 있어선 아무 소용 없어...'
아무리 증거가 없다고 한들, 노가다식으로라도 찾아다녀야 한다.
그렇게 나갈 채비를 서둘러 마치고 문을 열려던 순간이었다.
♩♬
갑작스레 울리는 전화벨.
조심스럽게 폰을 열어 수신번호를 확인해보니 일반적인 전화번호도 아니다.
'...공중전화?'
혹시나, 하는 기대를 가지며 전화를 받았다.
"여...여보세요?"
"성화연인가?"
"아."
전화 너머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성인 남성의 목소리.
안타깝게도 루시는 아니었다.
그나저나, 이 목소리 어디에서 많이 들어본 목소리같은데...
"당신 설마..."
"그래, 사서다."
"갑자기 왜 뜬금없이 전화를 건 거에요?"
혹시 뉴스에서 나온 도심의 폭발사건을 들은 탓일까 싶었지만 사서의 입에서 나온 대답은 그보다 더 놀라운 사실이었다.
"그곳에서 루시와 함께 벗어난게 나니까 그렇지."
"뭐라구요??"
사서가 설마 그 자리에 있었을줄이야.
상상도 못한 수확이었다.
아마 이대로라면 찾기도 훨씬 수월해지겠지.
"혹시 루시 옆에 있어요?"
"그래...그게, 있기는 한데..."
"...?"
사서의 목소리가 이상하다.
어딘가 기어가는 목소리를 내는게 마치 뭔가 잘못한 사람같다.
"무슨 일인데요?"
"직접 만나서 얘기하도록 하지."
우물쭈물하던 사서는 도서관에서 만나자 얘기를 마친 채, 그대로 전화를 끊었다.
'대체 뭔 일인거야...'
의문을 가지던 내가 사건의 진상을 알게된 건 그날 저녁 사서의 도서관.
"...루시?"
날 반겨준 건, 코트를 감싸안은 채 멍하니 소파에서 바들바들 떨고있던 루시였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