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7화 〉 2부 26. 100%
* * *
"야, 야. 일어나."
퍽퍽, 침대 위에서 아직도 퍼질러 자고있는 마스를 발로 툭툭 쳐본다.
"커어어ㅡ"
당연히 일어나지도 않는다.
숙취가 생각보다 견디기 힘들다는 건 어릴적부터 봐와서 이미 알고 있었지만, 막상 눈앞에서 다시보니 이게 얼마나 엿같은지 새삼 깨닫게 됐다.
그래도 얘는 깬 채로 행패부리지는 않으니 괜찮은건가.
필름 끊기고서 하는 짓이 그냥 친구집 가서 자는거라면 그리 나쁘진 않을지도 모르겠네.
"아니, 근데 왜 하필 여기냐고!"
다시 한번 힘을 줘서 등을 빡, 하고 치지만 내 발만 아팠다.
술먹었으면 곱게곱게 지 집이나 가서 쳐 잘것이지 아침까지 이러고 있어?
성화연은 아직까지도 안왔다.
자고 일어나면 와서 마스 후드려 패고 있을 줄 알았는데, 그 밤사이에도 오질 않은거다.
전화해보니 이제 막 자다 깬 목소리였던게, 아마 사무실에서 자다 일어난 듯 했다.
마스가 여깄다는 말 듣자 마자 쿠당탕 소리 나더니 바로 오겠다며 말하긴 했는데, 금방 올지는 모르겠네.
"후우..."
에라, 모르겠다.
괜한 일에 힘빼면 안된다. 얘는 일단 신경 끄자.
지금은 이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으니까.
팔락
침대에서 내려와, 한쪽 벽에 걸려있던 달력을 휘적거리며 날짜를 살펴봤다.
"오늘이...며칠이더라."
11월 21일.
그 뱀대가리 만났던 날로부터딱 일주일정도 지난 시점이다.
"지속시간은 일주일정도인가..."
그래.
지난번에 쓴 그 장치ㅡ상위차원과의 격리ㅡ의 효과가 유지되는 시간은 대략 일주일 가량인 듯 했다.
어떻게 아냐고?
파스슷...
잡고 있던 달력이 순식간에 일렁이며 사라져간다.
황급히 손을 떼자 그제서야 다시금 원래대로 돌아오는 모습.
"이젠 제어조차 안되는거냐..."
고작 일주일 정도 안썼다고 이렇게 되버리네.
아니, 그 뱀대가리 말을 빌리자면 완전히 분리됐다고 했었나?
그러니까 지금 과정을 이해하기 쉽게 설명하면, 그냥 다시금 융합하는 과정이라 하면 되겠네.
당연하게도 안정적인 상황은 아니다.
비유하자면, 이중인격자가 카운슬링을 받고 인격융합이 이루어지는 과정이라 보면 된다.
다큐에서 본 내용이라 알고있다.
아무튼...그래서 이렇게 비정상적인 상황도 계속 발생하는 걸테고.
서랍장을 열고선 이전에 쌔벼왔던 그 장치를 꺼냈다.
'한 두번 정도는 괜찮겠지.'
뭔가 이상이 생기면 싫어도 알게 될테고.
일단 버튼을 누르는 건 조금 나중으로 미루기로 했다.
굉장히 편의주의적으로 생각하는게 아닌가 싶지만, 나도 가끔씩은 현실조작같은 개사기 능력이 필요할 때가 있다.
게다가 지금 생각하는 일은, 이 능력이 없으면 애초에 성립 자체가 불가능하다.
"...아으..."
어지러워.
융합과정이란게 마치 감기걸린 것 마냥 온몸을 뜨겁게 데운다.
기립성 저혈압같다.
침대에 푹 하고 잠기듯 쓰러지니 마스의 딱딱한 다리뼈가 느껴진다.
"...졸려..."
몸이 뜨겁다. 이걸 피곤해서 그런거라고 헷갈리고 말았다.
제대로 눕기는 귀찮은데...
베고있는 마스의 다리가 이따금씩 움찔거린다.
"커어어..."
마스가 옆에서 자는 소리가 들려온다.
창밖에서 자그맣게 들려오는 자동차들의 배기음은 마치 백색소음과도 같아서 안자고서는 도저히 못배기게 만들었다.
...이쯤되면 진짜 모르겠네.
"...Zzz..."
결국 나른한 오전의 소음에 정신을 못차리고선 그만 그대로 잠이 들어버리고 말았다.
*
"마스 이...친 새끼....일어나!"
"...아아아악!"
"니가 왜...있어? 미쳤어?! 너 언제...거야?!"
"...야! 야!...잠...아아악!"
자다가 문득 들려오는 소음에 흐릿한 눈을 조금 떠보고선 옆을 바라보니, 전등이 켜져있다.
비몽사몽하다.
반쯤 뜬 눈으로 바라본 저 옆에선...
"아아아악!!"
"술 쳐먹었으면 곱게곱게 집좀 가라고! 아니, 또 밖에서 노숙하진 않아서 다행이긴 한데..."
"아파, 아파! 머리채좀 놔라, 일단!"
"뭐하러 여기 들어온거야 미친새끼야!!"
성화연이 마스를 후드려 패고있다.
...명복을.
그로부터 사태가 진정된 건 성화연이 일어난 내 모습을 보고 난 후였다.
.
.
.
"...그래서, 너도 여기 온 이유를 기억 못한다구요?"
"네..."
"내가 술 끊으라고 몇번을 말했냐 마스..."
...뭐, 어찌저찌 진정되긴 했다.
예상대로 마스는 지난밤의 일을 기억하지 못했다.
반쯤 무의식적으로 이끌리듯 찾아온거라 했으니 당연한 일이긴 하다.
애초에 그때가 새벽이었으니...마스 말대로라면 거진 4시간을 줄창 술이나 쳐먹어댔다는 말이 된다.
명색이 전(?)히어로협회 소속 장교인데 저래도 되나 모르겠네.
"마스 얘가 불편하게 한 건 없었어?"
"없을리가 있겠냐."
"아니, 그...미안하다, 야..."
문득 마스를 갈구다가 떠오른 생각에 성화연에게 물었다.
"그나저나 성화연 넌 왜 사무실에서 자고 온거야? 뭐 바쁜일 있었어?"
"많고 말고. 당장 지금 진행중인 계획만 몇갠데."
"유출할 수 있는거 몇개 있냐?"
"넌 좀 미친놈아!!"
어째 얘가 나이를 먹었는데 더 어려진 느낌이네.
정신적으로.
이 점에 대해선 나도 딱히 할 말은 없긴 했다.
"아, 맞다. 오늘 새로 소식 들어온 거 있는데."
"?"
"저번에 쏘아올렸던 그 탐사위성 말이지, 오늘 새벽에 예정 궤도에 진입했대."
"아, 맞다."
하늘에 있던 그 지구.
그때는 그냥 중간차원에 껴있었다고 했었나. 그래서 전체적인 모양조차 안드러나고 그냥 검은 베일처럼 보인 곳이다.
지금이야 그게 내 고향지구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애초에 신격이 사라져서 무의식조차 영향을 끼칠 수 없는 현재의 상황이면, 그 지구도 사라지고선 없을텐데.
"수백억이 날아갔어."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
***
"여~뱀대가리."
"...뭐냐."
"아니~ 그냥 궁금해서~"
두꺼운 유리벽 너머에 앉아있는 자그마한 소녀가 능청스럽게 말한다.
왜 이런 곳까지 찾아왔냐고 묻고싶었지만, 본인이 알아서 밝히겠지.
"근데 넌 왜 알아서 안나오는거냐. 마음만 먹으면 마음대로 빠져나올 수 있을텐데."
"이 꼬맹이가 진짜..."
마음만 먹으면 빠져나갈 수 있긴...했다.
과거에는.
근데 지금은 그 일을 시행해줄 해방자마저 연락이 죄다 끊겨버린 지 오래다.
연구자들에게도 연락해봤지만, 걔들은 대체 뭔 짓을 하는건지 요즘엔 아예 코빼기도 보이질 않는다.
상황 자체로만 두고보자면 최악이다.
독방에 수감된 채로 간간히 들려오는 정보만 들어봐도 심상치 않은 일이다.
당장 가장 많이 오르내리는 주제인 '제 1차 공허 탐색대'...
이름은 굉장히 허세스럽기 그지 없었으나, 그 탐색대의 목적 자체가 위험하다.
저 너머의 우주로 넘어가 가능한 한 많은 자료를 수집해, 생존해서 돌아온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그딴 짓을 했다간 해방자와 100% 충돌한다.
그 우주에서 유일하게 살아있는 생명체는, 얼마 전 저 너머로 넘어간 해방자들 뿐 일것이다.
"듣자하니까 아예 그냥 묵비권만 행사하고 있다던데, 언제까지 고집부릴거냐..."
눈앞의 꼬맹이는 애늙은이마냥 중얼거린다.
아니, 애늙은이가 맞긴 하지만 말이다.
"거래 하나 하자. 어때? 서로 한대씩 교환한걸로 치자고."
"...한대?"
"...너 벌써 잊어버린거냐?"
뭘? 하며 물을 뻔했지만 반사적으로 온몸의 척수신경이 재빠르게 반응하며 뇌를 미친듯이 굴렸다.
자칫하다간 이 기회마저도 물건너가게 할 뻔한 일이었다.
"그, 그럴리가. 당연히 기억하지. 그땐 미안했다. 곁에 붙어있는 놈들이 워낙에 많아서 최대한 빨리 따돌려야 했으니..."
"말로만 나오면 안되는거지. 행동을 보여줘, 행동을."
한 손으로 턱을 궤며 소악마처럼 말하는 모습.
분하지만, 현재로선 이 방법밖에 없다.
"일단은 요구사항부터 들어보고 결정하겠다."
"도서관에 들여보내줘."
"..."
머리를 굴려본다.
이 소녀가 진짜로 원하는 게 뭔지.
사실 루시 혼자만 도서관에 들여보내주는 건 아무 문제 없다.
처음부터 루시랑 접촉할때만 해도 그게 목적이기도 했고, 나중에 루시가 가지고 있는 현실격리장치의 효과가 다 하면 결국 도서관으로 와야 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본능적으로 이 능글맞은 소녀가 원하는 건 그것뿐만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딱, 너 혼자만이라면 아무 문제 없다."
"그런거라면 내가 이렇게 왔겠어? 난 보상을 받으러 온거라구. 보상을."
"보상이라니..."
루시가 손가락 두개를 들어올리며 말한다.
"갑작스럽게 납치당한 충격으로 인한 정신적 피해보상, 아무 말도 없이 뒷목 후려쳐서 기절시킨 죄목으로 인한 신체적 피해보상. 여기에 기타 여러여러 피해보상까지 해서, 다 되돌려받아야겠어."
"거절한다."
"미친놈 진짜. 넌 어떻게 된 애가 융통성이라는 것도 없냐?"
삐딱하게 다리를 꼬며 앉는 니가 할 말은 아닌 것 같다.
"딱 친구 몇명한테만 알려주면 된다니까? 성화연이랑 마스나...한서우 등등..."
"다른 애들은 당연히 안되고, 한서우 그것은 더더욱 안된다."
"한서우보고 그거라니..."
루시는 말을 듣고도 도무지 진지하게 생각하질 않는 모습이었다.
애초부터 내가 거절할 걸 염두에 두고 한 질문인가? 멍청한 질문이 따로 없다.
파지직!
그러다가 문득 들려온 파열음.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어 방의 구석을 바라보니 녹화중이던 CCTV가 알게모르게 무력화 된 상태였다.
"근데 말이야..."
속삭이듯 들려오는 소름끼치는 목소리에 다시금 루시를 바라봤다.
"언제부터 이게 협상이었지?"
뻐걱!
"커헉!"
분명 아무런 조짐조차 보이지 않던 곳에서 갑작스럽게 검은 마력이 움직였다.
뒷목을 후려치는 듯한 느낌...
...아니, 느낌이 아니라 진짜로 후려친거다. 이 미친년.
정말로 애다운 복수다.
어린아이가 힘을 가지면 뭔 일이 벌어지는 지, 이번 일로 새삼 깨닫게 된다.
흐려져가는 의식속에서, 어느샌가 유리벽 안으로 들어온 루시가 쭈그려 앉아 내려다보는 모습이 들어왔다.
"이건 요구야, 멍청아."
사람 한번 잘못건드려도 제대로 잘못건드렸다.
씨발.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