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원해주세요, 마수님!-96화 (96/162)

〈 96화 〉 2부 25. 일상(?)

* * *

­"이제 대체 뭘 어떻게 해야합니까?"

해방자 한명이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여러 인파의 목소리에 뒤섞여 들려온다.

주변이 소란스럽다.

그도 그럴게, 수십만명의 사람들이 일제히 자기네 팀끼리 모이고 흩어져 방금전의 일로 열띤 토론을 하고있기 때문이다.

아니, 토론이라기 보다는 사실상 현실부정에 가까운 푸념이지만...

각 팀의 지휘부는 갑작스러운 사태에 판단력이 마비된 모양이었다.

사실 마법진이 무력화된 초반에 있었던 혼란과는 비교도 안될정도로 낮은 수준이긴 했다.

그때는 아예 통역마법 자체가 무력화되서, 순식간에 수십만명이 서로 대화도 못하는 대참사가 벌어졌으니.

다행히 상황판단이 빠른 이들에 의해 공용어가 영어로 고정됐고, 못하는 이들에겐 각 팀의 리더들에게 의사를 전달해 규합하기로 한 모양이다.

일단은 현재가 혼란스러운 상황이라고는 해도 가만히 있어선 안됐다.

최악의 상황을 가정해두고선, 수뇌부의 판단이 끝날 때까지 장기생존 대비를 이어가기로 했다.

본래 절반가량만 이곳에 쳐둘 예정이었던 천막들은 전부 한명씩 배정되어 숙소로서 설치되고 있었고, 주변의 시야를 꽉 막는 잡다한 장애물도 치우는 작업이 시작됐다.

언제나 최악의 상황을 가정해두기에, 이렇게 발빠르게 대처할 수 있는거다.

그렇기에 개척을 담당하는 71~102팀까지를 제외하고서는 모두 광장 안에 모여있는 상황이었다.

"...마법진이 잘못된 건 아니래."

루카가 터덜터덜 돌아오며 말한다.

그 말에 다시한번 고개를 돌려 광장 중앙에 자리잡은 거대한 마법진을 바라보니, 역시 마력 파편조차 증발한 듯 사라져있는 모습이 보였다.

...마력 자체가 존재하질 않는건가?

저 마법진은 이제 아무런 의미조차 존재하지 않는 그림에 불과하게 됐다.

­[모두 집합한다! 합의의 결과가 나왔다.]

시끄럽던 목소리가 일제히 멈췄다.

광장 중앙에서 쩌렁쩌렁 울리는 커다란 목소리 탓이었다.

지금은 마력조차 없는데 어떻게 저렇게까지 큰 목소리를 내는건진 모르겠다.

방금전까지 혼란에 빠져 마구 떠들어대던 해방자들은 그 말을 듣고선 차츰차츰 광장 중앙을 향해 모이기 시작했다.

광장 중앙에 서있는 사자형태의 석상 주변에 둘러 서있는 수백명의 팀 리더들이 보였다.

'...확성기?'

그 중 한명이 붉은색의 눈에띄는 확성기를 들고 있다.

이상하네, 분명 저런 걸 들고다닐만한 사람은 없었던 것 같은데.

하지만 이내 여긴 그녀ㅡ루시ㅡ가 이전에 살던 곳...그러니까, 우리가 원래 살던 지구처럼 사람이 문명을 발전시켜왔던 곳이라는 걸 깨닫고선 납득했다.

이런 거대한 광장이라면 저런게 한두개쯤 떨어져있어도 이상할 건 없다.

잡념을 정리하고선 앞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조사결과, 이곳은 우리가 사는 지구와는 전혀 다른 공간이라는 것이 확정됐다.]

몇몇 이들이 놀라는 것이 보이지만, 그리 많지는 않았다.

이미 대다수는 눈치채고 있던 탓이다.

[쉽게 설명하자면, 이곳은 평행우주와도 같은 곳인 듯 하다. 마력이 극심할 정도로 희박했던 이유도, 모두 이걸로 증명되고.]

마력은 전 우주에 걸쳐 균일하게 분포되어 있다.

증명된 지 오래인 이론에 근거해, 이곳이 우리가 살던 우주와는 완전히 다른 우주라는 것도 알 수 있었다.

[선구자들의 자료에 따라, 우리는 이곳을 선구자님의 고향이자, 모든 마수들의 고향으로 확정한다.]

이번에는 꽤나 많은 술렁임이 일었다.

과연 이게 해방자들이 맞나 싶을정도로, 마음속에 요동이 이는 이들이 많은 것 같았다.

그도 그럴게, 그 '선구자'님의 고향차원이라니. 나도 새하얀 소녀를 진작에 만나지 못했더라면, 놀라고도 남았을 일이었다.

[방금 전 우리가 있었던 곳은, 하늘에 떠있던 거대한 물체. 그곳이다. 어째서 지금은 아니냐고 묻는다면, 지금은 방금전과 같은 우주에 속해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저게 뭔소리야."

누군가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방금 전, 그러니까 우리가 이 평행지구로 온 직후.

그 시점에는 마력이 굉장히 희박했다. 하지만 그래도 어느정도 초상현상을 일으킬 정도로 마력이 '존재'는 했기에, 마법진도 그릴 수 있었다.

비록 초상능력자 개개인이 초상능력을 일으킬 정도의 마력은 없었지만, 마법진의 경우엔 크기만 충분히 키우면 어느정도는 제대로 작동할 수 있었다.

그리고 하늘에 그 지구가 나타났을 무렵엔 아예 본래의 우주와 마력 농도가 똑같아져, 개개인도 초상능력을 마음대로 쓸 수 있었고.

하지만 이제는, 아예 아무것도 보이질 않는다.

하늘에 떠있던 지구마저도 전부 사라져있다.

방금 전까지는 중간차원에 끼어있었기에, 그래도 하늘의 지구는 윤곽이라도 보였다.

하지만 이제는 아예 보이질 않는다.]

그저 텅 빈 하늘 뿐.

[이것이 무얼 뜻하느냐.]

[우리는 완전히 고립됐다. 마법으로부터, 초상능력으로부터, 도서관으로부터. 완벽하게.]

[이제부터 우리가 있는 곳은 다른 행성이 아니라 다른 우주다.]

[그리고, 우리는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한다. 이곳에서.]

이어지는 말은 도저히 납득하기 어려운 진실이었다.

***

"루시, 혹시 중앙아시아쪽 그 빛기둥도 네가 일으킨 일이야?"

"쿨럭!"

냉장고에 들어있던 콜라를 꺼내마시다 말고 들려온 성화연의 말에 그만 사례가 들려버렸다.

켁켁 거리며 가슴을 두드리고 있자니 성화연이 서둘러 등을 두드려준다.

"...정말 루시 네가 일으킨 일이야?"

"크흑, 흐, 그럴리가 있겠냐...애초에 그건 내가 인지하기도 전부터 솟아오르고 있던건데."

내가 가드에 소속된 채로 용병일을 하고있을 적에도 간간히 소문으로 들려왔던 내용이다.

당연히 그 시점에는 내가 산을 솟아오르게 할 정도로 대단한 힘을 갖고있지도 않았고, 있다 하더라도 그런 일을 저지를 이유가 없었다.

"아니, 애초에 누가 그딴식으로 마법진을 그릴 생각을 해. 솟아오르는 산으로 미친듯이 거대한 전이마법진을 그린다? 난 상상도 못하는 일이야."

"그런가..."

성화연은 침대위에 털썩 올라가 앉았다.

"아무튼, 그 일 때문에 지금 조사단이 파견된 상태야. 아마 2주 뒤쯤이면 저 너머로 넘어갈 것 같아."

지금은 우리 우주에 겹쳐있는게 아니라 아예 다른 우주에 있는건데, 저 너머로 넘어간다고?

돌아올 방법도 확실하질 않은데?

아니 그것보다...

'해방자들이랑 충돌하진 않으려나.'

만약 전이되는 위치가 전부 똑같다면, 이건 100% 해방자들과 부딪친다.

가뜩이나 마력도 없는곳에서 그런 전투가 일어났다간, 히어로 협회쪽이 일방적으로 쳐발릴 가능성이 농후하다.

"한서우는 아직도 연락 안된데? 이정도 일이면 보통 걔한테도 연락 가지 않나?"

"평소에도 나랑 마스, 아니면 벨라같은 친한애들 전화만 받는데, 따로 연락을 받을리가 있겠어? 게다가 요즘엔 어디 오지라도 들어간건지 아예 전화를 받질 않는다구."

"무능력한 전쟁영웅이네 완전..."

물론 농담이다.

저렇게 된게 다 나때문이라고 하니 죄책감도 드는 건 사실이다.

...내가 직접 찾아가야 하나.

"됐어, 신경 꺼. 어차피 진짜로 심각해지면 한서우도 알아서 움직이겠지."

뭔가 토라진듯한 목소리였다.

.

.

.

"밥 잘 챙겨먹고! 모르는 사람이 문 두드리면 열어주지 마!"

"내가 애냐..."

"애잖아!"

"야!"

장난스럽게 웃으며 성화연은 현관문 너머로 사라졌다.

이내 호텔의 방 안엔 적막만이 남았다.

"..."

아니, 이렇게 혼자만 두고가면 어쩌자는거야.

컴퓨터도 있고 TV도 있어서 지루하진 않을 것 같지만...그래도 내가 해야할 일이 몇갠데.

'...없나?'

"...없네."

생각해보면, 언제나 일은 벌이기만 하고 수습하는 건 결국 히어로 협회나 해방자들 쪽이었다.

골칫거리는 나였던건가.

"에휴, 몰라."

밤 될때까지 기다리기나 하자.

방의 한구석에 자리잡은 푹신한 의자 위에 튕기듯 올라 타서, 발가락 끝으로 컴퓨터의 전원을 켰다.

"오..."

....윈도우 화면이다.

'...얼마만이지.'

이런 방식의 컴퓨터를 본 게 대체...몇년만인가.

아득한 과거라고 기억하고 있는데도, 막상 눈앞에서 접하니 미칠듯한 향수가 몰려온다.

옛날에는 이게 내 전부였는데. 어떻게 이런 걸 잊고 살았는지.

마우스를 잡는다는 감각 자체가 너무나 생소했다.

하나하나가 다 눈에 들어오고, 모든 게 다 새로웠다.

"...좋네."

기분 좋은 감각이었다.

아마, 이전의 나라면 느끼지 못했을.

친절하게도, 컴퓨터가 설치되어 있는 호텔이라 그런지 요즘 애들이 할만한 게임은 이미 기본 옵션수준으로 설치되어 있는 듯 했다.

"한 시간만 하자! 한 시간만!"

볼을 짝짝 두드렸다.

계정생성 단계부터 보호자 동의때문에 막혀버린 건 안비밀이다.

.

.

.

"루~시이...오랜만이다아..."

"큭, 으읍! 야! 일어나!"

딱 한 시간만 하자고 한 내 다짐은 어디로 가고, 결국엔 오후 대부분을 쏟아버렸다.

망각해버리고 만 것이다. 게임이라는 것의 중독성을.

이곳에 오고 난 이후부턴 아예 이런 걸 접할 틈도 없이, 숨쉴때마다 갈려나가고 피토하고 그랬으니 이런 거에 더 빠질 법도 했다.

'...자제해야겠네.'

헤드셋을 벗으며 시계를 보고선 한 생각이다.

그리고 그 무렵 타이밍 좋게 울린 초인종에 문을 열고 나니...이런 모양이고.

"우리 루시이...왜 아직도 이렇게 쪼그만거냐....아직도 꼬맹이네, 꼬맹이!"

"술쳐먹었으면 얌전히 집에좀 들어가!"

마스가 붉어진 얼굴로 내 몸 위로 쓰러진다.

어깨에 턱을 걸쳐서 간신히 붙잡고 있긴 한데, 내 몸의 크기가 크기다 보니 굉장히 힘들다.

'그나저나, 마스 얘도 기억해낸건가...'

나에 대한 정보는 성화연에게서 모조리 전해들었을테니, 언제 기억해도 이상하진 않았다.

다만 마스 자체가 워낙에...그, 털털한 느낌이라.

딱히 그런 심오한 것 따윈 신경 안쓸 것 같았으니...

'지금은 그냥 술취해서 각성한건가보네...'

깨고나면 어차피 다 잊어먹겠지.

근데 난 뭐, 이런 편이 더 편하다.

널널하니 마음도 편하고, 집에 온 것 같잖아?

"야아...내가 그래도 너 생각해서 이렇게 온건데. 넌 내가 그렇게 싫냐..."

"웩, 케헥...아니...술냄새좀 어떻게 해봐 미친놈아! 민트라도 먹어!"

"맛없어어..."

어깨에 걸치고 있는 숄더백을 벗겨두고선 침대 옆에 내려놨다.

얘 상태가 정상이 아니네. 금방이라도 곯아 떨어져도 이상하지 않다.

팔을 만질때마다 느껴지는 딱딱한 느낌이 자꾸만 등을 자극해서 업고 옮기기조차 힘들다.

"ㅡ이익!"

어찌어찌 끌고온 마스를 끌어올려 침대 위에 눞였다.

고작 이런 일 했다고 온몸에 힘이 다 빠진다.

"...아니, 마법쓰면 되는거였잖아 씨발..."

애꿏게도 내가 한 짓이 멍청한 일이었단 걸 깨달은 시점엔, 내 온몸은 이미 땀에 적셔진 시점이었다.

"하아...하아...이 미친놈 진짜..."

곱게곱게 지 집이나 갈 것이지.

뜬금없이 호텔 예약번호는 어떻게 알아가지고 이렇게 찾아온거래.

"...보나마나 성화연이 알려줬겠지."

뭔 일 있으면 가서 살펴보라고.

"에휴..."

술먹고 자는놈 깨우기도 뭣하니까, 그냥 오늘밤은 이렇게만 해둘까.

마스 위에 올라타 정장의 넥타이를 풀고선 바닥에 아무렇게나 던져뒀다.

'성화연 오면 알아서 처리 하라고 해...'

힘들다.

근데 그렇게 기분 나쁘진 않다.

그냥 술취한 친구 집에서 재우는 느낌이라 이해하면 되려나.

지친 몸을 이끌고선 창문을 향해 다가갔다.

"...예쁘네, 뭐."

밤하늘의 거대한 공동이 사라진 모습은 아름다웠다.

별들은 없었지만.

그렇기에, 어두운 하늘에 가려진 어두운 것들을 보지 못한 건, 당연한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일주일 뒤에 미개척지에서 거대한 마력파가 발생했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도, 딱히 별 생각이 들진 않았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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