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원해주세요, 마수님!-92화 (92/162)

〈 92화 〉 2부 21. 대체 무슨 짓을 한거야

* * *

"...미치겠네. 결국은 직접 접촉하라는건가."

한참동안이나 아카식 레코드를 들여다보던 사서는 결국 한숨을 푹 쉬며 책을 다시 진열장에 올려두었다.

해방자들이 이동한 곳이 어딘진 모르지만, 현재 우주가 아닌 것은 분명했다.

하지만 완전히 이곳에 속한 곳이 아닐 뿐, 어느정도는 이미 겹쳐있는 것이 분명했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그냥 반쯤 걸쳐있는거다.

반대편 우주와 이쪽 우주 사이의 교집합구간. 딱 그곳이다.

그렇기에 완전히 기록되지는 않았지만, 중간중간 끊기듯 계속해서 쓰였기에 대략적으로나마 저쪽의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결국 원인은 그 녀석이군."

과거의 멸망한 지구. 우리 우주와 한번 연결된 적이 있던 곳.

모든 마수들의 고향차원.

그저 거대한 것의 편린일 뿐인 정보였지만, 그것만으로도 어떻게 된 일인지 파악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모든 마수들의 고향이라는 것은 곧 '루시'라는 것의 고향이라는 것과 마찬가지.

로­엘로아흐 프로젝트야 이미 한참 전부터 알았으니 루시가 그것의 결과물이라는 것 쯤은 알고 있었다.

여하튼, 어떻게 된 일인지는 몰라도 그 루시라는 것 때문에 두 우주가 서로 뒤섞이기 시작한 것이 분명하다.

의식적으로 한 일인지, 무의식적으로 한 일인지는 모른다. 애초에 루시의 생각은 아카식 레코드에 보이질 않으니까.

결국 최종적으로 나오는 결론은, 루시와 접촉해 현재의 상황을 알리고 최대한 빨리 해결책을 도출하는 것이다.

현재 인간의 힘으로는, 우주와 우주가 뒤섞이는 불가항력적인 재해를 도저히 막을 수가 없다.

"일단은 대화부터 시도해봐야 하나."

오랜만에 바깥으로 나가봐야 할 것 같다.

시가를 챙기고선, 옷걸이에 걸려있던 허벅지까지 내려오는 암갈색의 롱코트를 정장 위에 걸쳐입었다.

***

"기왕 여기까지 왔는데, 뭐 더 하고싶은 건 없어?"

"...어..."

어차피 사람 사는곳이 다 똑같지, 특별히 여기와서 하고싶은 거라니?

기껏해야 관광지 순회밖에 더하겠나 싶었지만, 이미 그런 곳이야 진작에 다 알고있다.

직접 가본 건 아니지만, 머릿속에 들어있는 정보로 너무나 생생하게 연상이 가능하기에 사실상 가봤자 쓸모가 없다고 생각한거다.

...좋은건가? 가보지도 않고 관광지 구경이라니. 뭔가 애매하다.

그냥 고개를 도리도리 젓고는, 한가롭게 도시나 걸어다니기로 했다.

"근데, 한서우 걔는 어딨는지 아세요? 성화연이 요즘엔 연락 안된다고 하던데."

"...한서우? 그 전쟁영웅?"

"네, 맞을거에요."

칭호 한번 요란하네. 괜스레 웃음이 나왔다.

내가 그런 생각을 하며 히히덕거리고 있을동안 라비는 폰을 열고선 메신저를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마지막으로 갔던 곳이 아마...잠깐만 기다려봐."

계속해서 스크롤을 아래로 내리는게, 연락이 닿은 것도 상당히 오래전인 모양이다.

다리가 아파서 벤치에 앉을 정도로, 한참동안이나 폰에 눈을 뚫어져라 박고있었다.

"아, 서아시아쪽 미개척 구역이야. 그쪽에서 마지막으로 연락됐네."

"서아시아요? 연구자들 본거지 있던곳?"

"응, 거기."

저번에 갔을때 진작에 조금 더 조사해보고 올 걸 그랬나.

지금은 지구 정 반대편에 있는데.

"근데 이것도 2개월 전이니까, 지금은 다른 곳 가있을걸?"

"다른 곳이라 해봤자 아직도 연락 안되는 거 보면 계속 미개척지에 있는 거 아니에요?"

"그렇지."

길이 꼬였다.

돌겠네.

"나중에 그냥 찾아봐. 어차피 평생 걔가 그쪽에만 있을 것도 아닌데. 얼마 안지나서 다시 돌아오겠지."

"그런가..."

성화연조차 한서우에게 연락이 안됐다면, 아직 한서우는 날 모르고 있을 게 분명하다.

종전 이후로 사람이 급격하게 달라졌다고 했다. 여전히 듬직했지만, 방랑벽있는 성격으로 변했다고 한다.

왜 그렇게 세상을 떠돌아다니냐고 물어보니까, '자신도 알 지 못하는 무언가를 찾기 위해'...라고 말했다던데.

...꼴에 말은 오글거리게 잘하네.

내가 한서우에게 그렇게 중요한 인물이었나, 생각해보지만 뭔가 오묘하다.

솔직히 한서우는 나보다 중요한 애들이 더 많이 있었을텐데? 성화연이나, 마스...아니면 다른 친구라도.

설마 평생을 그 두명하고만 친구로 두고 지낸 건 아니겠지.

솔직히 인간관계까지는 내가 뭐라 간섭할 처지가 아니긴 하다.

'그러고보니, 얘들이랑 만난 지 얼마나 됐더라...'

알고지낸 건 종전 직전까지 해서, 대략 3년쯤...

근데 그중에 직접적으로 곁에 있었던 건, 고작해야 6개월이다.

그 6개월간의 인연이, 현재로선 내가 가진 인연의 전부였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난 답이없는 아싸새끼였다.

"...왜 그래? 내가 뭐 잘못했나?"

내 인상이 찌푸려진 걸 본건지, 라비가 물었다.

한숨을 쉬며 아니라고 대답해줄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한숨을 많이 쉬어서야 원, 땅이 꺼지겠네 그냥.

­쿠구구...

내 말에 호응이라도 하듯, 갑작스럽게 땅이 요란하게 뒤흔들리기 시작한 것도 그때였다.

"???"

"...뭐야, 지진인가?"

라비가 태연하게 중얼거렸다.

뭐지? 진짜 나때문에 흔들리는거야?

내 힘을 너무 간과하고 있어서 무심코 저질러버린건가? 이런 걸 원하진 않았는데?

혼란스러워 하고있으려니, 주변에서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는 소리가 귀에 들어왔다.

아니, 그렇게 심하게 흔들리는 것도 아닌데 왜 저렇게들 호들갑인지 모르겠다.

라비가 태연하게 말한 것도 다 이유가 있어서다. 건물이 무너질 정도로 심각한 수준의 지진은 아니었다.

그저 간판이 조금 흔들리고, 정차된 차에서 삐삐삐 소리가 울리는 것 정도로, 굉장히 약하다.

­파앗­!

"윽..."

그러다 한순간 하늘에서 발생한 엄청난 빛에 의해, 대낮임에도 불구하고 모두가 눈을 가렸다.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건지 모르겠다.

지진이 일어나나 싶더니, 이젠 왜 갑자기 또 하늘에서 난리래?

사이렌은 울리지 않는것이, 국가적으로 심각한 위기사항을 초래할 '재난'은 아닌 듯 싶었다.

그냥 기상현상 비슷한건가?

"...뭐야, 저거."

옆에서 누군가 중얼거리는 말에 꾹 감았던 눈을 뜨고선 팔을 치웠다.

그러자 보이는 건...

"...허?"

'지구'였다.

하늘 저 위에, 지구가 떠있다.

웅장한 자태로, 대기에 필터링 되어 살짝 흐릿하게 빛나는 지구가.

­팍!

"으헥?"

아직 진동도 잦아들지 않아 귀에는 무수한 소음이 남아있는데, 갑작스럽게 골목 속에서 튀어나온 무언가가 목을 감싸고 돌았다.

미끈거리는 게 마치 뱀의 표피처럼 느껴졌다.

다리가 공중으로 붕 뜨고, 그대로 골목으로 끌려들어갔다.

"라비 개새끼야­!"

꼴에 호위(?)랍시고 붙여준 놈이 이것도 대응을 못한다.

여전히 멍청하게 하늘을 바라보는 모습이었다.

마지막에서야 내 외침을 듣고 놀란 듯 골목을 바라보지만, 이미 손쓸 도리 없이 멀어진 뒤였다.

"끄흑!"

땅에 질질 끌려갔다.

몸에 직접적으로 상처는 입히지 않는게, 적대적으로 대할 생각은 없는 모양이었다.

이렇게 둔해서야 대응하는 건 쉽다.

그냥 골목째로 날려버릴까?

­콰지직ㅡ!

붉은색의 번개가 치는 온갖 검은색의 공허가 사방을 감싸고 돌았다.

당장이라도 도시 전체를 날려버릴 듯 흉흉한 기세였지만, 얘는 도저히 멈출 기색을 안보였다.

"너무 과격한데, 꼬맹아.'

그러다 문득 들려오는 말에 간신히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봤다.

그러자 보이는 건, 암갈색의 롱코트를 멋들어지게 차려입은, 검은머리의 젊은 남성이었다.

어딜가도 눈에 띌 정도로 세련된 외모였기에 이전에 본 적 있는 놈인가 떠올려봤지만, 역시 이런 애는 본적이 없다.

"과격한게 싫으면 너부터 과격하게 나오지 말던가 씨발...!"

"미안하지만, 지금은 단 둘이 얘기하고 싶어서 말이다."

자신을 찢어발길 온갖 마법이 주변에 산재해있는데도 여유로운 모습이었다.

어떤 인물이 떠올라서 굉장히 기분이 더러워졌다.

"진정해. 정말로 나쁘게 대하려고 온 건 아니니까. 일단은 조용한 곳으로 가서 얘기부터 하지."

"내 목부터, 케흑, 풀고 말해 미친놈아...알아서 걸어갈테니까..."

"미안하다."

­콰당탕!

급정거에 온몸이 땅을 뒹굴었다.

그제서야 목이 풀려서, 연신 바닥을 붙잡고 헛구역질을 할 수밖에 없었다.

도대체 뭔 놈인진 몰라도 첫인상 한번 제대로 말아 쳐먹은 건 분명하다.

만약 이새끼 입에서 나오는 말이 되도않는 개소리라면 찢어죽이겠다고 속으로 다짐했다.

***

"...신기하네."

하늘을 올려다본다.

어두운 하늘 저 한가운데에, 거대한 푸른색의 별이 자리잡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앞에서 피우던 모닥불을 내버려두고, 뒤에 마련된 텐트로 걸어가 사진기 하나를 꺼내들었다.

­찰칵!

예쁘게, 초승달처럼 찍힌 푸른 별의 모습이 확연하게 나와있다.

그나저나 대체 무슨 일일까. 갑자기 지구 전체에 묵직한 진동이 울리더니, 거대한 빛이 터져나오며 푸른 별이 생겨났다.

정확히, 밤하늘의 거대한 공동이 있던 그 자리에.

저렇게 거대한 규모의 이상현상이면, 분명 막대한 양의 마력이 소모됐을 게 분명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그 어떠한 마력도 느껴지지가 않았다.

"...?"

물론 달라진 점은 있었다.

이전의 그 모습.

그러니까, 그냥 하나의 거대한 검은 구멍이었을 때, 저곳엔 마력이 괴이하다 싶을정도로 희박했다면, 이젠 저곳도 평소와 같은 마력이 흘러다닌다.

"테라포밍인가...?"

알 수 없는 일이다.

이런 규모의 사태라면, 어디 음지에서 활동하는 비밀 마법사 조직이 일을 벌인걸까? 어쩌면, 엘로힘과도 같은 존재가 다시금 모습을 드러낸 걸 지도 몰랐다.

"후우..."

입에서 입김이 뿜어져나왔다.

천으로 만들어진 간단한 의자 위에서 밤하늘을 올려다봤다.

어째선지 저 지구에서 '그립다'라는 느낌이 나는 건 기분탓이려나.

'...말도 안되지.'

저 지구가 내 고향이라도 된다는 말인가.

그런 의미의 '그리움'보다는, 익숙한 무언가와 비슷한 느낌의 '그리움'이었다.

...어떻게 보면 별 차이 없어보이는 말이다.

"빨리 가야겠네."

이정도 사태라면, 아마 다시 복귀해야하지 않을까?

나, 그러니까 한서우는, 짜증인지 기쁨인지 모를 오묘한 표정을 짓고선 모닥불을 한번 휘적거렸다.

* *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