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9화 〉 2부 18. 동창회
* * *
난 지금 혼란스러워하고 있다.
아니, 단순히 혼란스러워 하는 정도가 아니라 자신의 인생에 대해 깊은 고찰까지 하기 시작했다.
정말로, 완벽하게 일반인스러운 생각이나 하고 앉아있다는 소리다.
지금 해방자들은, 그 새하얀 소녀를 놓친것과, 잔해에 대한 존재가 외부로 세어나갔다는 사실때문에 정신이 나가기 일보 직전이건만.
"...아리아."
"응?"
"만약 끝까지, 끝까지 쫓아가도 절대로 닿을 수 없는 꿈 같은게 있다면, 어떨 것 같아요?"
정말로 나답지 않은 생각이었다.
평소라면 본래 그렇게 생각했겠지만, 지금은 평소가 아니니까.
아리아는 마치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놀란 표정을 지었지만, 내가 이전에 했던 말을 떠올려낸건지 금세 측은한 표정으로 변했다.
시체처럼 아무 의욕도 없이 지내던 내가, 갑자기 이런 궁상맞은 생각을 하게 됐다는 것 만으로도 놀랄 일이긴 했다.
그 소녀가, 지워진 기록과 잃어버린 시간들에 깊이 연관되어 있다는 말을 들은 아리아는, 내 공백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원래 우리는 그런 사람들이잖아."
아리아가 말했다.
"그 덕에 지금까지 이렇게 살아올 수 있었고, 살아온거지. 선구자님이 없었다면 진작에 어딘가에서 죽었을텐데 말이야."
유일한 목적은 잔해와 엘로힘을 이 세상에서 몰아내는 것.
그러나, 지금 나에겐 쓸데없는 잡생각이 너무 많았다.
"그래도 말이야, 우리가 그렇게까지 나락에만 쳐박힌 사람들은 아니잖아? 비록 떠넘겨진 거긴 해도, 가야할 길은 명확하니까."
"...네."
자신이 최악의 감정으로 생각했던 느낌도, 나중가서 보면 별 거 아니다.
언제나 인간은 망각하니까.
"너무 마음에 두지는 마. 잡생각만큼 위험한 건 없어."
그래도, 그 소녀가 내 인생의 중대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던 한은, 잊을 수 없었다.
이름조차 모르지만...
'위험해.'
고개를 훌훌 털었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 생각은 지나치게 속물적인 생각으로 흘러간다.
자칫 잘못하다가 잔해들과 마주했을때 어떤 일이 벌어질 지는 나조차 알 수 없었다.
"일단은 우리 손을 벗어난 일이잖아."
그래. 우리 손을 벗어난 일이다.
이미 그 소녀는 히어로 협회 쪽으로 넘어갔고, 그곳에서 빼내오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어떻게든 체념해봤다.
체념했다고 스스로를 납득시켰다.
그래봤자 임시방편에 지나진 않았지만 말이다.
어차피 언젠가는 다시 마주하게 될 거고, 그때면 결과가 말해주겠지.
'...인간으로서.'
인간으로서 살아가고 싶다고 말했던가.
자신은 과연 인간인지 아닌지 궁금해진다.
그 소녀가 말했던 인간이라는 것에, 나도 포함되는 개념인건지.
복잡한 생각이었다.
"아무튼, 가야지? 예정일자가 머지 않았어."
뭐가 어찌됐던, 모든 것은 변화할 뿐이다.
***
며칠동안 도시를 요리조리 쏘다녔다.
명색이 본부장이라는 놈이 이렇게 놀러다녀도 되는건가 싶었는데, 아무 상관 없댄다.
이게 부조리인지 뭐시기인지, 그런건가?
어떻게 리더가 다 내팽겨치고 나올 수 있지?
"월차냈어."
"...?"
"...? 히어로 협회도 직장인데?"
상식이 뒤틀린다. 어쩌면 이것도 나때문에 세상이 이상해진 결과물인 걸수도 있어.
아니,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본부장이 뭔 월차야!!"
"괜찮아, 괜찮아~ 요즘엔 그냥 아랫쪽만 고생하지, 가끔씩 올라오는 보고서 빼곤 별 일 없어."
한숨을 푹 쉬었다.
아카데미 다닐때만 해도, 모범생 이미지였는데.
"...그래서 우리 지금 어디가는건데?"
뭐, 자기가 괜찮다고 하니 괜찮겠지. 너무 깊이 생각하진 말자.
더 귀찮게 구는 대신, 그냥 지금같은 한밤중에 가는 곳을 물어봤다.
"가보면 알거야."
생글생글 웃는 모습이 불안하기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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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창회? 정말로?"
"헤헤..."
헤헤는 무슨.
아카데미에 다닌 게 끽해야 3, 4개월밖에 되지 않은 나로선 황당하기 그지 없는 발언이다.
"마스도 온댔는데..."
"근데 나도 데려간다고? 정말로? 기밀사항이라 하지 않았어?"
성화연은 허둥지둥대며 사촌동생 비슷한 누군가로 둘러대면 해결될 거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게 더 이상하다.
대체 어떤 미친사람이 동창회에 자식도 아니라 사촌동생을 데려가?
"그래도 명색이 아카데미 재학생이었잖아, 일단은! 잊혀졌다고는 해도 뭐 어때? 사실은 불변인걸?"
아니, 그거 아니야...
사실조차 휙 휙 변하는게, 엘로힘과 상위차원과 연관된 나로서는 그렇게 드문 일도 아니다.
당장 무의식이라는 영역이 지나칠정도로 밝혀진 게 없어서 그렇지, 이미 현실에서 내가 존재했다는 사실 자체가 변한 건 맞다. 숨겨진 게 아니라, 그냥 사실 자체가 변한거다.
"너무 심오하게 생각하지 마. 상관없잖아, 너도."
"어색한데..."
"그럴 필요 없어! 자!"
성화연이 날 번쩍 안아들었다.
수치심에 죽어버릴 것만 같다.
아무리 모습은 이래도 동갑내기인데...
'..아니.'
오히려 나이를 더 먹었으면 더 먹었지, 결코 동갑은 아니다.
지금 나보다 어린 놈한테 안겨있는 거다. 말이 되는건가, 이게?
내가 어떻게 생각하던, 성화연은 아무 신경도 쓰지 않는 듯 했다.
'내가 이해해야지, 뭐...'
...9년만에 만난 친구니까, 이 정도는 납득 가능한 선일수도.
성화연의 품에 안긴채 고깃집으로 들어가자, 군침도는 냄새가 머리를 강타한다.
여기저기서 TV소리 조차 안들릴 정도로 시끄럽게 떠드는 모습을 보니, 에너지가 넘친다는 느낌이 난다.
얘들 그러고보니, 올해로 26살이랬던가.
"성화연ㅡ! 여기!"
저 멀리서 손을 흔드는 마스가 보였다.
의수는 전보다 훨씬 세련된 모습이긴 했지만, 내구도에만 중점을 둔 듯 그 어떠한 곳에도 마력을 받아들일 수 있는 금속같은 건 없었다.
하긴 이젠 장교직 같은거 다 때려 치우고 기자나 하고있댔으니.
"...어, 얜 누구야?"
날 본 마스가 성화연한테 물어봤다.
성화연을 살짝 흘겨보자, 땀을 삐질삐질 흘리는 모습이 보였다.
'잘 해봐.'
자기가 데려왔으니, 알아서 해결해야지.
횡설수설하는 성화연의 말을 듣고 불안해진 건 성화연 혼자뿐만이 아니었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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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뭐, 그다지 심각하게 짚고 넘어갈 건 아니니 그냥 대충대충 넘어갔다.
아는 친구 동생을, 하룻동안만 맡아주기로 했다는 식으로.
집에 혼자 두고 올 수는 없어서 이렇게 했다고 한다.
"흰머리가 아는 친구중에 있었냐..."
"하하..."
...아마도, 그냥 대충 넘어간 게 분명했다.
'...근데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애가 저 모양인거냐? 요즘엔 저정도로 다치는 것도 쉽지 않을텐데.'
'그, 그게...'
그냥 무시하자.
더 신경써봤자 나만 피곤해진다.
주변엔 모르는 사람들이 많이 보였다. 다 아는사람들인 건가?
마스가 옆에 앉아있는 남자에게 아무 거리낌도 없이 대하는 걸 보니, 이 테이블에 앉은 사람 대부분은 이미 다 아는 사람인 듯 싶었다.
"배고파? 뭐 따로 먹고싶은 거 있니?"
어색한 분위기에 그냥 익어가는 고기만 바라보고 있던 그때, 마스가 말을 걸어왔다.
"아, 아...네."
"부담스러워 할 거 없으니까 그냥 막 먹어라. 눈치 볼 필요 없어."
고기를 한 웅큼 집게로 집어서 앞접시에 올려준다.
솔직히 고기는 질리도록 먹어서, 딱히 입맛이 없던 것도 사실인데.
그래도 한 조각 집어서 입에 넣어 먹으니, 고급 레스토랑에서 먹던 고기랑은 색다른 맛이 난다.
굉장히...뭔가...추억을 불러일으키는 맛이었다.
익숙한 맛인가?
잘 모르겠네.
그래도, 맛있다는 거 하나만은 확실하니...
"아 그러고보니, 한서우는? 아직 안왔어?"
"지금 가있는 지역 항공편이 불안정해서 못 온대. 나중에 시간 되면 연락 한다던데, 못받았어?"
"아..."
아깝네.
날 보며 성화연이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린 듯 했다.
"나중에 온다 그랬으니까, 지금은 그냥 즐겨! 일 다 해결되면 한서우도 돌아오겠지."
"아니, 그 일이 지금 여깄는데..."
한서우는 나중에 만나보기로 하자.
지금 여기엔 없대잖아.
성화연의 옆구리를 쿡쿡 찌르며 속삭였다.
뭐, 그럴까?
복잡한 생각은 그만두기로 한 듯 하다.
치익 하며 맥주인지 소주인지, 뭔지도 모를 술이 까이고, 벌컥벌컥 들이키기 시작했다.
"야, 야...너도 한잔 해라. 기껏 이런데 와서 가만히 앉아있으면 그게 뭐야?"
"마스! 얘 미성년자야, 미성년자!"
미성년자 아니에요.
성화연이 낚아채려던 술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쓰기도 하며 단것이, 맛있는건가?
"으엑..."
맛없어.
술은 취하려고 먹는다던데, 그게 맞나보다.
"..너 술 먹어도 괜찮아?"
끄덕끄덕.
어차피 취하지도 않을 걸.
"그럼, 뭐!"
짠, 하며 잔이 부딪치는 소리가 들리고, 밤은 깊어만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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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이준서! 와봐라, 여기."
탁탁. 마스가 의자 옆을 두드린다.
얼굴이 붉게 물든게, 누가 봐도 취했다고 할 만한 모습이다.
"루시, 루시...나...우웁..."
"??"
성화연은 뜬금없이 헛구역질을 하며 입을 막기 시작했다.
벌써 3시간이 지났다.
그 긴 시간동안 술을 멈출 새도 없이 들이켰으니, 일어날 일이 뭔진 쉽게 알 수 있었다.
"아, 아니 잠깐!"
급하게 성화연의 손을 잡아끌었다.
화장실 앞에선 잠깐 머뭇거렸지만, 금방 여자화장실로 달려갔다.
웨에에에엑
....저건, 술에 강한건가 아닌건가.
3시간 동안 먹고 게웠으니, 강한건가?
상대적인 거라 잘 모르겠다.
"마스 저 괴물같은 새끼..."
준서의 어깨를 동여매고 헤실거리며 뭐라 말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이준서는 마스의 머리를 손으로 잡으며 밀어내는 것이, 꽤나 웃긴 모습이었다.
웨에엑
피곤해지는 건 기분탓인가.
보호자는 분명 성화연일텐데. 어째 역할이 뒤바뀐 느낌이다.
콰당탕!
"에휴..."
화장실에서 우당탕 거리는 소리가 들리고, 나는 한숨을 푹 쉬며 성화연을 데리러 다시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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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안."
"너 술은 먹지마라. 술버릇 왜 그렇게 나쁘냐..."
사무실 소파에서 비몽사몽하며 일어난 성화연의 사과를 받은 건, 다음날 오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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