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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해주세요, 마수님!-86화 (86/162)

〈 86화 〉 2부 15. 도서관

* * *

강제적으로 싸움을 종료시킨 뒤에, 꺼림칙한 기분으로 입맛을 다셨다.

역시나 이렇게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건 지향하진 않았지만, 방금은 어처구니 없는 심정에 충동적으로 저지른 짓이었다.

당장 내 수중에 싸움을 중지시킬 근거가 될만한 무언가가 있고, 상대가 지들끼리 싸움을 하는게 나한테 이득될게 전혀 없는 짓이라면 당연히 이렇게 했겠지.

잔해라는 것이 그저 잊혀진 것일 뿐이라는 것만 아는 나로서도 상당히 성급하기 그지없는 결정이었으나, 딱히 후회하진 않는다.

'나조차도 제대로 모르는건데...'

...뭐, 후회하지 않는다고 생각할 뿐이다.

"그나저나 윤서아 그 미친년은 진짜..."

걘 또 왜이렇게 감이 좋은지, 벌써부터 이쪽에 대해 알아차리려 하고 있었다.

아니, 어쩌면 이미 알아차렸다.

온몸에 소름이 끼친다. 정말로, 저정도는 되야 집착이라고 부를만 하구나.

보통 영화같은거 보면, 존재의 소멸이라는 설정은 굉장히 아련하게 다가오기 마련인데, 나한텐 오히려 공포로만 다가온다.

"인생 진짜..."

내가 선택한 인생이니까, 악으로 깡으로 버텨야지 뭐.

사실 그렇게 나쁘지도 않잖아?

그런 생각을 하며 홀가분하게 자리를 떴다.

평소와 다름없이, 그냥 흘러가는 하루인 듯 했다.

*

"하아...하아..."

좋아해야 하는건가? 왜 미칠 것 같지?

아니, 분명 이렇게 여기까지 헐레벌떡 뛰어온거 보면, 알아차린 거잖아.

좋아해야하나?

좋아해야 하는건가?

가만히 바라보고만 있었다.

애초에, 이 골목에 성화연 혼자만 있는 것도 아니잖아.

군인들도 대략 열댓명 즈음은 따라온 것 같다.

물론 숨어있으니 내가 모를거라 생각하고 있을 수도 있겠네.

성화연이 날 바라봤다.

"그, 혹시."

품에는 서류뭉치가 들려있다.

전부 성급하게 정리한 듯 정돈되지 않아 여기저기 흐뜨러져있었다.

성화연이 숨을 고르고선 말했다.

"...나, 난...내가..."

"..."

목소리가 평온하지 않다.

"내가, 널...아는거야?"

"...?"

"아, 아니. 그게 아니라...!"

허둥지둥 하며, 본인조차 제대로 생각이 끝나질 않은 모양이었다.

"우린 친구였어. 맞아?"

자리를 떠야할까, 어떻게 해야할까.

잠시 생각을 하던 나는 어차피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는 걸 알게됐다.

자기 스스로, 만나러 이렇게 온거면 딱히 도망칠 필요가 없지 않나?

나한텐 도망다닐 이유도 없고, 도움의 손길을 거절할 이유도 없다.

물론 어디 연구실에 팔아넘기려 하면 모르겠다만, 성화연은 이미 알고있다.

짐작이긴 하다만, 저렇게까지 말하는 걸 보면 자기 스스로 결론을 내리고 다짐한 듯 했다.

피식, 하고 웃음이 새어나왔다.

내 웃음에 성화연은 잠깐 벙찐 듯 보였으나, 금세 웃음의 의미를 파악하고선 자신도 활짝 웃었다.

"혹시, 이름이...뭔지 물어봐도 돼?"

인생이란게, 원래 가끔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는거다.

뜬금없는 사건의 연속이고, 그 어떠한 복선도 없지만...

뭐, 그런 복잡한건 다 제쳐두고라도.

내가 친구 하나는 잘 사귄 것 같다.

*

조용한 사무실이다.

고급진 가죽소파, 라고 하기에는 그렇지만, 그래도 아늑한 공간이었다.

결국 다 말해버렸어.

하나도 빠짐없이, 전부 말해버린다.

솔직히 믿을거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하지만 어째 이야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표정변화가 다채롭게 변하는 것이, 본인도 이미 얼추 알고있었던 건 아닐까, 하고 생각하게 했다.

2시간에 걸친,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아무런 감흥없는 이야기가 끝났다.

잠시 멍하니 커피잔을 내려다보던 성화연은 곧 입을 열었다.

"...루시, 라고 했지."

"응."

"...나는, 솔직히 이성적으로는, 잘 믿기 힘들어. 정말 네가 말한 그것들이 전부 사실인지도, 내가 기억하기를 고통스러워해서 그렇게 쉽게 잊었다는 것도..."

커피잔을 만지작 거리며 성화연이 중얼거렸다.

"그래도...네 말대로라면, 한서우가 그렇게 변한것도, 어째서 아카데미에 다닐 적의 기억이 이렇게 희미한지도 다 설명이 되잖아. 그리고..."

성화연은 커피잔만 뚫어져라 보던 걸 멈추곤, 나를 향해 고개를 들었다.

"...알아채고 나니까, 텅 비어있었어. 마음 한구석이. 아니, 원래는 몰랐는데 비어있다는 걸 알게됐어."

"..."

"이유없는 그리움이랑, 죄책감이... 막 마음속을 어지럽혔어."

내가 이 세계에서 붕 뜨고 난 이후, 처음으로 성화연과 만났을 적을 떠올려봤다.

여느 아이와 다름없이 대해주던 그 모습.

그래도, 자연스럽다기엔 꽤나 어색했던 그 모습이 떠올랐다.

"나는..."

아직 남아있는 커피의 수면 위에, 잔물결이 퍼진다.

"나는, 어쩌면...줄곧 도망치고 싶었던 게 아닐까. 내가 감당하기 힘들다고, 그냥 위선으로만 걱정했던게 아닐까..."

"성화연."

"난, 이미 알고 있었는데도..."

딱히 그게 잘못된 일이라 볼 수는 없는데 말이야.

애초에 감당하기 어려운 현실로부터, 환상으로 도망치는 건 딱히 잘못된 일이 아니다.

애초에 옳고 그름을 따지는게 이상한거다.

인간이니까, 당연한거다.

으아앙, 하며 울음이 터져나온다.

쌩판 모르는 사람 앞에서 보일 반응은 아니었다.

그냥, 무의식속에 본인이 꽁쳐놨던 기억이, 대화를 통해 어느정도 움튼 모양이다.

괜히 아픈 기억을 건드린건가?

상황 자체로만 두고 본다면, 꽤나 오글거리는 상황이기는 했다.

그래도, 뭐 어때.

이런 것도 딱히 나쁘진 않은데.

인간은 원래 망각의 동물이니까.

망각하고 싶다면 잊는게 당연하다.

나쁠 건 하나도 없었다.

***

"...어째 다 알아차리네요. 서아도 그렇고, 저 후배놈도..."

"당연하지. 무의식속에 깊숙하게 남은게 눈앞에 떡하니 나타났는데, 기억 못하면 그게 이상한 거 아닐까?"

"..."

팔락, 하며 책이 덮였다.

살아 움직이는 잉크는 계속해서 온 우주의 정보를 기록하고 있었으나, 저 사서는 나에게까지 그 정보를 허락하진 않을 모양이었다.

창문 밖으로 보이는 네온빛 가득한 우중충한 도시의 풍경은 여느때와 다름없이, 쉼없이 흘러가는 모습이었다.

"그래서, 이번 격리는 또 언제 풀리는건가요?"

"......너 머릿속에 든 그 정보만 말소하고. 유나랑 다시 만나고싶다고 한 건 너잖아?"

"..."

이유리, 그러니까 '나'는 한숨을 푹 쉬며 근처 아늑한 소파에 앉았다.

안경을 쓴 채 쉼없이 책만 읽으며 중얼거리는 남성을 바라보며.

머릿속에서 조금씩 중요한 정보들이 흘러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시간을 되짚어 올라가보면, 자신들을 선구자들의 종파라 소개한 이들과 만난 건 5년도 더 된 일이었다.

­"해방자들? 걔들은 그냥 따까리지. 몸으로 뛰는 애들."

­"...그럼 당신들은 뭔데?"

­"우리는...유산을 그대로 물려받은 사람들이지. 철저하게 관찰자로서만 존재하는 자들이야."

이들에 의해서 연구자들에게서 해방되고, 해방자로 소속된다.

도대체 어떻게 해냈는진 모르겠다.

하지만 그들은 해냈다.

오히려, 나를 해방자들과 연구자들 사이의 접점으로 만들어 두 세력 사이의 아슬아슬한 협력관계까지 구축했다.

­"너무 궁금해하진 마."

내가 그들의 목적과, 정체에 대해 물을 때마다 돌아왔던 말이다.

도서관에 올 때마다, 내가 이들의 정체에 대해서 물었단다.

사실 기억도 안나지만, 애초에 이 '도서관'이라는 공간 자체가 워낙에 이질적인 공간이라 그러려니 했다.

그들이 나에게서 바라는 건, 시공간을 초월해 연결되는 것.

쉽게 말해, 이유나와 나 사이에 연결되어있는 그 특유의 초상능력을 말하는거다.

일종의 텔레파시.

­"우리는 그걸로ㅡ 초공간의 비밀을 밝혀낼거야. 그저 이 우주에만 존재하는 정보가 아니라, 저 너머의 정보까지 모두 아카식 레코드에 담을 수 있게."

­"차라리 그냥 저 루시라는 애한테 직접 접촉하는게 어때요? 그게 더 확실하고, 빠를 것 같은데."

­"...그건, 무리야. 저건 너무 이질적인 존재야."

온 우주의 정보를 기록하는 '아카식 레코드'라는 것 조차, 저것에 대한 정보들이 온통 뒤죽박죽이라고 했다.

오로지 관찰자로서의 역할만 고집부리는 걸 보니, 상황에 진전이 없이 이렇게 제자리걸음만 하고 있는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그래도, 확실히 책에 실시간으로 기록되는 내용만 봐도 정상이 아니라는 건 알 수 있었으니.

어쩌면 아예 접촉조차 하지 않는게 현명한 판단일 수도 있다.

"그러고보니."

"응?"

"왜 저희의 초상능력이 그렇게 신기하다는 거죠? 어차피 초상능력 자체로만 두고보면, 2천년 전에 나타났을 때랑 다름없이 지금도 여전히 미지의 대상인데."

"또 그 얘기구나..."

차라리 이곳에서 있던 기억을 지우지 말던가, 라고 소리치자 그건 안된다며 기분나쁘게 웃는 사서.

그는 큼큼, 하며 자세를 가다듬고선 느긋하게 말하기 시작했다.

"그래, 초상능력 자체는 순전히 미지 그 자체지."

마력이 무엇인지, 마수가 무엇인지.

어째서 초상능력자가 아닌 일반인에게 마력을 강제적으로 주입하면 마수로 전락하고 마는건지.

어째서 초상능력자라도, 한계치 이상의 마력을 주입하면 마수가 되어버리는건지.

"온통 의문 뿐이야. 우리는 현상에 대해서만 알고, 그 원리에 대해서는 몰라. 아카식 레코드가 보여주는 건, 원리가 아니라 일어나는 일들 뿐이거든."

팔락, 팔락 거리며 책이 넘어간다.

"그런 의미에서, 너희는 특별한거지. 이성주와, 이유나, 그리고 너. 이렇게 삼남매중에 유독 이성주만 겉돌고있었지. 그게, 너희 남매의 분열을 초례한 원인이고."

괜스레 가슴 한구석만 아려온다.

"아무튼, 너희의 생각은 아카식 레코드에조차 기록되지 않아. 너희가 '텔레파시'라고 부르는 그것들은, 그 텔레파시로 인해 생겨난 결과만 적히고 그 텔레파시를 통해 오고간 대화가 전혀 기록되질 않는다는 소리야."

저 말은 곧, 우리의 '결속'이, 이 우주가 아닌 외부의 어딘가에서 벌어지고 있다는 소리다.

"우리는 그걸 통해, 상위차원의 본질을 밝혀낼거야. 뭐, 너희 남매를 예전처럼 돌려주는 건 그냥 순전히 네 협조를 얻기 위해 들어주는 부탁일 뿐이지만."

도시의 야경을 받으며 서있는 그를 멍하니 바라봤다.

"...제가 물어볼때마다 그렇게 분위기 잡으면서 말하신거에요?"

"....야."

빗소리가 들려온다.

초공간이니, 상위차원이니. 마력의 본질이니 뭐니. 알아듣지 못할 얘기 투성이었다.

그래도 '선구자'들에게 이쪽이 필요한 이유는 알았으니.

뭐 어차피, 여기서 나가고 나면 다시금 왔다는 사실만 기억하고, 이 안에서 일어났던 내용은 전부 잊어먹겠지.

도서관 내에 장비된 무수한 회로가 내 머릿속의 정보를 해체하고, 분석한다.

아프지는 않고, 그냥 편하게 수면유도되는 느낌이다. 굉장히 편했다.

'...기다려.'

어디서부터 틀어진 지 모르는, 이성주와의 관계또한 아카식 레코드를 수없이 훑다보면 언젠간 만나게 될 지 모른다.

거대한 도서관 홀의 중앙. 저 높이 달려있는, 고리모양의 샹들리에가 환히 빛나는 것이 보였다.

언뜻보면 마치 문처럼도 보였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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