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1화 〉 2부 10. 공조
* * *
엘로힘이란 것은 당연히 극비사항이다.
초상능력자들의 근원과 마찬가지로.
일반인들은 진실을 알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물론, 학자들이 독자적으로 연구해 알아낼 수 있긴 하겠으나, 겨우 그정도 만으로 배후에 있는 존재를 알아차릴 수 있을 리가 없다.
애초에 마수는 겉핥기 식으로 연구하는 건 몰라도, 세포단위로 파고드는 심층 분석이면 아예 불가능하다.
지금까지 그 시도를 성공한 학자는 단 한명밖에 없었다.
물론 그 사람도 현재 제정신은 아니기에 대중들이 진실을 알 방법은 없으려나.
'뭐, 그래봤자...'
그 '엘로힘'이란 것이 벌여둔 일의 스케일이 상상을 초월하니, 증거가 안 남을래야 안 남을 수가 없으니 문제지. 완전하게는 몰라도, 이미 대충 어림짐작으로는 알고있을 사람이 있을법도 했다.
게다가, 우리도 연구자들의 자료를 통해 간접적으로 존재에 대해서만 알 뿐, 자세한 건 몰랐다.
차라리 그냥 대중들한테 자료를 전부 공개하고, 연구 협력을 요청하면 안되는건가?
왜들 이렇게 꽉 막힌건지 모르겠다.
그 덕에, 이런 귀찮은 일까지 새로 추가됐고.
"볼드윈, 정보 말소는 끝났나?"
"...네, 끝났습니다."
손에 남은 검은 덩어리들을 폐기물 통에 털어넣었다.
따지고보면 그저 몸의 일부일 뿐이지만, 역시 본질이 마수라 그런건지 이런 불쾌감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그나저나, 이런 사람들은 시간이 지나도 사라지지를 않는군요."
"당연한거지. 인간의 미지를 향한 탐구심을...누가 막을 수 있겠나. 정작 알게될 진실을 감당조차 못 할 주제에 말이야."
마수의 시체를 개인적으로 소유하고, 연구하는 일은 모두 불법이다.
그럼에도 언제나, 한달에 십수명 가까이 이렇게 잡혀들어온다.
정부쪽에서 극비리에 진행하는 연구가 있긴 하지만, 그 연구조차 심심하면 연구원들이 미쳐나간다.
무엇때문에 학자들이 이렇게 마수의 시체에 집착하는건진 모른다.
애초에, 나도 모르니까.
그저 마수의 시체를 연구해서 알게 될 진실이, 몰라야 더 좋을 진실이라는 것만 알고있을 뿐이었다.
그래도 내심 마음속으로는 호기심이 동했던 것이, 나도 사실은 저 학자들과 비슷한 사람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게한다.
*
"...공조?"
"그래, 공조."
"갑자기 한국에서요?"
"그래."
뜬금없이, 전조같은 것도 없이 저 머나먼 해외에서의 공조 요청이다.
쌩판 모르는 국가는 아니다.
11년전, 총공습 사태 직전 잠깐 파견됐던 전적이 있었으니.
물론 그 임무는 거하게 말아먹어서, 커리어에 극심한 오점이 새겨져있었다.
어차피 상대가 상대인지라 아무도 신경 안쓰는 오점이긴 하지만, 그럼에도 그런 일이 있었다는 일 자체가 중요한거니까.
상당히 기묘한 점은, 말아먹은 것 자체는 기억하는데, 그 말아먹은 임무가 뭔질 기억 못하겠다는 것이다
뭣 때문에 총공습이 일어난지도, 뭣 때문에 내가 뜬금없이 그런 곳에 파견된건지도.
기억조차 못하는 걸 굳이 떠올리려 하고싶지는 않았다.
아무튼, 공조 이야기로 넘어와서.
한국이라는 국가에, 떼거지로 지원가게 생겼다.
비단 여기 뉴욕 지부만이 아니라, 아예 손 닿을 수 있는 데까지는 전부 요청했다고 한다.
전례가 없는 규모였다.
심지어, UN 히어로 협회 중앙본부에서는 또 그걸 수락해줬다.
대체 무슨 일 때문에 그러는 건지 궁금해지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엘로힘의 흔적이 나타났다는군."
"...네?"
"지난 번 마력파 사건 이후로, 기묘한 일이 늘었어."
그리고 듣게 된 말은, 상당히 위험한 진실이었다.
"...지난 번의 그 개체가, 돌아온겁니까?"
"그건 아직 모른다고 한다. 전혀 다른 개체인지, 30년전의 대재앙 사태를 일으킨 그 개체인지. 아직 파악된 정보가 너무 없어."
"..."
만약 새로운 엘로힘이라면, 인류가 두번째로 접촉한 개체인 것이다.
자칫하면 두번째 대재앙 사태를 일으킬 수도 있는 것.
만약 한번 더 일어난다면, 정말로 인류의 문명은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퇴보할 지도 모른다.
한서우라는 규격외의 영웅이 다시 한번 더 나타날 수 있으리라는 보장도, 그 한서우가 다시 그 엘로힘을 몰아낼 수 있을 거라는 보장도 없었다.
자칫하면 싸그리 붕괴하는, 두번째 접촉이었다.
"인간의 모습이라더군."
"위장입니까, 아니면 진짜로 그저 인간과 친화적인 겁니까?"
"모른다고 했지 않나?"
잠시 입맛을 다시던 그는 말했다.
"하지만, 해당 개체와 접촉해본 증언자의 말에 따르면...인간에 적대적이라고 볼 수는 없다고 추정하는 중이네."
"그렇군요."
목적은, 해당 개체의 확보였다.
시한폭탄과도 같은, 그러나 그냥 폭탄이 아닌 핵폭탄 수준인 위험을 사전에 진압하자는 뜻이다.
"추적할 단서같은 거라도 있습니까?"
"그럴리가."
"그래서 사람들을 이렇게 많이 끌어들인거군요."
"잘 아는군."
대화는 자연스레 끊겼다.
남아있는 시가렛을 탈탈 털고, 사무실의 문을 닫고 나왔다.
대부분의 히어로 협회 조사인원들이 아시아 대륙 부근으로 파견나간다고 한다.
당연히 나도 파견이다.
불안하긴 해도, 뭐 어쩌겠어.
그래도 덕분에도시냄새 묻지 않은신선한 공기 한번 맛보게 생겼다.
***
"아으..."
골목에서 풍겨오는 악취에 코를 틀어막았다.
고작 도시 바깥으로 조금 걸어나왔을 뿐인데, 거리의 풍경이 완전히 변한다.
사람들이 드물어지기도 하고, 뭣보다 노숙자들이 너무 많이 보인다.
네온 사인 간판같은 것도 있었지만, 도심과는 비교할 바가 못됐다.
화려하고 거대했던 저 안쪽과는 달리, 바깥으로 오면 올 수록 공사장과 낡은 건물이 즐비해있다.
아직 재건축이 완전히 완료되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하긴 도심 중앙에서부터 반나절 가까이 걸어나왔는데, 이제 막 재구축 시작한지 9년된 곳에 있는 도시에 너무 많은걸 기대했나보다.
물론, 도로 하나만큼은 정상적으로 깔려있었다.
갈라져있긴 해도 쓸만은 하다.
"..."
거리에 나돌아다니는 포스터를 하나 주워봤다.
대부분 유흥업소 광고였다.
아시아 내륙지역은 가드가 틀어잡고 있다고 했는데, 설마 가드가 이런 짓을 하는 건 아닐테고.
아직 정부로서의 구조를 갖추지 못해서 치안관리에 애를 먹는건가?
확실히 현실의 라스베이거스도 마피아들이 모여 세금을 피하기 위해 유흥업소를 짓기 시작한 것이 시초였으니...
이 구역도 갱단들이 특별하게 뭉친 곳이라 생각하면 편할 듯 하다.
아마, 가드나 정부 관련 시설은 한참은 나가야 보일 듯 하다.
모스크바, 이전 러시아의 수도.
뭐, 주인이 사라지고 난 뒤에 온갖 세력이 개떼처럼 달려들어도 이상하진 않지.
"답답하네..."
사람 사는 맛이 안나는 동네였다.
*
며칠이 또 지나갔다.
대로변을 걷다보니, 저 앞에 커다란 광장이 나왔다.
물론 타임스퀘어처럼 마천루들이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건 아니고, 그냥 몇몇의 국회같은 건물들이 모여있는 지역이었다.
일반인들은 별로 보이지 않고, 정부 관련 인원들만이 보였다.
군용트럭이 심심하면 오고가고, 주변마다 소총을 들고 서있는 경비인원들도 보였다.
아마 며칠 전까지 있던, 그 유흥의 도시와는 많이 떨어진 모양이었다.
...전초기지같은 개념인건가? 아마 외부의 정부들이, 아시아 내륙지역으로 진출할 때 써먹기 위한 전초기지 역할일 수도 있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이런 군인들 사이에 내가 껴들어가 있으면 얼마나 위화감을 줄 지는 상상할 수 있었다.
주변은 온통 검은색과 군청색의 칙칙한 옷을 입은 어른들 뿐인데, 갑자기 웬 새하얀 꼬맹이가 나타난다?
아무리 무시하려 해도 무시할 수가 없을 것이다.
군중 사이라면 시선이 분산되니까 쉬웠겠지만...여길 지나가는건 무리다.
결국 도심 외곽쪽으로 돌아서 나가기로 했다.
'시간이라면 충분하니까...'
이왕 가는 김에, 주변 구경이라도 하면 더 좋지.
*
"어때, 물건은 마음에 드나?"
"네, 뭐...신기하네요."
후드를 깊이 눌러쓴 할아버지가 말한다.
손 안에 들려있는 물건은, 쓸 수 있는 휴대폰 하나.
9년이 지난 현재의 물건과 비교하면, 지극히 구시대적인 물건이었다.
매점은 상당히 작았지만, 주변에 전자제품 매장이라고는 이곳 한곳밖에 없는 탓에 돈은 잘 벌릴 것 같았다.
"얼마면 될까요?"
"그정도 물건이면, 글쎄다. 500달러 정도면 될 것 같군."
"...비싸네요..."
"그야 이게 아무리 구시대 제품이라고는 해도, 이 근방에서 이정도 구하기는 하늘의 별따기니 말이다."
물론 당연히 저 말은 구라였다.
이 외곽지역에서 조금만 빠져나가도, 도시화된 지역은 수두룩했다. 그런 곳에서는 몇 배는 싸게 살 수 있지만, 하나하나 신분증까지 다 거쳐가며 조사받아야 하니까 나에겐 맞지 않는거다.
하지만 이쪽 근방은 빈민촌이다 보니, 워낙에 등쳐먹는 사람이 많았다. 이 아저씨가 그런 사람은 아닐거라고 생각하자.
뭐, 등쳐먹으면 그때가서 뒤집어 엎으면 되는거고.
적당히 종이쪼가리 몇개 쥐여주고 길을 나선다.
*
길을 가면서 폰을 딸깍딸깍 조작해봤다.
근데뭔가 이상하다.
한번 더 확인사살 하자는 심정으로, 아예 분해 해봤다가 재조립해 보기도 했다.
"...애미..."
그럼 그렇지.
전화빼고는 모든 기능이 다 먹통이다.
심지어 그것도 긴급전화 뿐.
아예 유심칩을 빼놨다.
포장한다느니 뭐니 했을 때부터 알아챘긴 했지만...
아마 그 유심칩 하나가지고 몇대를 돌려먹는 모양이었다.
매장에서 작동시킬때만 정상적으로 작동하고, 갔을 땐 아닌거지.
"풋."
어쩐지, 총을 너무 많이 가지고있다 했네.
따지러 올 놈들한테 대비했던 거겠지.
손끝에서 검은 구체가 떠오른다.
쿠광쾅!
곧이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떨어지는 물건들.
방금 그 매점에 있던 선반이며, 총기며, 제품들까지.
전부 앞으로 떨어졌다.
이제 매점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그저 텅 빈 방 뿐.
꽤나 유치한 복수였지만, 그래도 기분은 좋았다.
조심스럽게 물건을 집어들고선 다시 길을 나섰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