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9화 〉 2부 8. 입이 방정
* * *
도피라는 수단은, 현실에서 벗어나기 위한 환상일 뿐이다.
하지만, 환상이 나쁜 건 아니잖아?
애초에 우리가 사는 현실도 엄밀히 따져보면 환상이나 마찬가지니까.
하나의 뿌리에서 갈라져나온 것들은 모두 제각기 다른 개체인 양 행동하며 우리가 사는 세계를 만들어간다.
이런 얘기는 지금 하기에는 너무 이르니까, 나중에 얘기하기로 하자.
지금은, 시간이 흘러가는 중이다.
몽상에 빠져있다고 시간이 멈춰있는 것도 아니다.
환상보다는 현실을 택한 나로서는, 말이다.
***
어비스를 중심으로 넓게 퍼진 전초기지였다.
사람들은 꽤나 적었다. 사실 연구자들이나 해방자들이나 구성원 수가 다른 집단보다 현저히 적은건 사실이니까.
애초에 해방자들은, 세계의 진리에 한발짝이나마 다가간 자들이었다.
자의가 아니라 타의로 받아들여진 정보이긴 했지만, 그래도 그들은 이 세상이 무슨 꼬라지로 돌아가고 있는지 어느정도는 잘 알고 있다는 말이었다.
소위 말하는 '선구자'에 의해, 인생의 나락에서 거둬들여지고 자신의 의미를 찾은 자들이 해방자들이다.
그러니까, 강제로 그런 진리를 알게 되었다고 해도 딱히 나쁠 이유가 없었다는 말이다.
'아는 것보다 모르는게 더 좋은 진리이긴 하지만 말이야.'
해방자들은 구성원들 부터가 밑바닥 인생들 출신이다 보니 이런건 딱히 신경 안썼나보다.
""
청각이 과도할 정도로 각성되서, 들리지 않아야 할 소리까지 들린다.
머릿속이 울리는 느낌이라 눈을 질끈 감았다.
원하는 소리만 골라듣자.
쓸데없는 잡담들은 빼고, 의미있는 정보들만.
전초기지 자체는 조용하다.
몇명이 두런거리는 소리만 빼면 적막한 분위기였다.
가끔씩 천막 펄럭이는 소리, 쇠 부딪치는 소리, 바람소리만이 들려올 뿐이다.
그 속에서 의미있는 대화를 구분해내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
상대방은 내가 '엘로힘'의 한 개체라고 판단하고 있었다.
이전에 세상을 개판으로 만들었던 그 녀석이 아닌, 다른 것.
목적이 무엇인가.
어째서 직접 넘어온거지?
모습이 저런것도 이해가 안된다. 어쩌면 정신공격의 또다른 일환일지도 몰라.
등등의 추론이 오고가는걸 보면, 내 기원에 대한 가설은 아직 명확하게 확보되지 않은 것 같았다.
일단 윤서아 걔는 확실하게, 처음부터 알아냈을텐데 말이야.
어쩌면 아직 정보가 완전하게 전달된 건 아닌지도 몰랐다.
그저, '확보하라' 라는 명령만 내려왔기에, 내가 엘로힘과 비슷한 존재라는 것밖에는 알지 못했을 수도 있다.
"...맞아?"
근데, 추론만 하는건 지겨워서 그냥 대놓고 물어봤다.
눈앞에 답할 수 있는 사람이 있는데 왜 굳이 머리를 굴려?
하지만 상대방에게서 돌아오는 건 그저 싸늘한 무시뿐이었다.
투덜거려보지만, 아직 충분하지 않아. 뭔가 더 필요했다.
"저쪽에서 넘어오기로 했나?"
"우리보고 직접 가져오라는 군."
음.
사살이 목적은 아닌 것 같네.
날 특이개체라 판단하고 교섭해보려는 듯 하다.
이전에 윤서아랑 대화했던 전적도 있으니, 이전의 그 엘로힘처럼 완전한 미치광이는 아닐거라고 판단한걸까.
그런 것 치고는 대우가 상당히 험했는데...
아마, 그 '엘로힘'과 유사개체라 판단되니 보다 주의에 주의를 기울인 걸 것이다.
음, 그정도 까진 이해할 수 있지.
조금 더 인내해본다.
*
온몸에 구속구를 채우기 시작했다.
밖은 이미 어둑어둑해져 있어, 별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천막 속에 갇혀있는거라 그런지 바람도 느껴지지 않아 답답하기만 했다.
천막 문 너머로 보이는 어비스는 가동 준비를 끝마치고 있었다.
새겨진 마법진을 일단 머리에 쑤셔넣고 봤다.
어비스의 마법진은 암호형태라, 일반적인 마법진의 해독방식으로는 안된다.
상대방이 알려줘야, 비로소 작동할 수 있는거다.
그러니까 내가 아무리 이전에 어비스에 새겨진 마법진의 형태를 모두 안다고 해도, 시시각각 바뀌는 암호에 대응해 알 방법이 없다는 뜻이지.
너무 견고한 체계였다.
이러니 인류가 저거 활용하는 데에만 수년 넘게 걸릴법도 하지.
기다리고 있자니, 밖에서 무언가 실랑이가 벌어진 모양이었다.
바람소리 사이로 고함소리가 섞여들어오기 시작했다.
"지금 연구자들이 누구 아래에 들어와 있는건지 잊은거냐!"
"다시 말하지만, 지금은 우리의 목적이 동일하기에 함께 움직이고 있는거다. 엘로힘이 눈앞에 저렇게 나타난 상황에서, 뭐가 어쩌고 어째? 그냥 너희에게 넘기라고?"
"나도 다시한번 말하지. 저건 특이 개체다. 통상적으로 접근하면 안되는 개체라고. 완전체가 이쪽으로 넘어온것도 수십년 만인데, 또 이전의 그 대재앙 사태를 재현하고 싶은건가?"
'...'
"아."
무언가 엄청난 정보가 튀어나왔다.
생각지도 못했지만, 뜬금없이 튀어나온 말에 알고싶었던 정보를 모두 알게됐다.
뭐, 저 사람들은 아무 생각없이 지껄였겠지.
이래서 입이 방정이라니까.
지금만 봐도, 상대방이 생각없이 말을 저렇게 나불거리니 내가 여기서 이룰 걸 다 이룬거다.
알고싶은 정보는, 방금의 고함소리로 다 알게됐다.
사실 추론만으로도 도달할 수 있는 결론이었다.
근데, 알고 추론하는거랑 모르는 채로 추론하는 건 다르잖아.
정보를 보다 확고하게 하고싶었을 뿐이다.
더이상 여기에 남아있을 필요가 없어졌다.
정리하자면, (신)연구자 는, 해방자들과 일시협력이라는 조건으로 산하에 들어간 듯 했다.
(신)연구자들은, 인간임에도 자신을 연구자라 자칭하는 것들이다.
자신들이 엘로힘을 의지대로 다룰 수 있다고 생각하며, 꼭두각시 신을 만들기 위해 형성된 집단이다.
인간찬가의 극단적인 예시였다.
해방자들은, 비록 방법이 뒤틀리긴 했을지라도 '선구자'의 의지를 이어받아 잔해를 처리하기 위한 청소꾼이다.
좋게 말하자면, 인류의 수호를 위해 뒷세계에서 암약하는 집단이라는거다.
둘의 목적이 상이하게 다르긴 했을지라도, 인류의 존속이라는 중추적인 목적 하나만은 같았다.
그렇기에, 세력이 약해진 (신)연구자들이, 협력을 원하는 해방자들과 동맹을 체결한 것일거다.
"음..."
나로서는 상당히 이해가 안가는 점들 투성이었지만, 인간의 마음이라는게 원래 그런거니까 깊이 생각할 필요는 없나.
저들의 빈약한 동맹은, 결국 엘로힘 개체 본인이, 수중에 들어오고 나니 끊어지고 만 것이다.
솔직히 말해서, 난 엘로힘 그딴게 아닌데. 지들끼리 멋대로 착각하고 있었다.
사실 인간 입장에서 보면 엘로힘이나, 나나 신이나 마찬가지니까, 구분 못하는 건 당연하겠지.
엘로힘은 해당 우주에서 유래한, 믿기 어렵겠지만 '생물'이고, 나는 애초에 본질이 생물이 아니다.
개념으로서 존재한, 보다 '신'과 가까운 존재니까.
지들끼리 착각한 결과물이 이꼬라지였다.
밖을 흘끗 바라보니, 정말 내분이라도 일어난 모양이었다.
'그러고보니...'
몇시간 전에 만났던, 이성주 그 아저씨.
분명 이유리랑 남매다.
이유리에게는 이유나라는 자매도 있다.
어쨌든 이쪽은 상당히 특이한 가정이었다.
이성주는 연구자, 이유리는 해방자.
남매가 쌍으로 갈렸네.
이런 시점에서는, 서로 어떻게 나올까.
아쉽게도 볼 수 있는 기회는 없다.
내가 더 이상 이곳에 남아있을 이유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의자는 처음부터 없었다.
있었지만, 없었던게 됐다.
웃기네 이거.
그냥 천막 밖으로 걸어나갔다.
팔락거리며 방수포 특유의 묵직한 소리가 귓가를 스쳤다.
바람소리가 크게 들려오기 시작했다.
천막속에서 새어나오는 불빛이, 어비스가 설치된 공터를 새하얗게 비췄다.
고함은 잦아들고, 시선은 옮겨진다.
공터의 모든 인원이, 천막속에서 막 나온 나를 향해있었다.
이렇게 많은 시선은 조금 부끄러운데.
신경쓸 필요는 없다.
어차피 여기 모인 모두가 내 '소중한 것'목록에서 존재하진 않는다.
덤벼들면 죽이고, 아니면 뭐.
그냥 가지.
어비스로 다가가 몸체를 한번 쓸었다.
차가운 금속의 감각이 그대로 전해져온다.
콰직!
"끄아아아아아악!"
비명소리가 크다. 연구자인가 보네.
해방자들은 이렇게 추하게 비명같은거 지르진 않는데.
더 이상 당해줄 이유가 없으니, 그냥 치웠다.
손 하나 움직이지 않았으나, 땅속에서 솟구친 검은색의 주둥이는 그 남자의 팔을 통째로 먹어치웠다.
공터는 적막했다.
쿠구구구...
땅바닥에 붉은색으로 발광하는 마법진이 하나 생겨났다.
주위로 검은색의 '마력이 아닌 것'이 일렁거리기 시작했다.
주변 그 누구도 다가오지 못했다.
밤하늘을 한번 올려다보자, 여전히 검게 뚫려있는 구멍이 보였다.
"차근차근 알아나가면 되는 거니깐."
조급해 할 필요 없어.
묵직한 소리를 내며 어비스가 가동됐다.
목적지는, 음...
'대도시.'
다만, 치안은 좋지 않은 곳.
맘 놓고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을만한 곳.
"모스크바가 좋겠네."
내 몸에서 뿜어져나온 '마력이 아닌 것'에 의해 가동된 어비스는 몸을 전이시키기 시작했다.
그때까지 주변에 서있는 인간들은 단 한마디도 뻥긋하지 못했다.
귀여운 광경이었다.
***
"단서 없음... 아무것도 없어...못찾아...그만좀 갈궈..."
"닥쳐봐 마스. 제발. 이거 진짜로, 심각한 사항이란 말이야. 없어도 만들어 내! 쥐어 짜내란 말이야!"
퇴역 후 기자로 전직한 이후에 이 정도로 힘든 일이 있었을까.
성화연 얘는 갑자기 또 뭔 바람이 불었는지, 날 아예 처음부터 갈구고있다.
있는정보 없는정보 다 쥐어짜내 이전에 만났던 소녀에 대해 알아내려 하는 성화연의 모습은 광기라 표현해도 부족함이 없었다.
"살려줘..."
한서우가 있었다면, 성화연 다루는 것 쯤은 일도 아니었을텐데.
오늘도 한명이 이렇게 열정페이를 당하는 중이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