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8화 〉 2부 7. 해방자와 연구자
* * *
끼익...
주점 내부는 어두웠다.
장마철이라 그런건지, 밖에서 끝도없이 쏟아지는 비에 하늘이 어둡게 물들었기 때문이다.
사람은 거의 없어서, 구일 오빠 혼자 테이블을 닦는 모습만이 보였을 뿐이었다.
노란빛의 분위기있는 조명이 은은하게 주점 내부를 밝히고있었다.
내가 들어오는 소리를 들은건지, 우산을 탈탈 털고있는 나에게 구일오빠가 말을 걸어왔다.
"원하는 건 찾았어?"
평소라면 그냥 넘겼을 말이지만, 오늘따라 꽤나 아프게 들려왔다.
"...윤서아, 괜찮은거냐?"
테이블 닦는 소리가 멈췄다.
벽에 걸어둔 커다란 TV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소리가 들려왔다.
"...엘로힘이었어요."
"뭐?"
"제가 찾던게, 엘로힘이었다구요."
"...그게 무슨 말이야?"
나 혼자만 알고 있어도 되는 사실은 아니었다.
순전히 추론에 의해 나온 결과이긴 하지만, 현재로서 가장 합리적인 가설은 이것밖에 없었다.
나에게만 그 소녀가 그렇게 깊숙하게 남아있던 것도, 마수와의 종전 이전 3년간의 기억이 모조리 모호한것도.
전부 다, 그 여자애 하나 때문이었으니까.
"사람들 모아요. 아무래도, 엘로힘 본인이 직접 넘어온 것 같아요."
***
기지를 여기저기 둘러본다.
어째서 이런 뜬금없는 곳에 이런 대규모의 주둔지가 세워져있는지는 모르겠다.
다른 이들이 왔다 간 흔적은 없는 거 보니, 아직 정부는 사태파악을 못하고 조사단을 파견조차 못한 것 같았다.
덕분에 서류더미나 자료같은건 그대로 남아있어, 다행히 정보파악은 보다 쉬워질 듯 했다.
"끄응..."
그렇게 생각했건만, 가장 기본적인 문제에 부딪치고 말았다.
도대체 뭔 짓을 하고 있었던건지는 몰라도, 컴퓨터에 있던 자료든 책장에 쳐박혀있던 자료든 죄다 암호화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잔해가 일으킨 정보오염 탓인가?
만약 그런거라면, 내가 해독 가능할 터였다.
하지만 이건 그냥 군부대 자체에서 쓰는 암호문인 모양이었다.
해독불가.
입맛을 쩝쩝 다셨다.
내가 알고 있는 건, 과거의 정보들만이 전부.
과거의 정보에 한해서라면 이 세상 그 누구보다도 정확하게, 완벽하게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군부대의 암호는 수시로 바뀌기에 불가능.
결국, 정보들이 이 앞에 널려있는데도 내가 알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는 소리였다.
컴퓨터에 다가가서 자판을 몇번 두드려줬다.
부품들이 망가지고 전기가 끊겨서 그런건지, 모니터조차 제대로 켜지질 않았다.
이런 건 딱히 문제 없어.
뜯겨진 마공학 장치는 일단 내 마력으로 해결하고, 전기같은 에너지원도 몸에서 모두 공급 가능.
모니터가 푸른빛을 내며 켜졌다.
당연하게도 암호가 있었으나, 적당히 우회해서 침입했다.
네트워크는 끊겨있으니 본부쪽으로 신호가 가는 일은 없을거다.
탁, 타닥.
의자에 앉아 키보드를 두드렸다.
컴퓨터에 담겨있는 정보는, 프로그램 코드 자체로만 보면 암호였으나 열기 위한 프로그램 자체에 해독 기능이 있어서 알아보는건 쉬웠다.
"으음..."
책상을 탁탁 두드렸다.
천막 밖을 바라보니 여전히 그 거대한 산이 하늘을 찌를 듯 높이 솟아있는 모습이 보였다.
안개에 가려 꽤나 음산한 분위기를 풍기는 중이었다.
지금 내가 열어 본 이 파일은, 말하자면 보고서인 듯 했다.
읽다보니 딱 9년전의, 내가 용병으로서 제 24구역에 파견나가기 직전 보았던 그 거대한 산이 떠올랐다.
화면속의 파일에서도 내가 떠올린 것이 틀리지 않았다는 듯, 해당 산이 생겨나기 시작한 시점은 10년도 전의 일이라고 말한다.
당시 안전구역에서 간간이 떠돌던 소문이야 나도 알고 있었다.
아무것도 없던 땅에, 거대한 산이 생겨난다는 괴담.
마치 무언가를 쫓아가듯, 끊어지는 일 없이 연속적으로 생겨난다고 했다.
당시에는 듣고 이게 뭔 재미없는 이야기냐며 그냥 넘겼지만, 이렇게 군부대까지 파견된 걸 보면 마냥 낭설은 아니었나보다.
"꼭 뱀같네."
위성사진도 첨부되어 있었다.
저궤도 위성인 듯, 지상의 사진은 그 굴곡도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엄청나게 선명했다.
사진은 두개였다.
위성에서도 보일 정도로 거대한, 검붉은색의 기하학적인 덩어리가 자리잡은 것.
그리고 그 주위로 파동이 퍼져나가듯이 솟아오른 산.
"허 참..."
저 검붉은 덩어리가 뭔지는 알고 있었다.
크로체잖아 이거.
이어지는 사진에서는 내가 크로체와의 전투의 여파로 만들어냈던 거대한 충격까지 생생하게 느껴진다.
해당 위치에서만 구름이 증발한듯 사라져있다.
'저렇게까지 격렬하게 싸웠던가...'
당시에는 제정신이 아니었던 모양인지라 기억은 흐릿했다.
저 시점에는 코어도 없었을텐데, 저렇게까지 일을 벌렸네.
"원래라면 찍힐 일도 없었겠지만."
위성사진이 찍힌 타이밍이 너무나 절묘했다.
아마 며칠만 늦게 찍었어도, 헤일로 공명 현상에 의해 검은 돔밖에 찍지 못했을거다.
이 일이 일어나기 몇 주 전에, 내가 처음으로 받았던 그 의뢰에서 마수들을 쓸어버려, 잠시일 지라도 헤일로 형태, 즉 고리 형태를 파괴한 것이 이런 사진을 찍을 수 있게 해주었을 것이다.
아마 이 시점에 내부를 엄청 찍어뒀을 거다.
아무튼...
두번쨰 사진을 바라본다.
크로체가 만들어낸 검붉은색의 기하학적인 덩어리를 중심으로, 파동이 퍼져나가듯 솟아오른 산의 사진.
이 사진은, 전쟁이 끝난 이후 찍은 사진인 듯 보였다.
크로체의 그 덩어리는 흔적만이 간신히 남아있고, 그저 산뿐만이 선명하게 보였다.
꽤나 아름다운 모양새였다.
뱀처럼 길게 이어지는 그 산은, 거대한 원을 그리고 있었다.
아직까지도 솟아오르고 있는 중인 듯, 불완전한 원의 모양이었다.
사진의 추세로만 본다면 완성되는 날이 머지 않은 듯 했다.
민간에게는, 이런 정보를 숨기기로 한건가?
하긴 아직 아시아 대륙 내부쪽은 민간인이 들어오기엔 무리가 있으니까, 숨기는게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겠지.
들어온다고 해봐야 초상능력자들 풀어서 잡아오면 되는 거고.
민간인 시점에서 생각해본다면 음모론적인 이야기였다.
살아있는 산이 있꼬, 그 주변은 군대가 통제하며, 정부는 그것을 발견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 민간인의 출입조차 막는다.
꽤나 재밌는 이야기가 될 것 같았다.
"..."
부스럭
천막 밖으로 나와 밤하늘을 올려다봤다.
거시공동이 하늘 저 한가운데에 자리잡은 모습이 보였다.
저 현상과, 이렇게 산이 솟아나는게 무슨 연관이 있는건가?
지금 당장 저 산에 무슨 조치를 취해야 하는건가.
하지만 어떻게? 난 저 산이 무엇을 위해 솟아오르고 있는건지조차 모르는데.
마법진을 그리는건가 생각해봤지만, 그렇다고 생각한다면 완성되기까진 아직 수십년도 더 남았을 것이다.
지금 조치를 취하기엔 너무 이르다는 말이다.
"기다려야 하나..."
너무 조급해하진 말자.
만약 그런거라면, 차고 넘치는게 시간이니까.
철컥
"...?"
가만히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던 내 머리 뒤로, 총구가 들이밀어졌다.
"너 뭐냐?"
남성의 목소리다.
중년인 듯 했다.
사실 여기서 머리에 총맞고 죽어봤자, 다른 곳에서 눈 뜰 일밖에는 더 없다.
상대방의 요구에 따라줄 이유도 뭣도 없다는 것이다.
다만, 호기심이 동했다.
지금 이 시간에, 왜 여기서, 만난 상대에게 처음부터 이렇게까지 적대적으로 대하는걸까?
상대가 어린아이임에도 말이다.
"손 들고 뒤 돌아. 천천히."
상대방이 하는 언어는 러시아어 였으나, 중간중간 느껴지는 특유의 억양으로 한국인임을 간파할 수 있었다.
천천히 뒤를 돌아, 상대방을 올려다봤다.
"이름."
"..."
누군가 떠오르는 얼굴이었다.
이전에 비슷한 사람을ㅡ
파악!
"끄윽..."
무릎으로 찍어 내렸다.
한층 더 행동이 과격해져서, 이젠 아예 이마에 총구를 내려 누르고 있었다.
"너 누구냐고 이새끼야."
상당히 기분이 더러운 행동이었다.
알아서 정보나 헌납해줬으면, 편했을텐데.
"큭?!"
눈치챌 틈도 없었을거다.
둘의 정보를 뒤바꿔, 총을 쥐고 올라타 있는 쪽을 나로 바꿨다.
순식간에 올라타 있는 사람과, 아래 깔려있는 사람의 위치가 변했다.
상대방도 이해 못한 표정이었다.
"...뭐...."
"입 닥치고, 묻는것만 답해."
"..."
마력이 아닌 이질적인 것이 주변에 퍼진다.
상대방은 반격해보려 곧장 다리에 힘을 쥐고 일어서려 하지만, 총구의 방향을 뒤틀어 허벅지쪽으로 한발 쏴줬다.
딱히 비명은 지르지 않았다.
이쪽 방면으로 훈련된 사람인건가?
"이름이 뭐에요, 아저씨?"
상대방은 금방 자신의 처지를 파악했다.
이상할 정도로 빠르게, 저항을 멈췄다.
"..."
"이름."
"이성주."
"이성주요?"
"그래."
"이 근처에, 동료같은건 있나요?"
"...너...."
질문을 하며 머리를 정리해봤다.
이성주, 분명 어디에선가 알아본 느낌이다.
본래 루시였을때의 내가 가지고있던 정보는 아니다.
오히려, 나와 만났던 사람이 가지고있던 '과거'의 정보였다.
다시 말하지만, 이 세계의 과거에 한해서, 정보는 명확했다.
"아."
문득, 이름 하나가 떠올랐다.
"이유리."
깔려있는 남성의 표정이 변화한다.
일그러짐이라고 표현하는 게 맞을 것이다.
긍정적인 쪽은 아니었다.
"넌 대체 정체가..."
이성주가 뭐라고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연구자들이구나."
무시하고, 그저 할말만 한다.
"자신들을 연구자라고 자칭하는 인간들."
(신)연구자.
이곳을, 정부가 진입하지 못하게 봉쇄하고 있는 쪽은 그쪽인 듯 했다.
어쩐지 정부가 행동이 너무 늦는다 했더니, 방해물이 있어서였구나.
어째서 이 근방에 (신)연구자들이 있는거지?
정보를 좀 더 캐내봐야겠다.
"끄으윽!"
갑자기 이성주가 비명을 질렀다.
다리를 적시는 감각에 이성주의 허벅지쪽을 바라보니, 피가 너무 많이 나온다.
허벅지쪽에 동맥이 자리잡고 있었다는 사실을 깜빡했다.
더이상 내 신체는 인간과 같지 않다보니 일어난 착각이었나봐.
"얌전히 있어."
다시 한번, 총알이 찢고 나간 피부와 근육과 혈관들의 위상을 변화시킨다.
일단은, 분자수준에서 좌표를 변경시키는 거니까 결합은 제대로 될것이다.
삣,삣,삣,삣.
마력이 아닌 것들은 널리 퍼져나갔다.
일정 수치를 넘어간 계수기가, 알람을 내보내기 시작했다.
"...?"
정확히 이성주가 입고있던 회색 자켓의 가슴부분에 달려있던 장치였다.
그 계수기가, 내가 일정수준 이상의 힘을 사용하자 울리기 시작한거다.
"...너...!"
이성주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푸걱!
이성주의 얼굴 위로, 피가 흠뻑 적셔졌다.
내 가슴에서 뿜어진 피였다.
가슴속에서 튀어나온 손에는, 새하얀 심장이 들려있다. 보석의 형태를 한 심장이.
"...?"
어차피 죽어봤자, 붙잡힐 일 따위 없다.
또 점멸현상이 일어나며, 지구 어딘가에서 눈뜨게 되겠지.
귀찮게 진짜.
막 재밌어지려는 참이었는데.
누군지 확인이라도 하자는 심정으로 뒤를 돌아보니, 웬 여자 한명이 보였다.
하지만 어쨰선지, 얘는 해방자 소속이다.
"허...?"
해방자랑, (신)연구자랑 왜 같이 있는거지?
의문은 해결하지 못했다.
온몸의 힘이 스르르 빠져나가며, 점멸하려던 참이었다.
푸욱!
목으로 주삿바늘이 찌르고 들어왔다.
심장을 뽑은 뒤에, 곧장 목에 주삿바늘을 쑤셔넣는다, 라.
정상적인 인간이라면 할만한 발상은 아니었다.
목 속으로 비집고 들어오는 건, 각성제였다.
의식을 끝없이 자극시킨다.
뇌가 없음에도, 막상 각성제의 효과는 그대로 받았다.
죽지 못했다.
"..."
상대방은, 나에 대해 알고 있었다.
해방자가 한국에서 날 발견한 뒤로, 전세계에 퍼져있는 조직원들에게 지령을 뿌린 모양이었다.
"영악하기는."
푸확!
가슴속에서 팔이 빠져나가며, 다시금 대량의 피가 뿜어져나왔다.
이성주의 몸을 내 피가 가득 적셨다.
각성제의 영향인지 호흡이 가팔라졌다.
"...일어나."
땅바닥에 널브러진채 헐떡이는 날 내버려두고 여자는 이성주에게 다가갔다.
여자가 두건을 벗자 보이는 얼굴은, 이유리의 그것이었다.
"일부러 확인될 때까지 기다린거야?"
"..."
"아무튼, 저거 정체 파악 됐지? 어제 퍼진 그 정보속의 여자애랑 판박이야. 쟤 확실해."
여자는 어깨에 날 들춰맸다.
목에 꽃힌 주사기가 내 움직임을 따라 덜렁거렸다.
두렵지는 않았다. 오히려, 꽤나 흥미로워졌다.
이유리는 날 들춰맨 채, 이성주와 어딘가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이렇게 날 들고 가는걸 보면, 적어도 찢어죽이는게 목적은 아니라는 건 알 수 있었다.
잘만 하면 새로이 정보를 얻을 수도 있었다.
그리고 날 짐짝처럼 들춰메고 움직이기 시작한지 얼마나 지났을까. 저 앞에 어비스를 중심으로 형성된 해방자들과 (신)연구자들의 전초기지가 보이기 시작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