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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해주세요, 마수님!-76화 (76/162)

〈 76화 〉 2부 5. 심연

* * *

일어난 일은 잊혀지기 마련이고, 일어나지 않았던 일은 부풀려지기 마련이다.

모든 것은 무언의 해석을 거쳐 수정된 형태로 뇌리에 들어온다.

진실을 똑바로 직시하는 것들은 없다.

언제나 과거라는 필터에 사로잡혀, 과거에 필터링 된 현재의 모습을 머리에 담는다.

진실된 현실을 살아가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

*

생각을 멈추면 안된다. 끝없이 생각해야 한다.

한순간이라도 자신이 존재한다는 걸 망각하는 순간 일은 돌이킬 수 없게 된다.

나에게 가치란 인간의 가치 그대로이고, 상위차원같은 것의 가치를 이해할 리가 없다.

죽었음에도 머리는 계속 돌아간다.

세상에 존재하지 않음에도, 세상으로부터 기원한 생각을 끊임없이 이어간다.

근원의 끈을 놓지 않았다.

그래서 다시, 이곳으로 돌아올 수 있는거다.

한순간 빛이 비춘다.

멍하니 일어나주변을 둘러보니 여기저기 망가진 도서관의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일단 책속에 들어있던 언어들은 한글이었으니, 적어도 대한민국 근처는 될 거다.

날씨는 여기도 꽤나 맑았다.

구름 한점 없이 파란 하늘이 보인다.

마음을 맑게 해주기에는 충분했다.

콘크리트 냄새가 섞인 차가운 공기가 들어왔다.

대도시에 있다가 이런 폐허로 와보니, 또 느낌이 색다르다.

옛날에야 질릴 정도로 있던 곳이었지만, 요즘엔 이런 곳이 점차 적어지는 추세라고 했다.

아마 미개척지겠지.

한반도 북쪽부분의 변두리 지역 같은 곳일 것이다.

사람이 없어서 공기가 이렇게 맑은 듯 했다.

아마 밤이 되면 하늘에서 쏟아져 내릴 듯한 은하수를 볼 수 있을 것이다.

"..."

일단은, 앞으로의 일을 생각해야겠지.

사실 내 목표와 해방자들의 목표가 비슷하긴 하다.

하지만 그런곳에 들어가기에는 역시나 거부감이 든다. 아마 그런곳에 들어갔다간 너무나 어두운 분위기에 진저리를 칠 지도 모른다.

애초에 인생의 나락까지 빠져든 사람들만 모인 집단인데, 분위기가 정상이면 그게 더 이상한거 아닐까?

아무리 위탁할 곳이 없다고 해도 그런 음습한 곳엔 들어가기 싫다.

기분나빠.

어쩌면 정부나 가드같은, 공공적인 기관에 위탁할 수도 있다.

다만 그러기엔 내 근원이 너무나 수상쩍기도 하고, 그들이 '잔해'같은 개념들을 이해할 리가 없잖아.

해방자들이 정부와 척을 진 이유도 정부쪽이 '잔해'라는 개념을 이해하지 못한 것 때문일거다.

아마 정부의 눈에는 해방자들이 무고한 민간인들을 학살하는 것으로밖에는 보이지 않았을거다.

사실 그들이 이면의 개념에 오염되어 미쳐버린 짐승일 뿐이라는 걸 깨닫지 못하고.

시작부터 꼬인 인연이었다.

해방자들은 누군가의 인정따위를 바라지 않는다. 누군가를 이해시키려 하지도 않고, 그저 자신들의 역할을 한다.

그렇기에 대화가 되질 않는거다.

자신들이 하는 일이 뭔지, 정부에게 알려주질 않으니 상황이 이렇게까지 치달은거다.

애초에 공공의 적을 만들어 사람들을 규합하려는 정부의 잘못도 있긴 했지만.

"복잡해 뒤지겠네 진짜."

다들 생각이 너무 깊다.

물론 나야 생각을 멈추면 안되는 입장이기에, 상대방이 복잡하게 행동해서 생각할 거리를 늘려주면 좋기야 했다.

그래도 진실을 아는 다른 사람들 입장에서는 이게 뭐하는 시츄에이션인가 싶을거다.

단순히 대화가 안되서, 상황이 여기까지 치달은 걸 알기만 하면 될텐데 말이야.

물론 나는 그 둘중 어느 한곳에도 들어가지 않을거니까, 상관은 없겠지.

목적이 같으면 외부 세력으로서 해방자들과 '협력'할 수는 있을거다.

완전히 위탁하는게 아니라.

"으음..."

'가드'는 어떨까.

이전에 이미 한번 위탁해봤던 곳인데.

지금 가드는 정식적으로는 민간군사기업이다.

하지만, 공공연하게 이미 준정부 조직으로 여겨지고 있는 중이었다.

기업국가라는게 딱 가드를 두고 지칭하는 말 일거다.

치안이 개판이라 아직 힘을 회복중인 강대국조차 진입하지 못하는 아시아 내륙지역에 자리잡은, 명실상부한 최대의 무력집단.

지역 안정화를 위해 건설사업이나 도로사업등 여러 일을 벌리고 있다고 하긴 하지만, 결국에 본질은 용병이다.

PMC인 만큼 민간에 공개된 정보도 적기에, 과연 제대로 찾아갈 수 있을련지는 의문이다.

"..."

...굳이, 어느 집단에 들어가야 할 필요가 있을까.

방금 전 윤서아처럼 굳이 내가 만나려 하지 않는 이상에서야, 날 건드릴 수 있는 사람도 없을텐데.

이건 뭐, 나중에 생각해봐도 되려나.

자리에서 일어나 여기저기 쓰러진 의자와 책상들을 정리했다.

먼지가 수두룩하게 쌓여있었기에 정리해도 별달리 깨끗해보이진 않았다.

거대한 중앙도서관의 홀 내부로 들어오는 햇빛을 의지하며 책을 꺼내들었다.

생각을 멈추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책만한게 없었다.

책읽으니까, 오랜만에 옛날 생각도 조금 나고.

팔락, 거리며 페이지가 넘어가는 소리가 도서관 내부에 가득 울려퍼지기 시작했다.

*

"...너 지금 장난하냐?"

"아니, 너도 영상 봤잖아! 그 상황에서 이미 정황은..."

"그럼 애 시체는 대체 어디간거냐?"

우산 위로 비가 후두둑 떨어지는 소리가 들린다.

고여있는 물웅덩이에, 네온사인의 빛이 반사되어 비친다.

살인사건이라는 보고를 받고, 곧장 경찰력을 동원했다.

하지만 막상 현장에 도착해보니 보이는 거라고는 그저 아무일도 없었다는 듯 적막한 골목 뿐.

영상을 받아봤을때는 기겁할 정도로 놀랐는데, 놀라울 정도로 아무 일도 없었던 거다.

"주변 길거리들 CCTV 전부 다 뒤져봤는데도, 누가 시체 끌고가는 장면같은 건 없었어. 심지어 이런 도심 한복판에서 그딴 짓을 했다간 바로 걸릴거고."

"그럼...대체..."

영상속의 여자는 후드를 깊게 눌러쓰고 있어, 머리칼이 노란색이라는 것 밖에는 알지 못한다.

하지만 하얀 후드티 위로 짙게 밴 핏자국들은 분명 그냥 넘어갈 수 있는 양이 아니었다.

디자인이라고 생각하기에도, 이미 이전에 골목으로 들어간 영상이 찍혔기에 말도 안되는 일이었고.

"그 여자애 이름은 몰라?"

"...안타깝게도."

"저번에 만났을때, 왜 이름은 안물어본거야?"

마스가 한숨을 푹 쉬며 말한다.

"나야 그때 상황이 워낙 갑작스러웠으니까... 심지어 본인조차 모르는 것 같았는데."

"자기가 자기 이름조차 모른다니..."

사건이 뭔가, 굉장히 기묘하게 흘러간다.

정황증거는 확실한데 물적 증거가 없다.

그 새벽녘에 골목으로 들어갈 만한 사람은 없었다.

단지 그 둘만 들어갔다.

그러고서는, 한명을 제외하고 나머지 한명이 피를 흠뻑 뒤집어 쓴 채 나왔다.

본인은 아무런 피해가 없는 듯, 거동에 지장은 없는 듯 보였다.

아무리 봐도 그 한명이 다른 한명을 살해했다는 결과밖에는 나오지 않잖아.

"그러고보니 그 여자애도 이상해. 골목에 들어갔는데, 나오는 장면은 한번도 찍히질 않았다니."

마스가 정곡을 찔렀다.

이번 사단이 그냥 넘어갈 수가 없는게, 피해자조차 증발하듯 사라졌기 때문이다.

CCTV는 분명 소녀가 이 골목으로 들어왔다고 말하고 있었지만, 나갔다고는 말하지 않았다.

하수도조차 일정 간격으로 감지센서가 부착되어있어, 쥐라면 몰라도 사람이 지나가면 어떻게든 알아차릴 수밖에 없는 구조다.

"실종신고라도 해야하나..."

"보호자도 없고, 신분도 없어. 아마 등록 되도 제대로 조사될 가능성은 없을거야."

"하여간, 그놈의 인력부족 진짜..."

개인적으로 초상능력을 써서 조사해볼까?

골머리를 앓고있던 그때, , 그 소녀와 만났을 때의 기억이 갑자기 떠올랐다.

"...어라."

"왜 그래? 또 뭐 알아낸 거라고 있어?"

경찰차가 내는 불빛이 골목 속으로 들어왔다.

바깥의 네온사인과 어우러져, 음산한 빛을 만들어낸다.

"그러고보니 그 여자애...뇌파가 따로 안느껴졌는데."

"뭐?"

"...몸에 생명활동이 없었다고."

"그게 뭔 개소리야."

난 대답 대신, 그저 가만히 땅바닥 한가운데 부자연스럽게 파여있는 구덩이를 바라보고만 서있었다.

***

"끄응..."

너무 오랫동안 책 속에 고개를 쳐박고 있었더니 허리가 분질러지는 느낌이다.

한번 기지개를 켜자 몸 구석구석이 시원해졌다.

막상 몸속에는 심장을 제외하고선 어떠한 장기도 없는데 몸은 아직도 장기가 있던 시절의 그 느낌을 기억하는 모양이었다.

밖은 벌써부터 어둑어둑해지고 있었다.

"별은 볼 수 있으려나..."

아마 도심쪽에서 멀리 떨어진 곳이다 보니, 가능은 할꺼다.

차가운 공기는 당연히 맑았다.

20년 전인가, 30년 전인가.

대재앙 사태때, 마수를 막기 위해 이곳에 떨어뜨린 핵폭탄에서 분출된 방사능들도 이미 모두 사라진 뒤였다.

"...흐음."

책을 읽으며, 흥미로운 사실들을 꽤나 많이 알게됐다.

거시적으로, 전체적인 흐름만 본 것이 아닌 각자의 국가나 사람에 대한 것들을 알게 된거다.

그 중에는 대한민국이 어떻게 대재앙 사태때 살아남을 수 있었느냐 라는 주제도 있었는데, 결론만 말하자면 좁은 영토에 많은 인구 떄문이다.

많은 인구덕에 초상능력자들도 충분했고, 좁은 영토덕에 지켜야할 전선도 줄어든 탓이다.

당연한 사실이었다.

당연한 사실임에도, 글로 읽을 떄는 왜 또 이렇게 흥미로운 건지.

그런 생각이나 하며 도서관 밖으로 나섰다.

시원한 공기다.

팔을 쭉 뻗으며 밤하늘을 올려다봤다.

"...어라."

그러다가, 별들을 보았다.

밤하늘이 쏟아질 듯 저 위에 있는게 보였다.

그 쏟아질 듯한 별하늘 한가운데에,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거대한 검은 구멍만 없었다면 분명 멋진 광경이었을 터다.

"뭐야 시발."

별들이 쓸어낸 듯 사라진 광경을 보고, 나는 그만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엘로힘을 집어삼키며 얻어낸 지식들조차 현재의 상황을 해석하지 못하고 있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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