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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해주세요, 마수님!-73화 (73/162)

〈 73화 〉 2부 2. 포맷

* * *

"정말로 더 필요한거 없니? 아무것도?"

어딜 봐도 어른이 아이를 대하는 듯한 태도다.

아무리 봐도 친구를 상대로 대하는 태도라고 볼 순 없었다.

알고 있었지만, 막상 실제로 눈앞에서 보니까 더 뭣같은걸. 어딘가, 가슴 한켠이 뭉텅 잘려나간 느낌이었다.

근데, 뭔 상관이야.

어차피 다 끝났으니, 이제부터라도 인연을 쌓아가면 되는거지.

겨우 이런거 가지고 다 끝났다 말하기에는 시간이 너무나도 많이 남아있었다.

원하는 바도, 목표도 이뤘으니 이제 더이상 이곳에 남아있을 이유는 없다.

"실례했습니다..."

"응? 아니, 조금 더 있다 가도 되는데..."

그럴 순 없다며 손사레치기를 몇 번.

그제서야 성화연은 날 보내준다.

사무실에서 커피를 몇잔 마셨더니 벌써부터 뱃속이 아려오는 느낌이다.

예전처럼 토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음식이란게 먹으면 먹을수록 더 거북해지는 느낌이었다.

인간의 몸이 아니라서 그런건가? 마수의 내장들은 전부 교체했을텐데 말이야.

어쩌면, 엘로힘이 따로 들어가 있어서 그런건지도 모르겠다.

"으음.."

사실, 기억을 잊는다는게 그렇게 완벽할 수는 없다.

애초에 자연스러운 수정 과정도 없이 그냥 지우개로 지워낸 것처럼 세계의 기록에서 싸그리 날려버렸는데, 위화감을 느끼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

적어도 몇몇 이들에겐 꿈이나 운명같은 추상적인 것들로 남아 그저 배경처럼 자리잡아있는게 전부였다.

날 소중하게 생각하거나, 인생에 특별한 의미가 있는 사람이었다면 조금 더 명확한 힌트로 남아있을 수도 있지.

하지만, 결국에 그 사람들도 그게 뭔지는 깨닫지 못할 거다.

그냥 인생의 맥거핀 같은 거니까.

세계의 기록을 수정하면, 몇몇 인간의 뇌리에는 그 수정 기록이 남겠지.

성화연은 아무래도, 기억하지 않기를 더 원한 것 같았다.

그 어떤 위화감도 없이 그저 평범하게, 아주 잘 살아가고 있었으니까.

사실 성화연을 탓할 일은 아니다. 내가 겪은 일을 주변의 누군가가 당했다고 생각하면, 심지어 그것도 눈앞에서 바로 직관했다면 그 끔찍한 기억이 머릿속에서 마구 소용돌이 쳤을테니까.

일종의 외상 후 스트레스 증후군 같은 거다.

내가 성화연에게 소중한 사람이라 해도, 기억이 잊고싶은 기억인 건 마찬가지다.

날 기억하고 싶은데, 내가 겪은 일은 기억하기 싫은. 그런 모순적인 상황인거지.

탓할 필요 없다.

뭐든 당연한거였다.

애초에 사람이란 다 그런거니까.

오히려 잊지않고 다 받아들이자고 결심한 쪽이 대단해서, 칭송받아 마땅한 인간인거지.

정신력이 보통이 아니라는 뜻이니까.

기억하는 쪽이 대단한거고, 기억하지 못하는 쪽이 당연한거였다.

"...그래도, 뭐...."

잘 살고 있었으니까.

한번뿐인 인생, 우울하게 살아서 뭐해?

행복하기만 하면 된거 아닌가?

한 번, 수년 정도 나쁜 일 겪었다고, 사람이 평생 우울해지는 게 이상한거지.

그런 사람을 보면 음침해서 기분 나쁘다.

나도 그런 쪽이려나?

아니길.

"..."

반짝거리는 홀로그램 광고판에서 기능도 모를 신제품 광고가 나온다.

녹색의 눈 속엔 보라색이 섞여들었다.

잔잔한 발라드 음악이 흘러나왔다. 분위기 좋네.

느긋하게 웃으며 거리를 유랑하기 시작했다.

이곳에서 난 이방인이니까.

모든게 새롭지.

모든 게 새로울거다. 난 이곳에 처음 오는거다.

평생 단 한번도 본 적 없는 곳이야.

언제나 새로운 건, 새로운 감정을 불러오기 마련이다.

그 사실만은 기분이 좋았다.

'딱히 우울하게 살 필요 없으니까.'

너무 진지하게 살아서 뭐 해?

그냥, 여유롭고 느긋하게.

모든게 다 끝났으니, 그렇게 살아가면 되는거지.

쓸데없이 분위기나 잡으며 무겁게 나가는건 꼴보기 싫다.

난 꼴보기 싫어 보이고 싶지는 싶다.

머리 위에서 빛나는 별들은 보이지 않았다.

시선도 느껴지지 않아서, 완전한 자유였다.

좋았다.

***

"..."

방금 나간 소녀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어디 기관에라도 맡겨야 하는거 아닌가 걱정했지만, 본인이 필요 없다고 한다.

이름도, 부모님도 없고, 지인도 없고, 주변에 아무도 없었다.

평소라면 의사따위 상관하지 않고 저런 모습이라면 강제로라도 보육원으로 데려갔을 것이다.

하지만, 저런 모습임에도 그냥 보내준건 어째선지 저 아이가 그럼에도 잘 살아남을 것 같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물론, 다른 사람이 들으면 미치고 팔짝 뛸 일이었다.

겨우 본인의 판단과 직감만 믿고, 저런 어린아이를 아무런 도움도 없이 그냥 보내준다니?

여기까지 생각이 닿자, 갑자기 후회가 들기 시작했다.

"미치겠네..."

쫓아가야 하나?

하지만 굉장히 눈에 띄는 외모였다. 적어도 어딘가에 숨기 적합한 외모는 아니니까 주변인들 몇명만 끌어들여서 찾는다면 금방 찾겠지.

"으음..."

근데, 이 느낌은 뭘까?

설명할 수 없는 느낌이었다.

비어버린 과거의 한 순간이 채워진 느낌이 문득 들었다.

충족감과 비슷한 감각이었다.

"나도 이상해진 것 같네."

통신기로 마스에게 연락을 했다.

­"여보세요?"

"너 지금 뭐하냐."

­"나? 나야 지금 기사쓰고 있지. 왜, 또 뭐 따로 조사할 일이라도 있어?"

"너 서울 주변 카메라들 접속 권한은 있지?"

­"당연하지, 내가 누군데."

전 장교였으니, 관습적으로는 가지고있을 법도 하다.

합법은 아니었지만.

"혹시 여자애 하나 찾아줄 수 있어? 팔 하나 없는 하얀색 여자애."

일단은, 마음속에서 싹트는 이 걸림돌부터 걷어내기로 했다.

***

신이라는건 보통 상징물이 있기 마련이다.

왜, 그렇지 않아?

보통 매체물 같은거 보면 신이라는 것의 신체 일부가 전혀 연관없는 모양으로 나오는 거 흔하잖아.

그런게 당연한거다.

원래, 인간의 신체 일부라는 틀에박힌 모양을 쓸 필요 없이, 상징물로서 대응하는게 3차원에서의 신의 신체의 일부이니 말이야.

근데 알다시피 난 원래 인간이다.

엘로힘에 의해 3차원 생물의 형상을 갖게 된 신의 심장은 과연 어떤 것이었을까?

아마, 보석과도 같은 형태였겠지.

한서우의 검은 그 보석이 가공된 형태였다.

그리고, 지금 내 몸속의 우주에서 뛰고있는 심장이라는 것도 분명 보석의 형태였다.

심장이나 내장같이 정확한 형태면 너무 그로테스크 하잖아.

더이상 피같은거 보기 싫은데.

아무튼, 뭐.

팔면 돈이라도 나올까?

어차피 본질이 재생이니, 그 보석마저도 심장의 제 기능을 잃은 채 그냥 빛잃은 돌덩이로 변하고 말겠지만.

물론 내 몸속에서 적출하고 난 직후에는 마력의 용광로일 것이다. 아마, 지구 전체가 1세기 넘게 쓰고도 남을 마력이 심장에서 끝도없이 분출될 것이다.

하지만, 본질이 재생이니 그 특성마저 다시금 내 몸 속으로 돌아올 게 뻔했다.

그 직후에는 마력의 공급로라는 역할을 잃고 그냥 돌멩이가 되겠지.

돈 될만한 건 아니었다.

애초에, 나한텐 돈을 벌기 위한 목적따위도 없었으니 되도않는 고민이었다.

한참 걷다보니 어느샌가 상업가에 도착했다.

여기저기서 시선이 너무나도 많이 느껴진다.

조금만 모습을 숨겼다. 안보이게.

그냥 배경처럼 지나가도록 뒀다.

.

.

.

안대와 후드티를 가지고 나왔다.

엄밀히 말하면, 도둑질 했다.

돈이 없으니 당연한 일이긴 했다.

애초에 들키지도 않을건데, 굳이 왜 사?

"..."

상당히 쓰레기같은 발상이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애초에 난 여기 사람이 아닌 걸.

돈을 내고 싶어도, 돈을 벌 수 있는 방법이 없단 말이었다.

물론 생긴걸 이용해서 보육원에 입소할 순 있겠지만, 진짜로 어려운 애들 등쳐먹긴 싫다는게 내 이성의 중론이었다.

애초에, 나이가 이미 시간으로 세는게 의미가 없을 정도잖아.

딱히 누구 등쳐먹고 살고싶은 생각은 없다.

"..."

밤하늘은 보이지 않았다.

도시는 넓고, 사람은 많았다.

조금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가 보기로 결정했다.

***

문득 이런 기분이 든다.

세상은 왜 이렇게 불완전한가.

세상은 어째서 왜 이렇게 텅 비어있는가.

내 인생은 그랬다.

언제나, 모든 게 텅 빈 채.

그저 나와 비슷한 사람들과 의지하며 살아갔을 뿐이다.

어느 시점인지는 모르겠다.

어느 순간, 내 인생은 송두리째 사라졌다.

마음속에 자리잡은 거대한 것이, 통째로 사라졌다.

분명 중요한게 있었는데, 그 중요한게 무엇인지 도저히 기억할 수가 없었다.

공허속에서 보냈고, 가끔가다 넘어오는 잔해들을 처리하는 것 빼고는 시체처럼 보냈다.

그리고 며칠전에, 세계가 밝아졌다.

삶에 변화란 없었다.

하지만 잊고있었던 무언가가 같은 세계에 존재하게 되었다는 것 하나만큼은 확신할 수 있게 되었다.

평행선을 달리던 둘이, 마침내 만나게 될 수 있었다는 소리다.

감각이다. 내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것을 잃어버린, 그리고 그것을 찾기 위한 감각이다.

인생에 단 하나뿐인.

내 인생의 전부인.

이끌리듯 다가갔고, 본래라면 가지도 않았을 도시로 나아갔다.

마음은 충족되기 시작했다.

공허한 눈동자에 빛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저 멀리서 나풀나풀 걸어가는 작은 아이를 보고서는, 마음은 마침내 본래의 형태를 되찾았다.

근거란 없다. 논리도 없다.

그냥, 순수한 감정의 결정체일 뿐이다.

그럼에도 나는 믿을 수 있었다.

아니, 믿는 정도가 아니라 이미 확신했다.

새하얀 꽃이 피어있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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