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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해주세요, 마수님!-72화 (72/162)

〈 72화 〉 2부 1. 복잡하네

* * *

"..."

주변이 탁 트였다. 하늘은 파랬고, 공기는 차가웠다.

주변 가득히 쌓인 새하얀 눈이 뽀득뽀득 밟혔다.

몇 년 만이었다. 아마도.

시간이란건 이제 의미 없으니 말이야.

찢어진 현실은 이내 봉합되기 시작했고, 고요한 설원엔 나 혼자만이 남았다.

*

깜빡.깜빡.

현실이 깜빡거린다.

*

딱히 기억하기 싫은 기억도 아니고, 기억하고 싶은 기억도 아니니 봉해둘 필요는 없겠지.

그래도, 자극이란 게 사라진 삶은 상당히 단조로웠다.

'지루해서 미칠것같아'라는 말도 이젠 할 수가 없다.

애초에 내가 미친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되는 전제니까.

그 자칭 신이 만든 대체현실은 시간의 왜곡이 주기능이었다.

억겁의 세월이 흘러도 현실에선 기껏해야 1년. 어쩌면 그보다도 더 적게 흘러간다는 말이다.

뻔한 얘기다. 그냥, 너무나도 오랜 시간이 흘렀으니 감정마저 다 희석되어 버린거라고.

다짐대로 도피하지 않고, 그대로 마주했으니까 딱히 후회할 건 없겠지.

그래도 추억을 떠올릴 때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 다는 건 꽤나 슬펐다.

이제 내가 할 수 있는거라고는 그저 감정을 흉내내는 것 뿐이니까.

내가 그때 왜 웃었는지, 왜 울었는지, 왜 화냈는지. 머릿속의 지식으로는 알고있다. 그래서 더 이상 그런 감정들을 느끼지 못한다는게 슬픈거야.

감정이 마모된다는게 어떤 느낌인지 알 수 있는 세월이었다.

대체현실 내부에서, 우주가 5번 멸망할 정도의 시간이 흘렀다.

고의적으로 기억을 지우지 않는 한, 인간 하나가 닳아 없어지기엔 충분하고도 남는 시간이었다. 오히려 너무 남아서 문제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기억을 지우겠다기엔더 이상 내가 모르는 것들이 남아있다는게 도저히 용납이 안됐다.

애초에 내가 이 세계에 와서 그렇게 미친듯이 굴렀던 이유가 다 정보부족에서 나온 차이때문인데.

"...지루하네."

그 대체현실속에서 조차, 나는 마모되고 있었다.

싸우는게 싫어서, 더 이상 피보는게 싫어서 그 대체현실 속에 나만의 세계를 만들어 도피했다.

당연히 더 상위의 세계가 존재하는데, 그 내부에서 나만의 도피처를 만들어 숨는게 해결책이 될 리는 없었다.

나도 알고 있었어.

내가 만든 세계는 나의 이상을 모두 담고있다고 봐도 무방했다.

그 속에선 나는 본래의 기억을 모두 잊고, 그 세계에서만의 나로써 살아갔다.

그렇기에 언제나 세계를 찢고 찾아오는 검은색의 종말을 눈앞에 마주할때면 언제나 분노대신 절망만이 느껴졌다.

내가 그동안 사랑했던, 날 지키기 위해 만들었던 세계가 모두 가짜라는 걸 깨닫고 모든 기억이 돌아오면 언제나 분노대신 절망만이 느껴졌다.

또? 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고, 그 다음엔 그저 무료함만이 남았다.

온몸이 찢어져도, 정신이 날아갈 듯한 고통이 느껴져도 수억년, 수조년에 걸쳐 느끼다 보면 별거 아니다.

피와 내장이 즐비해도 저녁 뭐먹지 따위의 생각이나 들게 만드는게 익숙함이라는 거다.

그러니까, 뭐...

너무 모호한 얘기는 나도 너도 싫어하니, 그냥 본론만 말하자.

나는 신이다.

그래, 난 신이고, 무적이야.

장난치자는 건 아냐. 그냥, 이 상황을 손쉽게 설명해줄만한 말이 이 문장밖에 없어서 그렇지.

상식적으로, 인간의 시점에서 현실을 뒤틀어 3차원에 존재하는 모든 걸 본인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는 존재가 있다면, 그걸 신이 아니라면 뭐라고 부르겠어?

내 심장은 나의 것이 아니었다.

엘로힘 본인조차 신이라 부를 만한 것.

엘로힘은, 이름 없는 존재다.

나와 같은 우주에서 유래한 3차원의 지적생명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

내 시점에서, 인간의 시점에서 도저히 말도 안되는 일을 벌이기에 신이라 믿기에 힘들지 않기도 했다.

그래도, 그는 생명체. 한계란 존재했고, 이 우주에 행사할 수 있는 그의 영향력은 고작해야 정신 하나로 한정되어있었다.

그런 그에게, 신이라는 것의 가능성이 보였다면 어떻게 할까?

말하자면, 요술램프와도 같은거다.

다만 소원 횟수제한 없는 사기템으로.

현실을 제맘대로 주물럭거릴 수 있고, 새로운 우주를 만드는것도, 멸망시키는것도. 이론상으로는 모두 가능한거다.

그러나 그에게 신이라는 것은 그저 '가능성'이었다.

애초에 3차원 전체에 영향력을 미칠 수 있으려면 보다 상위차원의 존재일테니.

3차원보다 높은 차원에서, 생명체의 존재가 증명되진 않았다. 그리고 엘로힘의 접촉방식을 보면 역시 우리가 생각하는 의미의 생명체 따위는 없었던 모양이다.

그것은 그저 개념이었다.

우리가 사는 곳에서의 개념. 엘로힘 본인이 생각하는 진정한 의미의 신.

우리는 개미고, 엘로힘은 인간이며, 그것은 신이었다.

그것과 엘로힘이 접촉하며, 그것의 사고 내부에 가장 처음 들어박혔던 것이 3차원이라는 개념이었으니.

텅 빈 무지에 가까웠던 '개념' 이란 것은 생명이라는 것을 알게되어, 그와 가장 비슷한 형태로 변화했다.

그 덕에, 심장이 이쪽으로 넘어오는 것도 일도 아니었지.

그냥 단순하게 말했지만, 생각해보면 상당히 심각한 일이었다.

3차원 내부에서 상위차원의 모습을 변화시켜, 우주 자체를 주물럭댈 수 있는 것의 일부가 넘어왔다는 거나 마찬가지니까.

평행선이 서로 만났다 라는 말이다.

그리고 내 속에서 뛰고있는 심장은, 이 3차원 우주 내에서 그것의 힘을 사용할 수 있도록 조형된 것.

쉽게 말하자면 상위차원의 것은 소프트웨어, 엘로힘이 나에게 가한 짓은 소프트웨어를 담을 하드웨어를 만드는 것.

성공했고, 난 그걸로 된거다.

난 그것이 말하는 '신'이 됐고, 인지를 아득히 벗어났다.

깜빡.

현실이 깜빡였다.

*

4차원인지 5차원인지, 모른다.

애초에 이 (숫자)차원조차 그냥 가설일 뿐인데 뭘 알아.

다만 확실한 것은, 나라는 존재는 이미 3차원 본래 우주를 벗어났다는 말이다.

내 본질은 분명 3차원에 존재하는 '나'였지만, 후에 추가된 것은 3차원의 것이 아니었다.

까딱 정신팔면 어느샌가 우주를 벗어난다.

해당 우주에 속하게 되지 않는다.

말 그대로, 존재 자체가 붕 떠버리는거다.

그러니까ㅡ

"복잡하네."

미안, 너무 두서없이 설명했다. 그냥 생각이 마구 날아다녀서 그랬나봐.

알기쉽게 요약하면 이런거다.

난 신이 됐고, 그 덕에 본래의 우주에 속하지 않게 됐다.

나라는 것 자체가 지워지듯 사라졌을 게 뻔하고, 누군가의 기억에 남아있을 리 조차 없어.

누구도 날 기억하지 못한다.

내가 겪었던 고통들도 이제 아무런 일도 아니었고, 애초에 있었던 일 조차 아니게 됐다.

그냥 내 기억속에서만 남아있는 무언가가 됐다.

아무런 감정도 들지 않았다.

지독한 권태와 무료함만이 마음속을 가득 채웠다.

이렇게 쉽게 바뀔 수 있는게 현실이었다면, 그렇게까지 빠져나오려 발버둥칠 필요가 있었을까.

원하는대로 현실을 주물럭댈 수 있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애초에 그럴 수 없기도 하고, 현실을 건드리지 않는것이야말로 내 마지노선이었으니까.

현실을 내 마음대로 수정했다간, 그거야말로 그냥 게임처럼 돼버린다.

인간을 인간으로서 보지 않게 되고, 마지막 남아있던. 날 나로서 유지시켜주는 것까지 잃어버리게 된다.

그리고 이미 말했지만, 애초에 힘마저 버려두고왔으니.

난 나로써 살겠다고 힘마저 봉해두고 왔으니 말할 필요도 없었지만.

좋게 생각하자!

미래는 밝았다.

비록 내가 언제 어디서든 3차원의 나를 망각해 우주에서 완전히 제거될 수 있다고 해도, 아무도 날 기억하지 못한다 해도, 감정따위 아무것도 느낄 수가 없어도, 아무런 힘도 없어도.

여긴 현실이잖아.

시간은 흐르고, 미래는 온다.

시간이 흐르면 언제나 달라진다.

좋은 방향으로든, 나쁜 방향으로든.

나에겐 시간이 흐른다는 것 자체가 축복이고 희망이다.

그러니까, 이것만으로도.

나는 행복하다.

*

사람이 보인다.

내가 만들어낸 인형들이 아니라, 진짜로 살아있는 사람들.

도시가 보인다.

하늘 끝까지 뻗어나가있는 드높은 마천루들과, 알록달록하게 빛나는 네온사인들이.

투명하게 내리는 빗방울이 푸른빛으로 일렁대는 홀로그램 광고판 속으로 스며들어갔다.

도시에서 내뿜는 빛에 밤하늘의 빛마저 모두 사라진 것이 보인다.

사이버펑크풍의 도시였다.

사람들한테 물어보니, 9년이 지났단다.

겨우 9년.

겨우...라고 할만한진 잘 모르겠지만 말이야.

여기가 정말 예전의 그 도시인가 라고 생각하게 할 정도로, 놀랍도록 역변한 모습이었다.

빈민가나 슬럼가조차 전부 아파트였다. 어디든 네온사인이 번쩍였고, 빛이 보이지 않는 곳이 없었다.

전쟁에 신음하며 썩어가던 이전의 도시와는 다른 모습이었다.

이전의 서울이 마치 고층빌딩이 모여 만든 탑처럼 보였다면, 이젠 고층빌딩이 모여 벽을 이뤘다.

내가 가장 처음 깨어났던, 폐허가 있던 곳으로 발을 옮겼다.

그 자리에 세워져있는 건 높다란 탑이었다.

주변에 늘어져있던 슬럼가들도 모두 상업거리로 바뀐 뒤였다.

근처 골목에서 새어나오는 쥐새끼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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