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9화 〉 1부 에필로그 미래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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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심스럽게 주변을 둘러봤다.
새하얀 공간이네.
완전히 하얗게 물들였어.
방이라면 모서리마다 경계선은 보여야 할텐데, 그런 건 일절 보이지 않았다.
지금 내가 밟고있는 곳이 바닥이라는 점만은 알 수 있었다.
갑자기 이게 뭔 일일까.
입고있던 옷은 어느샌가 민소매의 하얀색 원피스로 바뀌어서, 정말 말 그대로 여기 있는것들 전부가 하얀색이라고 볼 수 있었다.
내 머리카락도 하얀색, 피부도 하얀색, 옷도 하얀색, 하늘도, 땅도, 모두 하얀색.
아마 구분 못하지 않을까.
"하하..."
실없이 웃음을 흘려봤다.
그러니까, 도대체 어떤 짓을 당했길래 내가 이런 꼴이 되어있는거지?
돈주고도 못볼 1대1 매치를 눈앞에서 직관하고, 땅바닥에 그것의 분신들이 널려있을 시점.
그때까지만 해도 난 분명 의식이 남아있었다.
정신차리고 보니 어느샌가 난 내 몸 밖으로 빠져나와있고, 내 시체를 붙들고 끅끅대는 한서우가 보였을 뿐이지.
생각해보면, 정신이 날아간 시점은 분명 분신들의 시체에서 검은 파장이 흘러나왔을 때였다.
혹시 그 검은 파장이 무언가 특수한 작용이라도 한걸까?
생각해봤다.
찰박찰박, 발걸음을 옮길때마다 발끝부터 파장이 퍼지며 아름다운 광경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생각이 끝났을 무렵 내가 겨우겨우 도출해낸 결론이란 이런 아름다운 풍경엔 걸맞지 않는.
살짝이지만 절망적인 가설이었지만 말이다.
뒤를 돌아봤다.
입고있는 새하얀 원피스가 움직임을 따라 나풀거린다.
뒤를 돌아봤을 때 보인건, 아까까지만 해도 보이지 않았던.
언뜻보면 액체같고, 달리보면 촉수같기도 한.
저 하늘의 한 구석을 근원으로, 절반의 공간을 집어삼킨 거대한 '색'이었다.
검은색이, 하늘의 한구석에서 꿈틀거렸다.
밟고있는 수면 위로, 그 색은 섞여들어오기 시작했다.
마치 염색약이 퍼지는 것 처럼, 검은색이 눈앞을 물들여가기 시작했다.
"미친새끼 진짜..."
이 빌어먹을 신이라는 작자는,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전부 조롱이다.
전부 농락이었으며, 전부 속임수였다.
검은것은 꿈틀댔다.
여기선 어떤 반응을 보여줘야 할까.
뭐, 공포에 떨며 비명이라도 질러볼까? 이것도 웃긴 광경이긴 하겠네.
실처럼 뻗어지는 검은색은, 이내 내 머리카락을 살며시 젖혀, 이마에 닿는다.
머릿속으로, 무언가 들어오는 감각이 느껴졌다.
다음순간, 정신은 날고있었다. 고통은 아니었다. 고통이었는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아무것도 느낄 수 없게된 시점에서 감각이란게 소용이 있을까?
상당히 심오한 고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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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온 것. 들어온 것은, 그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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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맸다. 온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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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인 줄 알았지만,전부 글자였다.
검은 것은 모두 정보. 머릿속으로 비집고 들어오는 것은 이해하기 알맞게 변환된 코드들의 해석.
작은 머리로는 도저히 감당하기 어려운, 미친듯한 정보의 나열이었다.
*
루시의 심장은, 한서우의 대검은 방아쇠다. 그것이 한서우의 손에 넘어간 순간 엘로힘의 패배나 마찬가지였다.
엘로힘은 신같은게 아니였다.
그저, 인간과는 궤를 달리할 뿐인. 분명 생물이긴 하지만, 인간의 상식이라는 기준에서 너무나 엇나가있는 무언가.
우주에서 유래된 생물이긴 하지만, 인간의 머리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무언가였다.
발성기관의 차이, 청각기관의 차이. 모두 불가해였다.
애초에 그것의 감각이라는 것이, 그것의 생각이라는 것이 인간과 상충될 수 있으면 말이지만.
기이하게 조형된 발성기관의 문제인지, 인간은 그저 음성을 듣는 것 만으로 미쳐버린다. 형체가 없는 몸에 대한 반증인지, 아니면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괴이한 파장의 여파인지, 그저 곁에 있는 것 만으로 몸이 뒤틀리고 끊어진다.
단일개체인지 종족인지는 몰랐다. 다만, 본인은 그랬다.
아무튼, 결국 패배할 운명이었다는 것이다.
운명이라느니 뭐라느니, 결국은 전부 핑계기는 하지만.
자신의 체급조차 넘어선 물건을 함부로 다루다가 자멸해버린 것들을 얼마나 많이 봐왔는지.
엘로힘 본인조차 신이라 부를만한 것의 심장으로, 대체 무엇을 하려 했단 말인가.
의도는 알 수 없다.
ㅡ잡설은 여기까지 하고.
여긴 어디일까?
그저, 대체현실속의 대체현실이다.
느리게 흘러가는 세상속에서, 한층 더 느리게 흘러가는 곳.
억겁에 가까운 시간이 흐르더라도, 아마 밖에선 기껏해야 1년정도 흐르지 않을까?
원하는 것은 그저 고립이었다.
모든 이들이 마수의 토벌을 믿고, 희망을 쫓고, 전쟁은 모두 끝났다 믿는 것.
모두가 우리에게서 손 떼고, 그저 고요하게, 우리 둘만 남는 것.
마수따윈 그저 실험의 부산물이었다. 인간이 어찌되던, 엘로힘의 알바는 아니었단 말이다.
그냥, 죽으면 죽고 안죽으면 안죽는, 그런 개미만도 못한 존재. 신경쓸 가치 또한 없는 존재.
엘로힘 본인을 죽일만한 무력을, 그럴만한 힘을 타고났던 한서우가 아니었더라면, 말이다.
결국 도망을 택했고, 그 누구도 그에 대해선 알지 못했다.
루시의 죽음 또한 그저 희생의 일부일 뿐이라 생각하며, 한서우는 세상을 살아갈 터였고.
한서우의 대검이 사라진것도 그저 제 역할을 다 했기에 사라진 거라 생각하겠지.
더 깊게 생각하기 싫은거다.
이해하기도 복잡하고, 이해해봤자 더 절망스러운 감각만 불러일으키는 그 정보를 누가 얻으려 들겠는가.
루시의 가슴속에선 심장이 격하게 박동하며 뛰고있다.
심장을 가로채고, 루시의 시체는 바꿔치기 하여 자신만의 공간으로 숨겼다.
엘로힘 자신은 이제 인간들에겐 죽은 이나 마찬가지고, 더이상 신경 쓸 이는 없었다.
고립이었다.
루시는 살아있었지만, 루시의 심장은 여전히 박동하고 있었지만, 그것이 모두 바꿔쳤다.
루시의 시체를 그들은 의심하지 않을 것이고, 조형된 것인지 조차 알아차리지 못할 것이었다.
완전범죄였다.
*
"케헥, 컥..."
꼴사나웠다. 몸이 진정이 되지를 않았다. 침이 목구멍으로 넘겨지지가 않고, 초점이 제대로 잡히질 않았다.
정보가 너무 많았다. 이해할 수도 없는 정보들이. 아니 어쩌면, 이해가 아니라 그저 받아들이는 것 조차 어려울 정보들이 뇌를 가득 메우는 것도 모자라 넘쳐 흘렀다.
이해할 수 있는 정보들의 단편만을 추린 것이 앞서 말한 것들이다.
연구자들이 겪었던, 한서우가 겪었던 세뇌의 과정이 어떤 건지 이렇게 겪을지는 생각조차 못했다. 기억을 주입받는 다는게 어떤 감각인지 깨달았다.
끔찍했다.
진짜, 정말로. 좆같았다.
내가 곧 저 검은것이었고, 저 검은것은 나였다.
그의 기억을, 머릿속에 한껏 우겨넣었다. 터지고도 남을 지경이었다.
검은것은 태동했다.
의사소통이라는 과정이, 과연 나와 필요할까 고민한다.
애초에 저놈의 목적은 내 자아의 상실.
나와 대화할 이유도 없고, 소통할 이유도 없다.
뭐, 나도 저런 것과 소통하는 것 따윈 바라지도 않는다. 저런 놈에게 소통이라고 해봤자, 뇌에 강제로 쑤셔넣는 방법밖에는 없을테니.
서로가 알고 있었다.
나라는 존재가, 왜 다른 놈들이 그렇게 못잡아 먹어서 안달인건지.
이제는 조금 알 것 같았다.
생명들만이 사는 공간에, 가짜 신을 만들었다.
신이라고는 없는 곳에, 거짓 신을 만들고자 했다.
그 불완전한 욕망의 결과물이, 이 몸뚱이였다.
난 어떻게 될까. 미쳐버릴까?
억겁의 시간을 고통속에서 살던 나는 종국엔 미쳐버리고 자칭 신의 노리개가 되는걸까?
"..."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았다.
검은것은 움직였다.
내가 버틸 걸 알고 있었다는 듯, 미미한 요동이었지만.
하늘은 검게 물든다. 밟고 있는 수면에, 검게 물든 하늘이 비춘다.
인생은 고통이고, 그 고통속에서 희망을 주는것이, 언제 올 지 모르는 행복이라는 거다.
행복해서 살고, 행복하지 않아도, 언젠간 행복해지기 위해 산다.
당장의 고통도 버티게 해주는 것이 희망이고, 행복이 곧 희망이다.
한서우를 떠올려봤다.
따지고보면, 의존증은 한서우가 아니라 나였는지도 몰라.
난 지금껏 한서우를 인간대 인간으로 생각해 본 적은 없다.
나에게 그 녀석은 언제나 세계의 중심이었고, 주인공이었으며, 의지해도 마땅한 존재였다.
마음속으로는 내심 친구로 생각하기 보다는 동경의 대상으로서 삼고 있던게 분명하다.
행복을 쫓는 존재라는게, 그리도 찬란해 보였을 줄 누가 알았겠어?
꿀럭...
새하얀 피부위로 검은색의 굵은 가닥이 감싸며 들어온다.
감정이, 아니, 내 시점에서 적어도 감정이라 표현할 수 있을만한 것이 느껴졌다.
시간은 흘러 넘쳐 다 쓰고도 남으니, 마음속에 절망을 심어넣어주는 감정이었다.
생각? 감정? 잘 모르겠다.
엿이나 먹으라고 그래. 절대로, 원하는대로 돌아가진 않을거다.
강대한 마력은 곧 힘이고, 자아는 곧 의지다.
나에게 자아가 유지되는 한, 언제나 희망은 있었다.
희망은, 나아가기 위한 것.
뚜두둑!
뼈가 으스러지는 소리가 들린다.
쩌저적, 살이 갈라지는 소리가 들린다.
시야가 뜨는가 싶더니, 격렬한 통증의 환영이었다.
저 멀리 상반신 없이 나풀대는 내 하반신이 보였다.
정신을 차리고 보면, 다시 원래대로 돌아온 채였다.
마력을 움직여, 눈앞의 것을 없앴다. 주변엔 그 무엇도 지킬게 없으니 거리낌이란 없었다. 조절이라는 것 없이, 그냥 쓸어버렸다.
없애도, 돌아왔다.
정신을 차리고 보면, 다시 원래대로 돌아온 채였다.
검은것은 내 손짓 한번에 터져나가고, 내 몸은 그것의 움직임 한번에 갈갈이 찢겨나간다.
피와 내장이 허공으로 비산하고, 새하얀 피부는 핏빛으로 붉게 물든다.
고문이 아니라고, 장담할 수 있었다.
이건 그냥, 또 하나의 작은 전쟁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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