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7화 〉 1부 63. 상황종료
* * *
성화연은 저 먼곳에서 벌어지는 전투를 지원하기 위해 무전기에 쉴새없이 무언가 전달하느라 바쁜 모양이다.
불길이 일어나는 전장의 풍경 앞으로 루시의 실루엣이 비췄다.
조심스럽게 가 무릎을 꿇고 앉아 어깨를 톡톡 건드려봐도 루시는 돌아보지 않았다.
고통에 감각이 무뎌지기라도 한건지, 여전히 소녀의 녹색 눈은 저 먼곳에서 일어나는 전투만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가슴 한가운데 뚫려있는, 소녀의 작은 몸 치고는 지나치게 거대한 구멍이 피를 울컥울컥 뿜어대며 존재감을 과시한다.
날 볼때와는 다르게, 입 한구석에 살며시 띄어올라있는 미소가 예쁘다.
볼을 꾹 누르자, 그제서야 돌아보는 루시.
"...서, 서아..."
눈이 흔들린다.
다만, 겁에 질린 눈은 아니었다.
분명히 마음속 어딘가에 공포라는 감정은 남아있는 듯 하지만, 이전과는 다르게 한구석에 광채가 돋보인다.
"..."
전장에서 울리는 굉음에, 소녀는 다시금 고개를 돌렸다.
소년이 움직이기 시작하고, 붉은 달은 저물고, 검은 하늘은 화사하게 빛나고, 사람들은 투쟁하기 시작했다.
전장은 급속도로 변화한다.
마수들이 쓸려나가며, 정리되기 시작한 것이다.
혼돈 그 자체였던 전장은 곧 영화의 한 장면처럼, 파도와 파도가 맞서는 장면이 되었다.
새하얀 검격과, 검은 덩어리들.
모두에게 희망을 넣어주기엔 충분한 연출이었던 것이다.
비록, 우리는 실패했지만.
이런 상황이라면, 우리라도 희망을 가져도 되는거 아닐까?
"...윤서아 넌... 아군이야?"
루시가 전장을 바라본 채 멍하니 중얼거린다.
대답대신 소리내어 웃어주자, 한숨만 푹 쉬며 다시 눈을 감는 루시.
"...하긴, 제대로 말해줄거라 생각한 내가 멍청이지..."
다시한번 고개를 들어 저 먼곳을 바라봤다.
별빛과 불빛들이 작열하는 것이 보였다.
"다녀올게."
볼을 쓰다듬어주며 루시에게 말했다.
"...오지마."
루시다운 대답이었다.
***
상황이 정리되고 있다곤 했지만, 그래도 전쟁터다보니 내가 있는곳까지 구조팀이 오거나 그러진 않았다.
그 덕에, 딱딱한 아스팔트 바닥 위에 앉아 정신이 흐릿해져가는것만 느끼며 이렇게 아무것도 하는 것 없이 그냥 구경이나 하고 있는거고.
기대어있는 돌더미가 서서히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아는 사람들이 이따금씩 온다.
알비나가 금방 다시 만나자며 꼭 껴안아주고, 레프 아저씨는 가만히 날 내려다보다가 시선을 돌려 하늘을 바라본다.
파벨 아저씨와는 인연이 그다지 깊지 않기에 딱히 별 일은 없었지만, 그럼에도 예의상 걱정은 해주는 모양이었다.
심장이 없으면 어떻게 되는걸까. 새로운 심장이 자라나고, 그러려나.
주변을 둘러보니 확연히 마수들이 줄었다는게 느껴졌다. 이제, 이 지옥도 끝날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이다.
물론 연구자라는 공공의 적이 사라지면 인간들이 지들끼리 다시 싸워제낄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종 자체가 위협을 받는 지금보단 상황은 훨씬 나았다.
그렇게, 미소지으며 내가 키워낸 저 주인공자식을 자랑스러워하고 있던 그때였다.
피잇ㅡ
시야로, 뚜렷한 변화가 느껴졌다.
마치 세상이 빠르게 돌아가는듯한 기분이었다.
몸은 움직일 수 없었다. 이건 심장이 뽑혀나갔을때부터 그랬던거니 그러려니 하자.
시야가 블러처리되기 시작했다. 마치 무언가 필터를 씌운 것처럼, 빠르게 지나가는 사람들의 잔상이 눈에 남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시야 중앙에서 걸어오는 뚜렷한 형체를 바라보았다.
바라보았다?
눈이 맞았다.
눈이라니, 어디가 눈이지.
저건 사람이 아니었다.
마치 혼자만 다른 공간에 붕 떠있는 것처럼, 이질적인 존재였다. 오류라도 난 듯 지직거리는 형체.
주변의 그 누구도 그것을 인지할 수 없다.
빠르게 흘러가는 세상을 중심으로, 선명한 형체는 나를 향해 걸어온다.
고개를 흔들어 이 빌어먹을 정신공격좀 어떻게 해보려 했다. 하지만, 딱히 형상이 사라지거나 하진 않았다.
아무래도, 이건 현실인 듯 했다.
몸은 움직일 수 없다.
머리는 쉴새없이 움직인다.
이 상황에서, 난 무엇을 해야할까.
모두에겐 역할이 있었다. 근데 난 그저 여기 이렇게 쓰러져 있는것만이 역할이었다.
휙휙. 군인들과 히어로. 마수들의 잔상이 저 멀리 남는다.
더이상 도움만을 바라선 안된다는걸, 나도 알고 있었다.
"...읍..."
안될 걸 알지만, 몸에 힘을 줘 간신히 일어났다.
피가 후두둑, 하며 떨어지는 모습이었다.
저 앞의, 가상인듯한 형체는 어느새 눈앞에 서있다.
몸체 너머로 전장의 풍경이 어렴풋이 비춘다.
고개를 들어 머리를 올려다보자, 눈에 피가 고이기 시작했다.
상대조차 불가능 하다는건 알고있었다. 다만, 도움만을 바래선 안된다는 걸 알았다.
귓가의 소리가 저 멀리 붕 뜨기 시작했다.
마치, 현실이라는 종이 위에서 분리되는 듯한 느낌이었다.
나에게 심장은 없다. 움직이는 마력따위가 있을리가 없다.
우스꽝스러운 자세로 비틀거리며 주먹을 내질러보지만, 그대로 그 가상의 형체를 통과해 앞으로 기울어질 뿐이었다.
한번, 두번.
힘은 들어가지 않지만, 발악이라도 해봤다.
한번, 두번. 또 다시.
그 분신이 한번 손을 휘두른 것 만으로, 내부는 곤죽이 되어 순식간에 피가 뿜어져나왔다.
아팠다. 진짜, 미칠정도로 아팠다.
내가 과연 여기서 이래도 되는게 맞는건가? 여기서, 이렇게 버티고 있는다고 뭐가 달라질까?
멍청한 고민들이 셈솟기 시작했다.
마주보면 볼수록, 저 먼곳의 무언가가 보인다. 눈에 핏물이 고이고, 머릿속이 발광하는 느낌이었다.
자꾸만, 빠져드는 느낌이었다.
입이 움직이는 것 같았다. 목소리를 듣는 순간, 고막이 음파의 형태를 견디지 못해 터져나갔다.
가상의 형체는 마치 살덩이 같았다. 분명 디지털 홀로그램 같은 모습인데, 왜 그렇게 느끼는거지.
푸확!
어느샌가 내 뱃속으로 손을 집어넣은 분신은, 곤죽이 된 검은색의 내장들을 모조리 태워버린다.
심장을 제외하고선 전부 순식간에 재생됐다.
죽었다가, 순식간에 되살아난다.
옆에 떨어져있는 병사의 소총을 들어, 개머리판으로 후려쳤다.
그대로 통과한다.
주변의 모든것을 집어던져본다.
마력이 담긴 마공학 용품일수록 좋았다.
그래도, 최소한의 공격은 됐으니까.
그래도, 최소한의 상처는 입힐 수 있었으니까.
적어도 옆구리에 칼침 한번정도는 박아넣었다.
그럼에도, 압도적인 격차라는 건 좁혀지지 않았지만 말이야.
주변 그 누구도, 이 싸움을 목격하지 못했다.
주변 그 누구도, 이곳을 보지 못했다.
콰직.
어느샌가 바닥에 대자로 뻗어있는 내 몸 위에 올라탄그 검은 형체는, 가슴을 열어젖혀 심장을 확인해봤다.
재생된 귀 내부로 살을 헤집는 소리가 들려왔다.
말랑거리는 클레이같은 피부는 그저 손짓 한번에 찢겨나간다.
딱히 공포감이 들거나 그러진 않았다.
머릿속은, 쉴틈 없이 돌아가고 있었다.
과열되서 터져나갈 정도로, 쿨러조차 돌리지 않고 마구잡이로 생각이 이어졌다.
여기선 무엇을 해야될까, 앞으로 어떻게 행동해야 이 빌어먹을 대체현실을 빠져나갈 수 있을까.
푸걱!
가슴속에 심장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 엘로힘은 내 몸 위에서 내려왔다.
어째서 여기까지 와서 한서우가 지금 들고있는 것이 온전한 코어라는걸 확인해야 했는진 모르겠다.
확인사살인가? 자신의 승리를 좀 더 확고히 하기 위해서?
안타깝지만, 승리를 염두에 두고 한 행동이면 처참한 선택이었다고 말해줄 수 있었다.
바닥에 엎어져 피를 쏟은채 헐떡이는 날 내려다보던 엘로힘의 분신은, 그대로 반으로 갈라졌으니.
"...루시...! 루시! 괜찮아?!"
"......우..."
새하얀 빛이었다.
고마웠다.
살아있다는것이, 너무나도.
이런 어두운 곳에서도, 이렇게 빛은 비춰주는구나.
"...빨리도 오네..."
웃음을 지었다.
역시 주인공이라고 생각했다.
***
세상이 느리게 흘러가기 시작했다.
루시의 작은 몸 위에 서있던 그 검은 형체가 갈라지고 난 뒤의 일이었다.
손에 붙잡혀 있는 대검. 루시의 심장은 대체현실 속에서도 검게, 붉게 빛난다.
누워있는 루시의 미동은 점차 사라져간다.
심장이었다, 지금 내가 들고있는 건.
이 싸움은, 누군가의 목숨을 담보로 시작된 것.
이 싸움에 걸려있는 목숨의 수는 이곳에 있는 이들 만의 것이 아니었다.
■■ ■■■■ ■■■...
귀에서 피가 터져나왔다.
바닥이 검게 물들며, 정신을 좀먹기 시작했다.
갈라져있던 형체는 사라지고, 어느샌가 좀 더 거대한 형상이 나타나있었다.
분신은 몇개일까, 모르겠다.
내가 저것들을 다 견딜 수 있을까?
모르겠...
"..."
꽈득. 이를 갈았다.
검은 바닥 위에 힘없이 늘어져 핏물만을 흘리는 루시가 눈에 들어온 탓이었다.
노출도가 심한 옷 너머로 드러난 새하얀 몸은, 이미 인간의 그것이라 볼 수 없었다.
심장은 없고, 복부마저 여기저기 찢겨나가있다. 공허한 초록색 눈동자는 날 바라보며 한줄기 빛을 붙잡고 있을 뿐이었다.
피부는 과다출혈때문인지 이미 창백해져있었다.
대검을 다시 한번 꽉 쥐었다.
루시는, 죽을것이다.
아마도.
심장이.
중심이 없어진 이들의 말로는 뻔하지 않은가.
쥐고있는 대검이 두근두근, 루시의 심장과도 같이 작게 박동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해내야해.'
최대한 빨리 끝내고, 루시가 죽기전에.
심장을 원래의 자리로 되돌려놓으면, 루시는 살 수 있지 않을까.
느리게 흘러가는 세상 속에서, 눈앞의 형체를 마주봤다.
시야가 붉게 물들며, 눈을 통해 피가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 ■■■■ ■...
기다린다. 모두가.
이 전쟁의 끝을, 지옥의 끝을.
"...나는."
■■...
"나는, 약속했어."
■....
"루시랑, 약속했다고."
■■...■...
"반드시, 살아남을 거라고..."
대지는 꿈틀대며, 대체현실은 행성단위로 변화하기 시작했다.
지구라는 행성은, 요동치기 시작했다.
검은 마수가 되어, 마력 덩어리가 되어.
누군가의 심장이 되어.
대체현실속의 지구는, 마지막 싸움을 준비하고 있었다.
슬로우모션을 통해, 저 멀리 서있는 화연이의 얼굴이 보인다.
어느새 마수라곤 몇백밖에 남지 않은, 승리의 나팔을 불기 직전인 전장의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준서도, 마스도. 벨라도, 카인도, 아담도, 이브도.
전부, 한 눈에 들어왔다.
희망에 가득 차있는, 그러한 눈길이었다.
달은 어느샌가 저물기 시작해 하늘 저 편에선 붉은 여명이 떠오르고 있었다.
햇빛을 받아 대검은 더욱 화사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같이, 살아남을거라고...!"
굉음이 터져나가며, 루시와 나밖에 알지 못하는 전장에서 마지막 전투가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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