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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해주세요, 마수님!-66화 (66/162)

〈 66화 〉 1부 62. 함께 약속했어.

* * *

정확하게 말하자면, 가드 전부가 이곳에 모인건 아니었다.

애초에, 지금까지 엘로힘이 보여준 전적이 있지 않은가? 언제 또 뒤통수를 칠 지 모르는데, 정확하지도 않은 정보에 모든 전력을 다 투여한단 말인가?

보이는것만 연구자들의 본거지일 수도 있고, 사실은 어딘가 안보이는것에 나머지를 숨겨둔 것 일 수도 있었다.

그렇기에, 가드는 이 전장에 모두를 투입하지 않았다.

대륙 전역에 골고루 퍼진 가드들은 다른 이상사항이 없나 눈에 불을 켜고 감시하고 있었고, 시간이 지나 다른 움직임이 잦아들게 되었을 즈음, 그때서야 다시금 모여들게 된 것이었다.

전장엔 트럭들이 한무더기로 속속들이 도착하고 있었고, 물량은 딸리지만 그래도 어느정도는 내부와 외부, 두 곳에서 동시에 공격하는 전황이 만들어졌다.

마수들은 내부에서도 공격받고, 외부에서도 공격받는다.

­콰앙!

검은 파도의 한가운데에서 거대한 폭발이 일어나고, 검은색의 타르 덩어리들은 찢겨나가며 하늘 위로 날아올랐다.

순간 드러난 회색의 콘크리트 바닥은, 금세 다른 마수들로 뒤덮이며 다시 검게 물들었다.

하늘의 붉은 달은 변함 없이, 여전히 전장을 주시하고있는 모습이었다.

"...Cyka..."

동료의 시체를 내려다보는 한명의 군인이 그렇게 중얼거린다.

결론만 말하자면, 인간측이 압도적으로 불리하다.

사상자 수는 말할 것도 없고, 물량마저 어떻게 비벼볼 껀덕지가 못된다.

분명히 마수들의 공급로는 죄다 차단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저 여기에 모여있는 이 마수들 만으로 이렇게 고전하고 있는 것이다.

전장에는 시체의 냄새가 한가득 떠돈다. 비위가 역해질 정도의 피비린내들이, 숨을 들이키고 내쉴때마다 느껴진다.

저 하늘위에 떠있는 붉은 달도 사기를 떨어뜨리기에는 한 몫 톡톡히 하고 있었다.

아무리 배경일 뿐이라지만, 이런 소름끼치고 공포스러운 환경에서의 싸움이란 누구나 겁먹기 마련이었다.

검은하늘 위에 잔잔히 떠있는 붉은색의 달. 상식을 벗어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현상.

엘로힘에 대해 알지 못하는, 이곳에 모인 군인들과 히어로에게는 그저 압도적인 무언가로밖엔 상상할 수 없었다.

분명, 상황 자체는 우리에게 유리한 상황이 맞았다. 그럼에도, 힘과 물량이라는 그 단순한 차이때문에 전장은 상상 이상으로 격렬해질 수밖에 없었다.

다짐과, 의지 모두. 신념도, 전부 다. 세계평화니 뭐니 그런건 상관 없었다. 그저, 주변사람들이 행복해졌으면 좋겠다. 이런 소망만으로 싸워온 이들이다.

이들에게 희생이란 얻는 이득이란것이 확실할때, 당연히 해야하는 것이고, 전장에서 동료의 죽음에 슬퍼할 일 따위는 없다는 걸 알았다.

나중에 시체마저 찾지 못할 걸 알고 있었다.

물론, 알고있다고 인간의 감정마저 변하는건 아니었지만 말이야.

그저 절망밖에 없었다.

그리고, 검은 파도의 정 중앙. 연구자들의 거대한 성.

그 괴물이 무너지고, 화사한 빛이 작렬하기 시작했을때.

­쿠우우우웅­!

흰색의 충격파가 퍼져나가고, 붉은 달이 쪼개졌다.

*

"..."

보이는 것은, 눈부시게 빛나고 있는 하얀 달이었다.

군데군데 박힌 하얀 점들은 반짝거리며 하늘을 빛내주고 있었다.

그러니까, 이걸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

저 앞에서, 날 땅에 내려둔 한서우가 끊임없이 마수들을 베어나가는 모습이 보인다.

검이 한번 휘둘러질 때마다, 성스럽다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로 희고 노란 검격이 전장을 따라 퍼져나가고, 귀가 먹먹해질 정도의 굉음이 주변을 휩쓴다.

검격 한번 한번 마다, 검었던 하늘은 쪼개지고, 붉은 달은 잔해가 되어 흩날린다.

말 그대로였다. 하늘이 무너졌다, 라는 말로밖엔 표현할 수가 없었다.

엘로힘이란 것이, 과연 한서우가 무엇인지, 누구인지, 어떤놈인지 예상은 하고 코어를 여기서 조합할 생각을 한걸까?

자칫하다 잘못하면 오히려 그 강대한 힘이 세계의 중심에 넘어간다는 걸, 모르고 있었을까? 그 방심의 결과가 저 앞에 보이고 있었다.

과연 엘로힘은 뭘까.

아는 건 어디까지고, 모르는 건 어디까지일까.

잘 모르겠다.

"루시, 정신차려, 자면 안돼!"

어느샌가 일어나있는 성화연은, 자꾸만 눈이 감기려는 내 볼을 착착 쳐서 깨운다.

지금은 좀 자고싶지만, 그러면 안된다는 걸 알고 있다. 자면 안된다.

전장의 소음 때문인지, 아니면 뭣 때문인지는 몰라도 소리가 제대로 들리진 않는다.

저 앞에서 빛이 한번 번쩍일때마다, 성화연의 얼굴도 함께 빛난다.

고개를 돌려 다시 한서우쪽을 바라봤다.

확실히, 장관이긴 했다.

저 한쪽에서는 마스가 일으키는 푸른색의 불꽃이, 저 한쪽에서는 한서우가 일으키는 새하얀 검격이. 저 너머에서는 누군지 모를 초상능력자가 터뜨리는 거대한 폭발이. 또 그 너머에서는 누군가를 살리기 위한 베리어가.

파동처럼, 널리 퍼져나갔다.

방금 전 보여줬던 그 올곧은 표정이 마냥 허세만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마음가짐마저 변하니, 저렇게 주저없이 휘두를 수 있는거겠지.

영웅에게 후회와 속죄란 필요 없다고, 그렇게 말했다.

그저 더 많은 이들에게 행복을 가져다주고, 그저 더 많은 이들에게 미래를 볼 권리를 주는것이 영웅이라고.

내 말에, 마음속 한구석에 얽매여 나아가지 못한 소년은 변했다. 나를, 친구를 지키겠다 다짐하며.

뭐, 부끄러운 말이긴 하지만... 한서우나 성화연에게, 난 생각 이상으로 소중했던 사람인가보다.

좋은 일이었다.

­쿠구궁!

폭음은 곳곳에서 들려왔다.

그러다 문득 느껴짐 이질감에 고개를 이리저리 돌려보니 있어야 할 사람이 없는게 보였다.

"...성화연..."

"응, 루시! ...불렀어?"

"...델리지아는 어딨어...?"

"...누구?"

"그 거대한 아저씨 있잖아..."

"......잘 모르겠어. 내가 깨어났을땐 없었는데..."

그러고보니, 해방자가 근처에 있다고 했던가. 일단 걔들은, 델리지아의 말에 따르면 아군이었다.

믿을 순 없지만, 적어도 만나자 마자 해를 끼치진 않은걸 보면 적대적이지는 않을거다.

근데 걔들은 대체 다 어디가고 이곳엔 우리들만 있는걸까.

타오르는 전장의 풍경을 뒤로, 저 멀리 있는 밤하늘을 바라봤다.

***

델리지아는, 나는 곧바로 본래의 목적지로 달려왔다.

기대했던 빛의 기둥은 없고, 그저 칙칙한 금발의 꼬맹이만이 처량하게 절벽 끝에 서있었다.

그 모습을 보자 대강의 상태는 짐작할 수 있었다.

저 앞에 굳게 솟아있던, 수km는 될 법한 산은 뜯겨낸듯 통째로 잘려나가있었다.

하늘 중앙에 떠있는 붉은 달이 보인다.

체념한체 절벽에 걸터앉아, 주머니에 집어넣고 온 검은덩어리를 손에 쥐었다.

"...상당히 허무하군."

"저지른 악행에 비하면, 분에 넘치는 행복이었지만 말이야."

잿가루밖에 남지 않은 루스리아의 유해를 절벽 아래로 흩뿌렸다.

적어도 마지막엔, 자신의 바람대로 이용되고, 원하는 사람이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걸 봤으니까.

루스리아는 분에 넘치는 행복을 받고갔다. 그 점이 부러웠다.

옆에 서있는, 루시 정도의 키인 금발의 작은 소년이 애늙은이처럼 말한다.

"...델리지아라고 했었나."

"그렇다."

"...엘로힘이, 그 전장보다 이쪽을 더 위험하게 여겼다는건 알고 있었겠지?"

"당연하다. 그러니 나오자 마자 바로 이곳으로 튀어온 것 아니겠나?"

"안타깝게도, 이미 핵심은 실패했다. 봉인이라는 건, 역시 어그로가 너무 강해."

발걸음을 옮겨 절벽 아래를 바라봤다.

산 전체를 필두로 만든 거대한 마법진은 산을 구성하는 수백 입방미터의 돌덩어리들과 함께 흔적도 없이 찢겨나간지 오래였다.

저 멀리 있어야 했을 붉은 달은, 저 하늘 위에 떠있었다.

죽임이라는 것 조차 불가능해, 봉인이라는 차선의 수를 썼던건데, 이것마저 실패했다.

그럼 남은건 무엇이겠는가?

꼬맹이를 향해 물었다.

"...훗날을 도모해야하는건가?"

"루시를 믿어보는 수밖엔 없을 듯 한데...어차피, 불가능하다. 엘로힘을 막는다는건 너무나 과분한 목표였는지도 몰라."

"..."

"뭐, 딱히 절망감 따윈 들지 않네. 바뀌지 않는 미래란건, 이미 알고 있었으니 말이야."

시체라는 것들도, 많이 보면 익숙하다.

절망이라는 감정도, 오래 겪으면 익숙하다.

자신은 쾌락만을 쫓으며 살아왔기에, 그런 심오한 감정따윈 이해 못할게 분명하다.

하지만, 광대라는 조직이 해체되었을 때 느낀 내 상실감이. 가족이, 찢어졌을때 느낀 그 상실감이. 그것과 비슷하리라 생각하며 공감하는 흉내라도 내주었다.

"지금부턴 어떻게 할거지?"

뒷짐을 지고 서있는 꼬맹이에게 물었다.

"해방자는 이미 저 본거지 쪽으로 지원가기 시작했다. 이곳엔 가망이 없다고 판단했지. 너도 차라리 그곳에 남아있다면, 더 편했을텐데 말이야."

"그걸 말하는게 아니다. 엘로힘이라는 것을 어떻게 처리할것이냐 물었다."

"...안타깝지만, 이제부턴 우리가 손댈 영역이 아니야. 코어나, 루시라면...적어도, 가망은 있겠군."

"그런가."

붉은 달을 올려다본다.

피와도 같은 붉은색이었다.

***

검은 파도는 흰색의 파도가 되었고, 절망에 빠진 울음소리는 희망을 바라는 함성이 되었다.

그 중심에는, 한서우가 있었다.

후회라는 감정을 잊지 않은 채, 미래로 나아가고자 하는 다짐을 새겨둔 한서우가.

새하얀 섬광을 흩뿌리며 전장을 쓸어나갔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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