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5화 〉 1부 61. 섬광
* * *
벽이 부서진다. 재생될 틈도 없이 부서져 산산이 찢겨나갔다.
그리고, 그 너머로 걸어나오는 두명의 인영.
"...마스?"
한서우가 날 껴안아든채, 얼빠진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얼굴을 찡그리며 고개를 돌려 살펴보니, 온몸에 피를 흠뻑 뒤집어쓴 마스가 보였다.
"한서우, 이새끼...드디어 찾았네."
"..."
그것보다, 마스의 뒤에서 따라나오는 저 거대한 체구의 사내를 보고 더 놀랐다.
왜 델리지아가 여기 있는건데? 아니, 물론 성화연이 델리지아가 해방자에 속하게 됐고, 델리지아가 이곳까지 들어왔다는 걸 들었기에 알고는 있었다.
중요한점은, 왜 쟤가 마스랑 같이 나오는가였다.
델리지아는 내 꼴을 한번 보더니, 피식 웃으며 말했다.
"...결국, 실패한 모양이군."
쿨럭. 입 안에서 피가 한번 더 쏟아져 나왔다.
안되겠다. 한서우의 옷에 피가 너무 많이 쏟아진다. 한두방울이면 몰라도, 이렇게 혈액이 옷을 젖게할 정도가 되면, 불쾌감이 상당히 심했다.
손을 흔들어 한서우에게 내려달라고 할 참이었지만, 안타깝게도 나에겐 그정도로 여유가 있진 않았다.
다시한번 심장을 중심으로 터져나오는 엄청난 통증에, 한서우의 옷깃을 더 강하게 쥐어잡으며 신음을 참을 수밖에 없었다.
"루시는 왜 그 모양이야."
"...미안."
"...뭐?"
마스가 의아하다는 듯 묻는다.
잠시 날 유심히 살펴보다가, 뒤이어 저 멀리 떨어져 기절해있는 성화연을 발견하고선 황급히 뛰어가 부축하기 시작했다.
"뭔 일이 있었던거야?!"
"...미안, 미안해..."
한서우는 대답대신 계속해서 미안하다는 말만 반복했다.
누구한테 하는 말일까. 심장 뽑아버린게 적어도 자기 의지는 아닐텐데, 이런걸로 화낼거라고 생각한건가?
"...알면, 빨리...움직여 이새끼야...!"
고통에 이를 악물며 말했다.
지금 상황이 어찌된 상황인진 몰라도, 저 망할 벽이 부서졌다.
마수가, 재생되지 않고 죽어가기 시작한거다. 그렇다면, 지금을 기회로 최대한 빨리 움직여야했다.
"하지만, 루시...내가..."
"닥치고 빨리...움직이란 말이야...! 니가, 니가 원해서 한것도 아니잖아..."
"내가 약해서..."
"자꾸 질질 짜지 말라고...씨발련아..."
"...으윽."
물론 정신에 갈 데미지가 크다는 건 알고 있었다. 아무리 자신의 의지는 아니라 하더라도, 내 심장을 지 손으로 뽑아버렸는데 과연 정신이 멀쩡할까.
"한서우..."
다시 한번 힘겹게 몸을 움직여, 머리를 쥐어박았다.
한서우의 볼에서 흐르는 눈물이 머리 위로 떨어진다.
"...알면, 지금부터 잘하라고... 계속 자기탓만 하면서 제자리걸음만 하지 말란말이야...!"
오글거리는 말인건 알고 있다. 근데, 지금은 딱히 이 말밖엔 생각이 나지 않는다.
지독한 자기혐오에 빠진 인간을 어떻게 해야 되돌려놓을 수 있을까?
한서우는, 지 스스로 히어로가 되겠다고 한 놈이다.
적어도, 마음 하나만은 사람들이 원하는 그 마음 그대로, 완전한 이상향의 모습으로 갖추어진 완벽한 놈이라는거야.
근데, 아무리 그래도 자기 스스로 확신하지 못하면 그게 다 무슨 소용이야?
아무리 세계관 최강의 무력을 갖고, 의지를 갖고 있더라도, 자기 스스로 확신조차 못하면 그게 다 무슨 소용이냔 말이다.
한서우는 지금, 날 못지킨것에 대해, 자신때문에 작전이 실패로 돌아갈 뻔한 것에 대해 후회를 가진채, 끝없이 자기혐오만 하고있을 뿐이다.
...뭐, 뻔한 말이다.
후회하는건 괜찮다. 딱히 별 상관 없어. 근데, 그 후회에 얽매여서 본인의 다짐조차 망각한채 앞으로 나아가질 못하는건, 분명 문제있는거다.
"..."
적어도, 난 이런식으로 한서우에게 말하려 했다.
하지만 목소리가 쉼없이 바들바들 떨렸기에, 제대로 전달됐을지는 의문이다.
델리지아가 날 이상한 눈길로 바라보는게 느껴진다.
고통은 점점 심해져, 마침내 뇌리마저 다 태워먹을 지경이 된다.
한서우의 얼굴을 바라본다.
여전히, 이전과 다름없는 슬픔에 가득 찬 얼굴이다.
그럼에도, 입 하나만은 굳게 다물고 있다.
이전의 그 찐따같던 한서우처럼, 중얼중얼 자신만 알아듣는 속죄의 말만 중얼거리는게 아니라, 마치 무언가 다짐한것 처럼.
한서우의 가슴을 주먹으로 퍽 쳤다.
"...알면, 빨리...움직여..."
한서우는 눈물을 머금은 눈으로 웃음을 띄우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나저나.
이 심장은 어떻게 해야하지? 다시 뽑아버려야 하나? 코어와 결합해버린 심장이 나에게 어떠한 영향을 줄지 알 순 없다. 하지만, 엘로힘의 최종 목적이 이것이었다는 걸 생각하면, 적어도 그 대검과 결합된 심장이 지금 내 가슴 한가운데에 쑤셔박혀 있다는건 결코 좋은 일은 아니었다.
"...한서우, 뽑아."
"...응?"
"뽑으라고, 코어."
"...!"
눈이 흔들린다.
이젠 자신의 의지다. 심장을 뽑는건, 자신의 의지였다.
신경 안쓴다고 말하지만, 그럼에도 고통이 어디 갈 것 같은가? 아픈건 똑같다.
고통의 강도만 다를 뿐이지, 이미 더럽게 익숙한 감각이었다.
으득, 하며 한서우가 이를 갈았다.
적어도 이전의 겁쟁이같던, 그런 모습은 아니라 어딘지 안심이 됐다.
다시금 가슴속으로 한서우의 손이 뚫고 들어오는게 느껴진다.
저 멀리서 놀라며 외치는 소리가 들리지만, 다 괜찮다고 소리쳐준다. 물론 울면서 이런말 하는것만큼 신뢰 안가는 말도 없겠지만 말이야.
푸확, 피가 한가득 뿜어져 나오며 심장이 뽑혀나왔다.
검은색의 심장을 쥐어 터뜨린다.
푸른색의 안개가 다시금 주변을 가득 메우고, 한서우의 손에 남아있는건 타르덩어리.
타르덩어리는 이내 화사한 빛을 내며 대검의 형상으로 변환하기 시작했다.
눈물은 소용없다.
그럼에도, 딱히 눈물을 흘리는게 잘못된 일은 아니다.
흐릿해지는 의식 뒤로, 한서우가 눈물을 닦는 모습이 들어왔다.
내 피가 한가득 묻은 대검이 화사하게 빛나는건 기분탓이겠지.
*
결과적으로, 근처의 마력이 모두 사라진것이 원인이었다.
연구소가 붕괴되기 시작한것은, 검은 덩어리로 변해버린 루스리아를 활용한 마스의 활약이었던 것이다.
시간은 짧기에, 설명은 빠르게 진행됐다.
루스리아를 발견한 과정부터, 결국 스스로의 감정에 못이겨 유리를 깨부수고 검은 덩어리를 꺼내기까지.
그 검은 덩어리의 사념이 마스의 머릿속으로 전달된 것부터, 자신의 마지막 역할을 다하고 사라진 그때의 일까지.
마력의 소멸이라는 특성을 이용하여, 마력 그 자체의 덩어리인 마수를 근본부터 무력화시킨거다. 인간들이 연구자를 처리하는 방식과 비슷했다.
루스리아는 쓰레기같은 새끼였다.
아무튼, 그 쓰레기에 걸맞는 최후를 맞이한 것이다.
물론, 쓰레기라도 마지막에 울어줄 사람 한명쯤은 있었겠지.
델리지아가 그런 사람이었고.
마스는 딱히 루스리아의 죽음에 마음의 동요가 일은 것 같진 않았다.
"나중에... 이건 나중에 자세히 얘기하자."
그래도, 마음속 한구석에 덩어리가 진 것 같은 느낌은 분명히 있었을 것이다.
아무튼 난 그다지 동정심은 들지 않았지만 말이야. 쾌락살인마한테 무슨 동정심을 느낀단 말인가.
대충 그런 놈의 마음에 들은 마스가, 그때 루스리아의 근처에 있었다는 걸 다행히 여겨야 했다.
"해방자가 기다리고 있다."
델리지아 또한, 믿을 수 없다.
그럼에도 현재는 아군이기에. 공통의 적이란게 분명히 있었기에 결국엔 함께 행동하기로 했다.
기절해버린 성화연은 델리지아가 안고 이동하기로 했다.
마스가 들 수도 있고, 서우가 들 수도 있었지만 마스는 애초에 초상능력 자체가 발화이기에 안는것 자체가 불가능했고, 한서우는 이미 날 껴안고 있었기에 더이상 추가가 불가능했다.
결국은 꺼림칙하지만 그래도 델리지아에게 맡길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근데, 무력으로 치면 나보단 델리지아가 수십배는 더 위일텐데, 차라리 내가 들고 델리지아한테 싸우게 하는게 어때?"
델리지아가 방금 전 벽을 쳐부순 모습을 떠올리며 마스가 말했다.
"...난 딱히 별 상관 안한다."
"적어도 성화연은 금방 깨어날테니까...딱 그때까지만 이 아저씨가 업고가는걸로 하자."
제발 빨리좀 움직이기 시작해줬으면.
이제는 목소리조차 나오지 않는다.
결국 고통을 견디지 못한 내가 신음을 흘리기 시작하자, 황급히 발을 떼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시야가 흔들린다.
눈물로 흐릿한 시야지만, 저 위로 스쳐지나가는 전등들은 어렴풋이 보인다.
엘로힘은, 무언가 잘못됐다는 걸 눈치챘을 것이다.
엘로힘도 모든 걸 알고 있는걸까? 잘 모르겠다. 모든걸 다 알고 있었다면, 지금의 이런 상황도 충분히 예측하고 대응했겠지.
처음부터 농락할 생각따윈 배제한채로 진심으로 나왔다면, 진즉에 모두를 찢어죽였을 수도 있고.
그래도, 한서우가 있으니까. 그때도 잘 헤쳐나가지 않을까?
"..."
아무래도 의존증은 나였나보다.
콰앙!
전투가 시작된 모양이었다.
섬광이 몇번 번쩍이고, 날 껴안은 한서우의 한 팔이 심하게 들썩이는게 느껴졌다.
***
품안에 안긴 루시가 끔찍한 신음을 흘리며 소매를 더 강하게 쥐어잡는게 느껴진다.
손에 닿는 루시의 복부가 들썩거린다. 헐떡거리는 숨소리가 귓가를 가득 메웠다.
후회따윈 소용없다는 말이, 죄책감마저 지워주진 않는다.
그럼에도, 나는 다짐했잖아.
더이상, 제자리걸음은 없다고.
더이상, 후회만 하며 뒤를 바라보지 않겠다고, 분명 루시가 그렇게 말했다.
사람은 나아가는 존재다.
나아가지 않는다면, 그건 그저 시체나 다름없다.
언제나, 기존과는 다르게. 현재보다 더 나은 미래로.
모든게 절망에 빠졌다 하더라도, 언제나 밝은 것이란 존재하기 마련이니까.
눈앞에 뚫린 구멍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마수들을 마주보며, 오른손으로 대검을 쥐어잡았다.
한손으로 잡기엔 버거운 거대한 대검이지만, 해내야한다. 해볼게, 라는 말 따윈 없다. 이것은 반드시 해내야만 하는 일이었다.
"케헥..."
다시한번 옷에 루시의 피가 젖어들었다.
까득,하며 이가 갈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걱정하지마."
더이상, 이전과는 같지 않을거라고. 더이상, 다짐만 하며 살진 않겠다고.
그렇게 약속했다.
눈앞에 눈부신 섬광이 보이기 시작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