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4화 〉 1부 60. 미래
* * *
눈을 떴다.
보이는 것은 나의 방이었다.
루시이기 이전, 신우주였던 시절의 방.
거실로 나오자 바깥에서 흘러들어오는 노을빛이 가득 메우는 폐허가 보인다.
발걸음을 옮겨 건물의 옥상으로 올라갔다.
보이는 풍경이라고는 그저 멸망한 도시 뿐.
회색빛의 철근과 콘크리트들만이 여기저기 솟아 실루엣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사람하나 보이지 않는 황량한 풍경이었다.
하늘에서 나풀나풀 내리는 눈송이가 그런 도시를 덮어가기 시작했다.
눈을 감았다.
그리고, 다시 눈을 떴다.
보이는 것은, 검은색의 심장.
마수의 그것과도 같이, 하지만 조금 더 순결한 것.
조금씩 푸른색의 연기가 새어나오기 시작했다.
몸이 한번 들썩이고, 심장이 있던 자리에는 강제적으로 그 타르덩어리가 쑤셔박혔다.
온몸을 태울듯한 고통에 머릿속에서 드는 한가지 생각이 있었다.
'...좆됐네.'
난 좆됐다.
주인공을 믿지 말았어야 했던걸까? 아니, 이게 문제가 아닐텐데. 애초에 엘로힘인지 뭔지 그새끼는 워낙에 뒤에서 야비하게 모략짜고 하는걸 좋아하는 놈이었으니까.
이렇게 정신을 조종해서 뒤통수를 칠거라곤 미리 예상해뒀어야했다. 한서우라면 버틸거라 생각했던게 너무 안일한 생각이었을 수도 있다.
나조차도 못버티고 정신이 나가버렸는데, 내가 하지 못하는걸 남은 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는 것 부터가 너무 이기적이었던거야.
대검이 복부에서 살을 찢고 솟아나왔을때, 정말 심장이 떨어지는 줄 알았다. 아니, 물론 떨어져 나오긴 했다.
차라리 해방자 꼬맹이에게서 받은 기억치료 이전에, 고통 대신 느꼈던 간지러움이 그리워질 정도로 끔찍한 고통이 찾아왔다. 온몸이 찢어발겨지는 느낌은 꽤나 오랜만이었다.
사실 고통대신 간지러움이 느껴졌다는 것 만으로 내 정신이 망가졌다는걸 반증한거니까, 결국 고통이라는 감각이 그나마 낫긴 했지만 말이야. 그래도 고통이란 감각은 얼마나 많이 느끼던 좆같은 감각인건 확실했다.
도대체 이놈의 몸뚱아리는 어떻게 된건지 날붙이 하나 없이 그냥 대충 손 한번 쑤셔박으면 심장이고 내장이고 다 꺼낼 수 있었다. 물론 상대가 델리지아나 한서우같은 탈인간급 피지컬의 소유자라 어쩔 수 없다곤 해도 말이다. 내 몸속의 내용물을 보는게 좋을리가 없지 않은가.
아무튼, 현재.
코어와 결합한 심장이 강제적으로 가슴속에 쑤셔박아진 시점.
정말로, 정신이 나가버릴 것만 같다.
아니, 이미 나갔다.
정신이 나갈것같은 일만 벌써 수십, 수백번을 겪었는데 멀쩡하다고 말하는게 사실 무리수 아니었을까? 내 멘탈이 정말 그렇게 강했던건지 의구심이 들기 시작했다.
몸뚱아리는 죽어버렸음에도 고통이라는 감각만은 그대로 느껴졌다.
비명조차 나오지 않았다. 그냥 웅크려 몸을 바들바들 떨고만 있었다.
지금 입고있는 옷의 모양이 모양인지라, 뚫려있는 가슴이 너무 적나라하게 보인다. 그 속에서 검은 심장이 스스로 꿈틀거리며 다른 장기들과 연결되기 시작했다.
한서우 이 빌어먹을 새끼. 아니, 엘로힘 이 빌어먹을 새끼. 정말로, 미칠듯한 고통이다. 살려줘요.
쥐어짜듯 일어나 고개를 들어 한서우의 얼굴을 바라봤다.
흘러나오는 눈물때문에 흐릿해서 제대로 볼 순 없지만, 그래도 웃고있다는 것 하나만은 확실했다.
야비한 웃음이었다. 정말, 빌어먹을정도로 짜증나는 표정이었다.
빠각!
그렇기에, 머가리 한번정도는 날려줘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겨우겨우 팔을 뻗어 한서우의 머리를 붙잡고는, 있는 힘껏 박치기를 날렸다.
"정신... 차려... 이새끼야...!"
...허
빠각! 빠각!
한번은 부족하다. 적어도 수십번은 날려서, 이마가 깨질때까지 쥐어박는다.
처음 몇번은 그저 웃으며 받아주던 그 빌어먹을 새끼조차, 점차 표정이 일그러지는 모습이 보인다.
'생각하자, 생각해.'
지금 한서우가 무슨 상태지?
일단, 엘로힘이라는 것에 대해 지금껏 경험해본 걸 떠올려보자.
크로체와 연구자. 그 자들은 분명, 엘로힘의 본신인것처럼, 엘로힘이 그자리에 강림한 것처럼 행동했어.
하지만, 해방자 꼬맹이 말에 따르면 그건 그냥 강림이 아니라 기억의 전달이었을 뿐이잖아?
그저 뇌속에 자신의 기억을 집어넣고, 자신인 것처럼 행동하게 했을 뿐이지.
연구자들이란 족속들은 그 사실을 잘 알고있었던 모양이지만, 크로체는 몰랐기에 자기 자신의 정체성마저 망각한채 정말로 엘로힘처럼 행동한 모양이었다.
아무튼, 이 사실을 볼때 엘로힘이란 것이 그렇게 쉽게 이곳에 강림하지 못한다는 건 확실했다. 세계를 뒤엎어버린 연구자들에게조차 강림이 아니라 그저 기억의 전달만을 했을 뿐이니.
어쩌면 아예 불가능 할 수도 있고.
연구자들은 딱히 엘로힘의 그 행동에 대해 저항하진 않았던 것 같아.
이곳 내부에서 만난, 그 연구자. 엘로힘에게 버려졌다고 말한 그 연구자의 태도는 혐오라기보다는 슬픔에 가까웠잖아.
애초에 연구자들이란 사람들은 원본부터가 제대로된 인간은 아니었을게 분명했다.
그렇다면, 저항한다면. 만약에 정신이 침식되는것에 저항한다면, 이미 들어온 엘로힘의 기억도 모두 뒤섞어버릴 수 있는거 아닐까?
의지드립이긴 하지만, 그럼에도 일단 해볼만한 가치는 있잖아.
정신공격이라면, 정신력이 강하면 되는거잖아?
하지만 난 한서우의 정신력에 간섭할 권한도 권리도 없다. 이건 그저 한서우 혼자서 해내야만 하는 것이었다.
가슴에서 뿜어져 나오는 피가 한서우의 옷을 흠뻑 적셔가는 모습이 보였다.
시야가 올라갔다 내려가고, 한서우의 이마에서 피가 흘러나오기 시작하는게 보였다.
이마의 통증은 크지 않았다. 그보다는 배와 가슴의 통증이 더 심했다.
'생각하라고...'
객관적으로, 한서우는 정신력이 강한가?
적어도 주인공이니까, 나는 강할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전에 보여준 모습. 나에게 조금씩 의존하기 시작했던 그 모습이 떠올랐다.
한시라도 날 옆에서 떨어뜨려두지 않으려던 그 모습.
어쩌면, 주인공이라고 정신력이 강할거라고 생각한게 오산이었는지도 몰라.
주인공이기 이전에, 한서우는 지금 그냥 19살 학생일 뿐인데 말이야.
계기도 뭣도 없이, 한없이 강철멘탈일거라고 지레짐작했던거야.
지금부턴, 이렇게 생각하자.
한서우 또한 도움이 필요한 존재다. 주인공이라고 혼자 다 해결할 수 있는게 아니라, 한서우도 옆에 누군가가 필요한, 불완전한 존재인거야.
욕이 아니다. 한서우 또한 인간미 있는 하나의 사람일 뿐이라고 생각하는거다.
한서우는 저항하고 있을거다. 믿는다.
지금의 한서우는, 분명 엘로힘이라는 것의 정신침식에 대항하고있을거다.
의식만 남아있다면, 상관없어. 어떻게던 돌아올 가능성은 있는거잖아?
한서우는 나에게 대검을 쑤셔넣은 뒤 분명 잠시간은 정신이 돌아온 것처럼 보였다.
그렇다면, 전기충격식으로 한번.
정신을 리셋시켜보자.
심장충격기같은 원리로 한번 해보자.
완전히 끊었다가, 정신을 재시작시켜보는거야.
무식한 방법이다. 알고있다.
애초에 이게 성공한다는게 말이 안된다.
정신침식이라는 것의 원리조차 모르는데, 마구잡이로 충격먼저 주는 방식으로 고친다니?
'생각하자. 생각.'
내가 겪어봤잖아. 떠올려라. 과연, 이게 맞는 방법인건지.
'씨발, 몰라!'
복잡하게 생각할거 없어.
그냥, 엿이나 먹으라 그래.
미친듯이 아픈데, 제대로 생각을 한다고?
결과는 같다.
그냥.
믿어.
빠각!
이 세계의 중심이, 얼마나 잘났는진 몰라도, 그냥 믿어.
인간미던 뭐던, 한서우는 지금 무조건 해내야 한다.
눈물로 얼룩진 시야에, 한서우의 얼굴이 들어온다.
웃음은 일그러짐으로, 일그러짐은 점차 고통으로 변해간다.
고통은 슬픔으로, 슬픔은 후회로. 후회는 다짐으로.
다짐은 곧 의지.
하고자 마음먹으면, 해내는거야.
정신이 점차 흐릿해진다.
너무 머리를 박은건가?
아냐, 그건 아닌 것 같은데.
마침내, 힘을 잃고 그대로 축 늘어졌다.
한서우또한 고통에 기절한건지, 지친건지 모르겠지만. 그대로 쓰러진 모양이었다.
한서우의 가슴속에서 뛰는 심장이 귀를 통해 느껴진다.
자꾸만 눈에서 흘러나오는 눈물이, 피와 섞여들어간다.
"윽...으흑..."
한서우가 울기 시작했다.
고쳐진건가? 혹시, 성공한걸까.
믿으라고 했음에도, 아직까지 난 의심하고 있는건가?
그냥, 그냥 단순하게 생각하자.
날 껴안은 팔이 더 강하게 조이는것이 느껴진다.
눈앞은 점차 흐릿해지기 시작한다.
한서우는 몸을 일으켜 날 품에 껴안고 울기 시작했다.
몸에서 푸른색의 연기가 뿜어져나오기 시작하는게, 마치 무슨일이 일어날 것만 같은 전조라도 된 마냥. 점차 건물 내부에 울리는 진동은 커지기 시작했다.
그러다, 어느 한순간 주변의 마력이 싸그리 사라지는 것이 느껴졌다. 어떻게 사라지게 했는진 모른다. 아니, 애초에 마력이 사라지는 현상이란 루스리아의 그것을 제외하면 본 적이 없었는데. 루스리아가 있는건가?
"...커헉..."
그 이변이 뭔지 지금 내가 신경쓸 틈은 없다.
검은색의 심장은, 두근두근 뛰기 시작하며 온몸에 마력을 공급하기 시작했다.
인간의 신체와는 달리, 수면형 마력이라는 것이 존재조차 하지 않는 마수의 육체.
내 수면형 마력은, 마수의 육체를 가지게 되며 전부 활동형 마력으로 변환됐고, 그를 통해 인외의 영역에 도달했다.
그렇다면, 이 모든것은.
이 모든 마력은, 대체 무엇을 위한걸까.
의지를 가진자가 힘마저 있으면 바라는대로 모든 것을 이룰 수 있다.
마력은 힘이고, 사용자는 의지였다.
안타깝게도, 나에겐 자아가 남아있다.
무너지기 시작한 자아임에도, 여전히 남아있었다.
한서우가 날 껴안은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벽 너머에서 부서지는 소리가 들리고, 마침내 연구소라는 마수는 분해되기 시작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