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2화 〉 1부 58. 붕괴
* * *
흰색의 연구복이 옆에 떨어진 붉은 고깃덩어리.
이곳에 와서, 가장 많이 봤던 잔해들.
정보를 조합해보니 얼추 답은 나왔다. 다만 그 답이 너무나 모호해서 과연 진실인지 아닌지 조차 헷갈릴 뿐이지.
아무래도, 이 붉은 고깃덩어리들은 전부 연구자(였던 것)들 인 듯 했다.
하얀 연구복이 언제나 근처에 떨어져있던걸 발견했을때부터 알아 챘어야했나?
대체 무슨 짓을 당한건진 몰라도, 연구자들 전부가 이 꼬라지라면 작전은 이미 성공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게 끝이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분명, 연구자들은 누군가의 분신이라고 했잖아.
분신이 맞나?
이전의 해방자 꼬맹이에게서 들었던 말에 따르면, 연구자들은 소위 말하는 '초월자'의 분신.
그 초월자가 누군진 몰라도, 좋은 상태는 아닐거라 판단했다.
분신들이 이 꼬라진데, 본체라고 멀쩡하겠어?
"..."
하지만, 그렇게 말한다면 이전에 만난 그 마수... 아니, 연구자의 태도는 상당히 이상했다.
마치 모든걸 체념한 듯한, 혹은 속죄하는 듯한 그 태도는 분신일 경우 도저히 납득할 수가 없는 태도였기 때문이다.
만일 연구자들이 일반적인 사람이고, 정신을 조종당해 어쩔 수 없이 그렇게 행동하게 된거라면 모를까.
역시, 그 초월자의 특성이 정확히 어떤건지를 모르니 제대로 알 길은 없다.
마지막의 그 유기견이라는 말을 생각해보자. 자신을 버려진 무언가에 비교했다.
그렇다면, 혹시 연구자들은 그 초월자로부터 버림받아 이런 꼴이 된건가? 허락되지 않은 힘을 탐하기 위해 그 초월자와 계약했다가, 그에게 뒤통수를 맞아 버려진 걸 수도 있어.
뭐가 어찌됐든, 이제 주 적은 연구자들이 아니라는 사실은 확실했다.
연구자들의 본거지가 이꼬라지면 나머지는 어떨진 상상 안해도 뻔했기 때문이다.
쿠르르...
건물에 울리는 진동이 점차 커지기 시작했다.
어디서 들어오는지도 모를 굉음이 건물 내부를 가득 울린다.
아마 바깥에서는 싸움이 점점 더 격화되고 있는 모양새였다.
마수들이 계속해서 몰려드는건가?
어떻게든 빨리 그 초월자란 녀석을 조지고 나가야됐다.
여기 안에서도 바깥에 마력을 흩뿌려 마법 비슷한 걸 쓸 수는 있지만, 그랬다가는 누가 휩쓸릴 지 모른다.
아군도 적군도 모두 다 쓸려나갈 수 있다는 소리였다.
앞에 흐뜨러져있는 붉은 고깃덩이를 기억에서 지우고, 다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
건물 내부를 한참 돌아다녔다.
이 층마저 이제 어느정도 조사는 다 된 상태.
무전기를 통해 한서우에게 연락을 해보려 했지만, 받질 않는다.
이 층 내부에서야 전파가 오락가락하니 통신도 두절됐다 연결됐다 반복한다는 걸 알고는 있었지만, 이렇게 오랫동안 서로 연락이 없는건 이상했다.
마지막으로 한번 더 통신을 보낸 후, 연락이 되지 않는다는 걸 깨달은 난 심호흡을 하며 눈앞의 광경과 마주섰다.
찬공기가 하강기류를 만들어내며 건물 안으로 가득 퍼진다.
천떼기라도 구해서 둘러싸야하나 싶을 정도로 추운 바람이었다. 이럴 줄 알았다면 이런 옷은 입지 말걸.
추위또한 고통의 일부였다는 걸 깜빡했다. 이전의 난 고통이란 걸 못느꼈으니, 추위또한 느끼지 못하고 잘도 이런 옷을 입고 다닌거겠지.
병신.
고개를 뻗어 저 위를 바라보자 붉은색의 달이 세상을 주시하는 눈처럼 떠있는 것이 보인다.
여전히, 위치는 이동하지 않은 채였다.
콰앙!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갑작스럽게 울려퍼진 굉음에 저 아래를 바라봤다.
모든 걸 집어 삼킬듯한 거대한 검은색의 구덩이가 저 아래에서 아가리를 벌리고 있었다.
그리고, 방금 전 눈앞에서 쏜살같이 추락했던 무언가.
시야를 확장시켜 아래를 주시했다.
움직임이란 없었다. 아마도, 바깥에서 벌어지는 전투의 잔해물인 듯 했다.
하늘을 날아다니는 마수야 사방에 널리고 널렸으니까.
솔직히 이런 인원으로 막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던게 오산이었을까.
애초에 가드가 있다고 해도, 마수들을 뚫지 못해 바깥으로 나가지 못했던건데.
불안감을 떨쳐낸다. 의심이란 아무 소용없다.
조심스레 연구소 한가운데에 난 거대한 구멍 밖으로 몸을 빼내본다.
파직!
"으앗."
나갈 수가 없다.
무언가에 막힌 듯, 괴이한 소리와 함께 튕겨나온다.
혹시나 싶어 옆에 떨어져있던 형광등의 잔해를 집어 멀리 날려보니, 잘만 날아간다.
설마 생명체만 못나가는건가?
타당한 추론이었다.
만약 생명체가 전부 이곳으로 빠져나갈 수 있었다면, 시간이 걸릴 지라도 진작에 다 이곳으로 빠져나가거나 들어오고 말지.
이곳 내부의 전파방해 현상때문에 바깥과는 연락할 수 없지만, 이곳으로 끌려들어온 우리를 봤으면 진작에 모두 이 공간을 통해 건물 내부로 들어왔을 터였다.
"으으음..."
하지만, 이것 또한 의심스러웠다.
나에겐 일단 평범한 생명체라기엔 특이점이 너무 많았기 때문.
마수만 나가지 못하는 걸 수도 있고, 일정 수준 이상의 마력을 지닌 자들도 못나가는 걸 수도 있었다.
한서우랑 내가 못나가게 하려면 후자가 적합해보였다.
"후우..."
결국, 기다리는 수밖엔 없다는건가.
홧김에 천장을 터뜨렸다.
하지만, 꿈틀꿈틀 검은색의 액체들이 나오더니 다시 재생하기 시작한다.
"빌어먹을 새끼."
초월자든 뭐든.
그냥 좀 나가 죽었으면 좋겠네.
다시 건물 내부로 발걸음을 옮겼다.
시간이 그다지 많이 지나진 않았다.
길어봤자 20분 정도.
한서우를 찾아 돌아다니고 있던 내 귀에,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높은음의 귀가 째지는 듯한 소리.
"...성화연?"
건물 내부에서 울렸어.
곧바로 소리의 근원지를 향해 서둘러 달려가기 시작했다.
***
루시와의 통신이 끝난 뒤, 건물 내부를 돌아다니기로 결정했다.
우리가 이 땅에 처음 발을 내딛고, 처음으로 들어갔던 그 건물.
또한, 지하에서 참혹한 광경을 봐야했던 그 건물과 너무나도 비슷한 분위기였다.
그렇기에 예상할 수 있었다.
이런 대규모 전이마법에 결국 다 담기지 못하고 떨어져 나갔던 부분이 있는거구나.
그리고 우리가 이전에 발견했던 그 거대한 하얀색 건물은, 이 건물이 전이할때 떨어져 나갔던 부분이었구나.
계단실은 전부 막혀있었다.
그렇기에, 떨어져 나간 그 부분을 통해 이동하자고 생각했고, 바람이 불어오는 방향을 통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중간중간 특이사항이 있을 때마다 자료 검색도 해보고, 여기저기 떨어진 붉은 고깃덩이가 무엇인지 유추해보기도 했다.
하지만 너무 갑작스럽게 벌어진 상황이라 그런지 제대로 파악이 되질 않아서, 붉은 고깃덩이가 연구자들이었다 라는 것밖에는 유추할 수 없었다.
어째서 연구자들이 다 이렇게 되어있는걸까?
루시라면 알고있을까?
모르는게 너무 많았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던 찰나, 병원 중앙의 거대한 공동을 발견했다. 바람이 불어오던 곳으로 발걸음을 옮기자 드디어 바깥과 연결된 통로가 나온 것이다.
윗층으로 올라가야하나, 아랫층으로 내려가야하나 고민하고 있던 찰나,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온다.
"마력이 모인곳은 아랫층이다."
"...?!"
황급히 뒤를 돌아봤다.
어둠에 가려 보이지 않지만, 분명 남성의 목소리였다.
"...누구야."
"...아, 너와는 처음 보는 사이군."
붉은 달빛을 받으며, 어둠속에서 걸어나오는 거대한 인영.
"그냥 델리지아라고 부르면 된다."
"...델, 리지아...?"
익숙한 울림이었다.
어디서 들었는진 알 수가 없었다.
이전에, 루시가 자신의 이야기를 해줬을때 들었던 말인가?
"소속은?"
"......"
"당신은, 적인거야?"
델리지아의 오른팔에 달린 커다란 의수가 철컹거리며 조잡하게 움직였다.
흉터로 가득 찬 그 얼굴이, 붉은 달빛을 받아 음울하게 빛난다.
"...일단 지금은, 해방자라고 해두지. 적이라고 한다면...애매하다고 할 수 있군."
"......뭐?"
"내가 연민이나 우정이라는게 있다고는 생각치 않지만...적어도 난 나만의 집을 찾기 위해 온거다."
"..."
해방자.
윤서아.
나에게 윤서아는, 쓰레기보다도 못한 존재.
그렇기에, 경계를 놓지 않는다.
"...마력이 느껴진다는건 무슨 뜻이야?"
"말 그대로지. 두 애새끼가, 저 아래에 있다는 소리다."
"당신도 공명계열이야?"
"...아, 그렇군. 이런 능력을 그렇게도 부른다더군."
"..."
알 수 없었다.
해방자라고 밝힌 주제에, 어째서 도와주고 있는건지.
"하, 도와줘? 착각도 심하군. 그저 쓸데없는 싸움을 만들지 않기 위해..."
말을 하다 멈추는 델리지아.
"나도 미친게 분명하군. 이건 순해진건가, 아니면 지친건가..."
"..."
천천히 뒷걸음질을 치기 시작했다.
혼자만의 생각에 빠져있을때, 서둘러 이동하기 위해.
그러자 델리지아가 고개를 들어 말한다.
"...넌 찾고싶은걸 찾길 바라지. 나중에 해방자라고 밝히는 사람이 있다면, 무작정 경계하지는 마라."
갈등했다.
과연 저 남자의 말을 믿어야하는지, 아니면 불신해야하는지.
하지만, 저 표정을 알고 있었기에 나는 망설임없이 아랫층을 향해 뛰어내렸다.
후회로 가득 찬 표정.
분명, 내가 지난 2년간 거울 앞에 섰을때 보였던 표정.
동정심인가?
잘은 모르겠다.
다만, 그 표정을 하는 사람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진 내 자신이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으니까.
나도 그냥 처음보는 사람을 믿었을 뿐이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