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0화 〉 1부 56. 루스리아
* * *
눈앞의 형체는, 크로체와 똑같이 머릿속으로 말을 전달한다.
자신을 그저 마수라고만 알고있으라는 그 말을 들어도 별달리 신뢰가 가지 않는다. 아니, 애초에 이런 상황에서 신뢰할 리가 없다.
연구자들의 본거지에서, 스스로 말을 하는 마수가 인간의 형체를 가지고 나타났는데.
적어도 눈앞의 이 형체가 일반적인 마수라고 보기엔 어려웠다. 그렇다고 인간으로 보기에도 너무나...꺼림칙한 느낌.
게다가, 연구자들과 똑같은 꺼림칙한 흰색의 연구복을 입고있었다.
...그래, 느낌이긴 하지만. 눈앞의 이 상대에게선 도저히 생명의 흔적조차 느껴지지가 않는다.
어딘가 분명히 익숙한 느낌이지만, 도저히 그 익숙한 느낌이 뭔지 알기가 어려웠다.
그냥... 눈앞의 이 형체는 검은 덩어리 그 자체다.
그 외에는 도저히 설명할 길이 없었다.
분명 저 인간의 형체도, 원한다면 언제든 바꿀 수 있겠지.
그렇기에 나는, 크로체에게 기억을 전해준 '무언가'. 혹은, 이 모든 사태를 일으킨 장본인이라고 판단했다.
경계를 늦추지 않고, 언제 들어오나 신경을 곤두세우며 말을 걸었다.
"...여긴 왜 나타난거야?"
[그저 내가 오기에 가장 알맞은 곳이라 온거라네. 드디어...시간이 적절하게 찾아온 것 뿐이지.]
"지랄하지마. 원하는게 뭐야?"
[...어차피, 원하는 것 조차 이젠 쓸모가 없다. 우리가 원하던 것이 진정 무엇인지는...이제는 모두 의미가 없어졌을 뿐이지.]
"..."
말하는 내용을 들어보면 꽤나 이상한 내용이었다.
자신을 '우리'라 지칭하고, 이렇게 눈앞에 내가 있는데도, 어떤 욕구조차 내비치질 않는다.
[뭐, 시간이 지나면 알게 될 뿐이라네. 지금은 그게 중요하지 않잖은가? 마지막이라도, 그저 내가 가진 지식을 세상에 방출하고싶을 뿐이라네. 사라진다면 모두 쓸모가 없어질 지식들을.]
"누구 마음대로?"
[원한다면 듣지 않아도 된다. 그다지 중요한 정보도 아니니까.]
중요하지 않은 정보조차도 이렇게 분위기 잡으면서 말해야 하나?
꽤나 허세가 심한 놈들이라 생각했다.
눈앞의 마수가 탁자쪽으로 몸을 돌리자 흰색의 연구복이 펄럭인다.
똑,똑. 검은색의 몸이 조금씩 녹아내리는 모습이 보였다.
[이곳이 어딘지 궁금하겠지. 플라스크는 살펴보았나?]
"..."
이야기에 끌려가는 것이 싫었기에, 그저 입을 다물고 있었다. 애초에 눈앞의 이 마수는 그저 이야기만 전해주는 걸로도 충분했기에, 내가 입만 다물고 있으면 지가 알아서 술술 불 터.
괜한 말을 해서 변수를 만들고 싶진 않았다.
*
[ㅡ애초에 유전자가 변수가 아니었단 걸 알아 차려야했었는데 말이야. 덕분에 썩어 넘치는 이 조각들은 그저 너의 새로운 몸이 되었지.]
"...뭐?"
묵묵히 듣고있다가, 무심코 의문을 흘려버린다.
여기 있는 모든것이, 내 몸이라니?
[말 그대로라네. 여기 모여있는 것들은 그저 너의 유전자 정보가 담긴 수정체일 뿐이고, 배양기에 들어가면 클론이 생성된다는거지.]
클론이라.
그래, 클론.
내가 그저 이렇게 전이당한 것 뿐 아니라, 그 전이당한 이의 기억이 이어진 클론이라는건가?
[그건 아니지. 뇌는 한개 뿐인데, 무슨 굳이 기억까지 이어서 한단 말인가. 게다가 애초에 클론프로젝트는 실패했고 말이야.]
"실패했다니?"
[불멸이라는 특성과, 마수의 방대한 마력이 발현된 것은 너의 뇌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것. 저 수정체를 그대로 배양시켜봤자 마수밖에 안나온다는 소리지.]
"...이런걸 알려줘서 무슨 의미가 있는데?"
[...뭐어, 마지막이니. 이것즈음은 괜찮다고 판단한 것 뿐일세. 솔직히 정신적으로 꽤나 동요할거라고 판단했다만, 그런건 아니었나 보군.]
저건 그냥 있는 그대로의 사실이었다. 듣는다 해도, 정신적으로 동요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어차피 저 말을 다시 해석해봐도, 여기 있는 나의 클론들이 배양되어봤자 나오는건 내 몸의 껍데기밖에 안된다는 소리였다.
심지어 내 '뇌'가 연결되어있지 않으면, 그냥 그대로 마수로 직행하는거고.
대충 지난번의 일이 어떻게 된 일인지 감이 잡혔다.
지난번이라고 한다면, 2년전 내가 연구자들에게 끌려간 날.
뇌가 마구 헤집어지고, 몸까지 줄어버렸던 그날.
애초에 그 몸은 내가 이 세계에서 깨어났을때 처음 들어왔던 그 몸이 아니라, 배양기에서 성장시킨 보다 어린 개체였던 모양이다.
뇌를 헤집던 것 조차, 그저 뇌를 옮기기 위한 과정중 하나에 불과했던거고.
클론이라는 기술을 고작 껍데기 생성에만 쓰다니, 멍청한 연구자들.
나였다면 본인을 복제해서 배신하지 않을 아군 확보같은거에 썼을텐데.
물론 신체 자체가 불멸이라는 조건에서 중요한 요소라고는 했다만, 굳이 이렇게까지 해야했나 싶다.
처음부터 준비물 다 갖추고 진행하면 뭐 어디 덧나는건가.
말을 마친 마수는, 이내 다시 조용해졌다.
[이렇게 하나씩 껍질이 벗겨지기만 해도, 재밌지않은가? 마지막 유희인데 뭐.]
"마지막이라니."
[기다리거라, 아이야. 얼마 지나지 않아 전부 알게 될거란다.]
이곳에선 보기 힘든 이질적인 분위기였다. 마치 속죄와도 같은, 그러나 끝까지 감정이란 담기지 않은 말투.
그 말을 마친 마수는 이내 발을 옮기기 시작했다.
실험실의 저 뒷편에 나있는 자그마한 문을 향해.
"어디 가는거야."
[알 필요 없다네. 유기견이 마주하는 말로야, 뻔하지 않겠는가?]
"..."
말을 마친 그는, 홀연히 사라졌다.
멍하니 그 마수가 뚝뚝 흘리고 간 검은색의 액체만을 바라봤다.
바깥에서 발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고개를 돌려 문쪽을 바라보니, 점차 가까워지는 그림자.
들어온 건 한서우였다.
날 발견하고선 잠시 움찔거린 한서우는 급하게 이쪽으로 뛰어왔다.
"...루시? 너 왜 여깄어?"
"한서우?"
나야말로 묻고싶었다.
대체 어떻게 한서우랑 내가 이렇게 같은곳에 떨어진거지?
"마스는? 성화연은?"
"나도 몰라. 아마도, 이 층에 떨어진 건 우리밖에 없는 것 같은데..."
"왜 우리만 여기 떨어진거지?"
"..."
생각해보면 목적이야 뻔했다.
그냥 코어랑 나를, 같이 두고싶어서 그랬던 거겠지.
그래야 일이 더 수월해질테니까.
"그러고보니 이상하네."
"응?"
"애초에 이렇게 안쪽까지 납치할 여유가 있었다면, 진작에 연구자들이랑 마수들 다 불러들여서 성공시키고도 남았을텐데... 연구자들이랑 마수는 다 어디간거야?"
"그러게...?"
한서우는 내 말을 듣자 그제야 이상함을 눈치챈 듯 하다.
이곳에 들어오고 나서 본 생명체는 방금전의 그 마수와, 한서우가 전부. 그 외에는 그저 생명체(였던 것)이라고밖엔 하지 못할 수준.
"따로 원하는거라도 있는건가?"
어쩌면, 다른 목적이 더 있을 수도 있어.
한서우와 동선을 의논하기 시작했다.
*
"...일단, 아카데미 학생들 전부가 여기로 들어온 건 아닌 것 같아. 일단 내 채널로 연락온건 제인이랑 화연이, 그리고 카인 뿐이니까. 아마 다른 군인들이나 학생들은 대부분 밖에서 싸우고 있는 것 같아."
"이 층이라도 우선 전부 둘러보자. 너 혹시 계단 찾은 건 있어?"
"계단?"
한서우가 고개를 푹 숙이고 생각을 하는 모습이 보인다.
잠시후 고개를 든 한서우는, 그런 건 본적이 없다고 하며 고개를 도리도리 젓는다.
"비상문은 본 적 있지만... 전부 막혀있었어. 잠금장치로 잠긴 것 같은데 전부 다 바깥쪽에 있어서 말이야. 부숴보려고 해도 1초도 안되서 전부 재생하더라."
"역시."
우리의 활동 범위가 좁아졌다.
우리는 이 층 내에서만 움직일 수 있었다.
물론, 이것이 완전한 고립을 의미하리라 생각하진 않는다.
분명 이렇게 거대한 마수라면 자신의 부위 하나하나를 조종하는데에 어려움을 겪을지도 모르고, 그 점만 잘 노려서 공략한다면 탈출도 가능할테니.
잠금장치가 바깥에 있다고 했으니 누군가가 바깥에서 열고 들어와줄 수도 있었다.
"일단은...움직이는게 최선이겠지. 아직 이 층도 다 못둘러봤으니까."
"같이 움직이면 안되는거야?"
한서우가 묻는다.
워낙에 날 옆에서 떨어뜨려두고 싶지 않았던 모양이다.
"이 층엔 일단 그다지 위험한 건 안보였던 것 같..."
말을 하다 멈췄다.
이전의 그 마수도 위험한거 아니었나?
그걸 위험하지 않다고 말할 수가 있을까.
"루시?"
"아, 아니. 아냐... 일단 여기엔 우리 수준에서 충분히 돌파 가능한 적들만 있을테니... 서로 뭉쳐다니는게 오히려 동선낭비일거야."
"그래도..."
"한서우."
오글거리는 말은 하지 않는다.
다만 껴안아 줄 뿐이다.
"..."
"난 괜찮아. 어디로 사라지는 일 없으니까, 그렇게 걱정할 필요 없어."
이것도 부끄러운 일이라면 그런 일이지만, 적어도 이런것정도로 부끄러워할 사이는 아니라고 생각하니까.
한서우도 손을 뻗어 날 안아줬다.
품 안에 모두 담기는 모양새다.
"수고해라."
"루시 너도. 다치지 마."
한서우는 그 말을 마지막으로, 복도의 오른쪽 저 먼 곳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나는 잠시 서서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발걸음을 옮겼다.
일전의 그 마수가 사라졌던 자그마한 문 앞으로.
"...여긴가."
끼이익. 육중한 철문이 천천히 열린다.
문 너머로 짙은 어둠에 잠긴 복도가 보였다.
타박타박. 발걸음을 따라 소리가 크게 울렸다.
주변에 문이 여러개 있지만, 대부분은 잠겨있기에 모두 부수고 들어갈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복도를 살펴본지 얼마나 지났을까.
"...읍."
문이 열려있는 방 하나에서 붉은색의 고깃덩어리를 발견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