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9화 〉 1부 55. 속죄?
* * *
사람이란게, 그렇게 쉽게 바뀌는게 아니라는 건 알고있었다.
그래서 나 또한 바뀌지 않을거라 평생을 생각하며 살아갔다.
정체성의 혼란과, 혼돈.
그걸 계기로 나도 무언가 바뀌었을거라 생각한건가.
멍청한 생각이었다.
난 원래부터 이런 사람이었고, 앞으로 다른 무언가로 바뀔 일 조차 없다.
그러니, 너무 바뀌려고 애쓰지는 말자.
그냥 내가 하고싶은데로 살면 되는거잖아.
*
본거지에 입성한다.
무혈입성은 아니지만, 생각했던 것보다 피해는 최소화되어있었다.
마수들은 몰려듬에도 예전처럼 그렇게 빼곡하게 몰려드는게 아니라 마치 게임에서 보던 것처럼 적당히 수준을 맞춰주면서 덤벼든다.
물론 이 시점에서 그런 이상함을 눈치챌 일은 없었다.
그저 연구자들의 힘이 아직 불안정한가, 하고 그냥 넘어갈 뿐이었지.
몰려드는 마수들을 썰어대고, 터뜨려낼수록 이상함은 커져만 간다.
우리의 경로가 마치 무언가가 유도하기라도 한 듯 절묘하게 새겨져 있었기 때문이다.
저 앞에 보이는, 흰색의 거대한 건물.
그곳으로 일직선으로 통로를 뚫어둔 것 마냥.
분명 마수들은 여기저기서 마구잡이로 튀어나오고 있었는데 말이었다.
그럼에도 다른 선택지란 없기에, 그대로 연구자들의 본거지로 직행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1차 파견대 전멸, 2차 파견대 전멸이란 결과가 나왔을때, 모두는 어떻게 생각해야했을까.
그들은 주변과는 달리 빼곡히 몰려드는 마수들에 의해 전멸했다.
들어가지도 못하고.
갑작스럽게 분위기가 싸해진다.
전초기지를 계속해서 옮겨다니며, 마수들의 공격을 그럭저럭 막아낸다.
버틸 식량이란 공급처가 어떻게든 마련되어 계속해서 급조할 수는 있었지만, 이것도 얼마나 갈지는 모를 일.
이때까지는 연구자들의 힘이 불안정한거라, 언제 나중에 완전히 돌아올 지 모른다고 생각해 작전은 반쯤 타임어택으로 진행되고 있었다.
마수들의 공격이 점점 거세지자, 마침내 결정된 총공격. 내 마법도 제한 없이 사용 가능하게, 주변을 통제한다고 한다.
적어도 마수를 한번에 증발시킬만한 무력이라면, 승산이 있으리라 판단된거겠지.
틀린 말은 아니었다.
게다가 나는 오히려 좋아하기도 했고. 저 앞에 연구자들이 모여있는데, 오히려 쓸어버리지 못한다는 점이 내 몸을 근질거리게 했는데 말이야.
이건 그러니까, 복수심에 가까운 감정이었다.
그렇게, 드디어 문 앞에 섰다.
"...마수들은 보이지 않습니다. 다들 어디론가 증발한 것처럼..."
거짓말처럼, 우리가 도착하자 공세는 멈췄다.
주변을 둘러보고, 경계를 한다.
분명 이곳에 도착하기 전까지만 해도 몰려든 마수들은 다 어디로 갔단 말인가.
제대로 알 수가 없었다.
이쯤에서, 불안한 감정이 들기 시작한것이다.
"한서우."
"...응."
목소리에 흔들림이란 없다.
그 점이 든든했다.
"...시작한다."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러자, 하늘에서 검은 구멍이 열렸다.
검붉은색의 구멍.
내 몸에선 푸른 연기가 뿜어져 나오고, 주변의 공기가 팽창하기 시작했다.
"ㅡ귀 막아."
검은 비가 내렸다.
*
조심스레 눈을 떠본다.
물론, 겨우 이정도에 다들 사라졌을거라 생각하진 않는다.
애초에 대비조차 하지 않을 리가 없잖아.
마치 모든것 위에 선 것 마냥 깔보고 기만하지만, 그럼에도 절대 자만하지는 않는게 연구자들이었다.
적어도, 내 판단에 따르면 그들은 객관적이었다.
나에게 힘을 줘봤자 나에게 자아가 남아있으면 그들 스스로가 파멸할것이란것도, 잘 알고 있었으니 말이다.
애초에 이 전쟁 자체가 그저 그들의 농락중 일부분일거라는 생각을 해본 적도 있다.
그러나 그들에겐 달리 선택지가 없다.
앞으로, 한서우는 계속해서 강해질거고 현재 우리가 이렇게 그들의 가까이에 있는건 처음일테니까.
코어를 찾으려 환장했던 연구자들이라면, 적어도 한서우라도 족치고 코어를 강탈할 수도 있었다.
그렇기에, 혼자 둬서는 절대 안됐던 거고.
아무튼, 일전의 거대한 마법이 전장을 휩쓴 후. 여기저기 들리던 폭음은 가라앉았다.
본거지 투입 분대는 주변에 남아 조용히 주변을 경계하던 중이었지만, 저 너머의 마수들은, 군인들은 놀란듯한 눈으로 하늘을 쳐다봤다.
그래봤자 보이는거라곤 붉은 달밖에 없을텐데.
굉음이 이명을 만들어냈다.
연구소는 여전히, 그대로였다.
흠집 하나 없이.
"...어라."
위화감이 들었다.
먼지가 잔뜩 피어올랐다가, 가라앉았다.
"잠깐, 기다려 루시!"
저도 모르게 발걸음을 옮겨 연구소에 바싹 다가선다.
그러고선, 벽을 만지려 손을 뻗었다.
"...에."
꿀렁. 손이 닿은 부분이, 검은색의 젤리와 같은 무언가로 변했다.
황급히 손을 떼자, 원래대로 새하얗게 돌아오는 연구소.
"뭐야, 시발."
"...루시?"
미친놈들.
연구자들은 미친놈들이 분명했다.
욕짓거리를 내뱉는다.
애초에, 방금전의 일로 깨달은 정보로 경악하지 않을만한 이유가 어디있겠어.
"...이거, 마수네."
"응?"
"연구소 자체가 마수라고."
"..."
푸른색의 기운이 뿜어져나왔다.
내 몸으로부터, 눈앞의 마수로부터.
그리고, 연구소는 거대하게.
우리 모두를 집어삼킨다.
*
"끄으윽..."
눈을 떠본다.
그리고, 이전의 상황을 떠올렸다.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나 주변을 둘러본다.
마치 병원과도 같은, 티 하나 없이 새하얀 벽과 타일들만이 보였다.
한서우랑 마스는 어디간거지?
주변을 둘러보지만, 불이 꺼진 병원 안에 서있는건 나 뿐인 듯 했다.
무전기를 꺼내 작동시켜본다.
"아, 아...들리십니까?"
아무말이나 일단 해본다.
무전기 너머로 들려오는 말은 없었다.
다들 어떻게 된거지.
분명, 연구소가 검게 녹아내렸다.
그리고, 모두를 집어삼켰다.
일단은 이 정보만으로 유추해봤을때, 모두가 강제적으로 연구소 안으로 끌려들어온건가.
창문 밖을 바라보려 했다.
그러나 창문을 열어보려 다가섰을때 날 반긴건, 그저 검게 칠해진 유리 뿐.
어쩐지 병원 로비 한가운데가 이렇게 어두웠나 싶었는데, 창문을 다 막아뒀구나.
그럼에도 밖에서 계속해서 들려오는 폭음은 언뜻언뜻 들린다.
마수들의 괴성과, 초상능력자가 서로 초상능력을 연계하며 공격하는 소리까지.
온갖 함성이 뒤섞여 들려온다.
그러나 벽에 막혀, 마치 물 속에라도 빠진 소리마냥 질척질척하게 들려왔다.
자, 여기서 이제 어떻게 할까.
생각해보자. 생각.
일단 이곳은 연구소 내부.
헌데, 연구자들은 왜이렇게 없는거지? 다들 어디간거야.
날 확보하고 나면, 바로 배 찢으려고 할 놈들이 대체 지금은 다 어디간건지.
일단은 조금만 더 둘러볼까.
병원 내부를 걸어다니기 시작했다.
마치 공포영화에 들어온 것 같다.
연구소 내부에서, 비명소리가 들린다.
이따금씩 검은 안개가 살결을 따라 흘러가고, 여기저기서 푸른색 불빛이 번뜩인다.
비명이 들린 곳으로 가보면, 남아있는 거라곤 붉은 고깃덩어리 뿐.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만약에 정말로, 일대의 사람들이 전부 연구소 안으로 들어온거라면 그중에 분명 성화연이랑 마스도 섞여있었을텐데.
설마 이런 고깃덩어리들이 걔들일거라고 생각하긴 싫었다.
다행히도 이 고깃덩이 주변에 떨어져있던 옷가지라고는 하얀색의 연구복 뿐.
그 점이, 내 의문을 더욱 키워준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는거야."
그렇게 10분정도 지났을까.
무전기에서 지직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황급히 무전기를 빼내들고 말을 걸어봤다.
[루시. 루시?! 무사해? 다치진 않았고? 잡힌 건 아니지?]
성화연의 목소리였다.
난 괜찮다고 말해주자, 안심하며 훌쩍이는 성화연.
이곳에 보이는 고깃덩이들과, 비명소리들을 듣고 많이 불안해진 상태였다.
"여기가 어딘진 모르겠지만...적어도 연구소 안 인건 확실하니까. 계속 흔적 남기고 갈테니까, 만약에 발견하면 뛰어. 너도 단검같은걸로 문양 새기면서 흔적 만들어보고."
[응. 아, 혹시 서우는 연락 됐어? 아직 개인채널로도 아무 말 없던데...]
"한,서우는..."
한서우가, 성화연한테 연락을 안했다.
괜찮을거야. 한서우니까.
"...한서우도, 나중에 연락되면 똑같이 전해줘."
[...응, 루시. 조심해. 초반부터 너무 힘빼지 말고.]
"알겠어."
후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일단 이곳이 만화에서나 나오는, 다중차원같은 공간만 아니라면 다 괜찮을 텐데 말이야.
돌아다니다보면 만나겠지.
그렇게, 통신을 마치고 다시 움직일 준비를 하던 내 눈에, 청록색의 이질적인 빛이 들어온 건.
"...?"
살짝 열려있는 문 틈새로 새어나오는 빛이었다.
이곳에선 가끔씩 깜빡이는 하얀 조명밖에 보이지 않았던지라, 주목을 확 끌어버린다.
타박타박. 조심스럽게 문으로 다가갔다.
그 틈새로, 고개를 들이밀어 내부의 광경을 확인해본다.
청록색의 이질적인 빛들은 책상 위에서 흘러나오는 빛들이었다.
매끈한 하얀색 책상들이 방 안에 빼곡하게 채워져 있었다.
벽면에는 여러가지 찬장들이 세워져 약품같은것을 보관하고 있는걸 보아 실험실인 듯 했다.
탁자를 자세히 살펴보자 그 위에 있는 플라스크들이 보였다.
고개를 가까이 들이밀자 보이는, 무언가의 조각과도 같은 것.
마치, 무언가 생명체같은...
"히익?!"
배 위로, 검은색의 질척질척한 무언가가 감싸들었다.
황급히 놀라 펄쩍 뛰며 거리를 벌리고, 곧바로 뒤의 무언가에게 다리를 휘둘렀다.
콰가각.
찰진 충격음과 함께 터져나가는 마수.
마수였는진 잘 모르겠지만, 적어도 그 질척질척한 느낌을 본다면 확실해.
[..]
그리고, 머리에서 들려오는 그 목소리에 그만 한번 더 요상한 소리를 내고 말았다.
고개를 주변으로 마구 돌리자, 그제서야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는 형체.
저 앞에, 사람의 형체를 한 검은색의 마수가 태연하게 서있었다.
"...너 누구야."
말이 통할거라 기대하진 않지만, 적어도 말은 걸어본다.
'그것'은, 대답대신 내 앞으로 천천히 다가온다.
키차이때문에 거의 고개를 수직으로 들어야 하기에 짜증났다.
[...그저, 한가지 알려주러 온 것 뿐이라네.]
이어 나온 그 음성에, 나는 그만 크로체를 떠올리고 말았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