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4화 〉 1부 50. 준비
* * *
'나'는.
하나뿐이기에 가치있는 것.
하나가 아니라면 가치는 없다.
*
침대에서 일어나 멍하니 꼬맹이를 바라봤다.
기억의 내용은 꼬맹이가 예상한 내용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기억이라고 해봤자, 내가 과거에 겪었던 일들이 떠오른 것 뿐이지만.
1인칭 시점으로, 감각까지 생생하게.
"...이제야 일어났군."
"네."
"그래서, 뭔가 달라진 점은 있나?"
머리에 감각을 일깨워본다.
이전보다 조금 차가워졌을 뿐, 그다지 큰 감정은 없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그것또한 나의 오산이었다는 듯, 눈앞에 떠오르는 환영.
누구인지 모를 시체가 바닥에 나뒹구는 모습이 보였다.
하지만 기억속에선 분명, 연구자의 클론이었을게 분명한 파편.
피를 흠뻑 뒤집어 쓴 채, 입가의 미소가 사라져간다.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 그 순간조차, 누군가의 죽음따위에 난 동요조차 하지 않았다.
어째서?
그냥, 그렇게 무뎌졌던 거다. 고통은 무뎌지지 않았지만, 정신적 자극만큼은 무뎌졌던 것 같다.
어쩌면 이게, 연구자들이 말했던 자아의 상실과정이 아닐까 싶었다.
생각해보면 이건 내가 저항하고 말고가 아무 의미가 없는것이었다. 나같은 사람 혼자서, 대체 그런 세력들 사이에 껴서 뭘 어떻게 한단 말인가.
불가항력이었다. 내가 저항하지 않으면 끌려다녔고, 저항한다 하면 더욱 더 처참하게 끌려다닐 뿐이었다.
대체 어떻게 해야 이런 굴레를 빠져나갈 수 있을까 생각해봤다. 이미 예전부터 해왔고, 앞으로도 해나갈 고민.
생각해봤지만, 생각보다 답은 꽤나 간단했다.
어떻게하면, 이런 지옥을 빠져나갈 수 있는건지.
나한텐 한서우가, 마스가. 성화연이 있었다.
그때의 나는 전혀 정보를 모르고 있었고, 현재의 나는 정보를 알고있다. 이곳에는 나 혼자만이 있는게 아니었고... 이 세계의 중점이 누구인지, 나는 알고있다.
뭐, 뻔한거다. 나에겐 악연만이 아니라 제대로된 인연도 있었다. 막연하게 불행만이 닥친게 아니라, 적당히 불행과 행운이 겹쳐온 거였다.
나라는 존재 자체가 의도된 것이고, 그 접점이 대재앙과 연관된 누군가와 있다는 걸 알게 됐다. 굉장한 중2병의 결과물처럼 보이는 이 설정은 놀랍게도 망상이 아니라 현실이었고, 이러한 사실 자체가, 나에게서 자유를 앗아간거였다.
호의또한 쟁취하는 것 이었듯이, 행복또한 내가 쟁취해야하는 것이었다. 평범하게 굴러들어오는 건 없었던거다.
"표정이 밝아졌군."
"네?"
"살짝은 뒤틀린 신념이지만 말이야."
"..."
딱히 틀린말은 아니었다.
어찌 생각해보면 소년만화의 정석이나, 위인이라는 작자들이 그토록 뻔하게 지껄였던 말들의 답습이긴 하지만...
적어도.
사람들이 그것들에 그토록 열광하는 이유는 있지 않겠는가.
나는 그냥 희망이 필요한거였다.
이런 지옥에서 빠져나갈 수 있다는 희망.
본래 세계따윈 망한지 오래. 원래의 삶으로 돌아가 아무일도 없었다는 듯 행복하게 살고싶다는 염원따윈 없었다.
내가 바라는건 그저, 이곳에서. 모든걸 끝내고 행복하게 사는 것. 그뿐이다.
...이렇게 말하니까 너무 중2병 같은걸. 예전이라면 아무 생각도 없었을텐데 왜 갑자기 이런 생각 하나하나에 쪽팔림을 느끼는건지.
솔직히 말해서, 이곳의 원흉을 쓰러뜨리는거니 어찌보면 영웅흉내라고 볼 수도 있다. 다만 이건 사람들을 구하기 위한게 아니라, 나 자신의 안위를 위한다는것이 차이점이라면 차이점일 뿐이지.
이렇게 생각하면 나 자신이 너무 쓰레기같다. 하지만, 딱히 틀린말도 아닌걸. 스케일이 너무 커지면 그건 그것대로 어깨가 더 무거워지고, 하나하나 신경쓰지조차 못한다. 일단은 눈앞의 것부터.
밖은 여전히 어둑어둑 하다. 겨울이라 그런지 들어오는 바람마저 쌀쌀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감각이 느껴졌다.
*
생각이 끝나고, 멍하니 꼬맹이를 바라보다 문득 의문이 들었다.
"근데 너 진짜 누구에요?"
"..."
이전의 상황을 기억해보자. 이상한 점이 한둘이 아니었다.
그냥 떠나버린 서아와, 터져나간 벽.어째선지 폭발소리조차 새어나가지 않게 차단해둔 결계.
게다가, 그 타이밍에 절묘하게 나타난게 이 꼬맹이. 결계는 이 꼬맹이가 발산하고 있던 거였다.
타이밍은 물론이거니와, 마법조차도.
...아무리 생각해도, 이 꼬맹이가 해방자라는 것 밖엔 말이 안되잖아.
"뭐, 너도 스스로 알고 있었겠지만... 나도 해방자에 속하는 인물이라 하면 되겠군."
"..."
너무 순순히 인정하니 맥이 픽 빠졌다.
나름대로 고양됐던 감정마저 무너지는 느낌이다.
이쯤되니 한가지 가정을 안할 수가 없다. 방금 보여준 환상이 모조리 거짓이라면 어떨까. 이 꼬맹이가 말한 내용조차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거짓이라면 어떨까.
"해방자들의 목적이 무엇인진 알고 있나?"
도리도리.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애초에 목적과는 상관없이 그들과는 악연으로만 가득 차있었다.
서아가, 그때의 그 주점이.
여전히 꿈속에서도 나와 잠조차 못자게 하는데 좋은 감정을 갖고있다면 그게 더 비현실적이겠지.
"뭐, 너무 미워하진 마라. 아마도 너의 정체를 알게 된 이상은... 해방자들도 너의 편일테니."
"..."
미친소리였다. 이 꼬맹이는 내가 그새끼들한테 뭔 일을 겪었는진 알고 지껄이는걸까.
"해방자는 본래 이 세계엔 존재하지 않는 조직이었다."
"네?"
"잃을것 따윈 없는 사람들이 모인 것이지."
"..."
"말한다고 해서 딱히 마음이 돌려질 것 같지도 않으니, 오늘은 이만 여기까지 하도록 하지. 다음 보름동안에라도... 악연을 풀어주기를 바라지."
쿠르르.
꼬맹이의 손짓 한번에 마법진이 그려지고, 무너졌던 콘크리트 벽이 역재생하듯 되감겨 올라왔다.
멍하니 그 장면을 바라보고 있던 나는 꼬맹이가 달칵. 문을 닫으며 나가는 소리를 눈치채지 못했다.
그리고, 날이 밝았다.
***
"앞으로 얼마 안남았습니다. 여기가 이쯔음이니..."
라디오로부터 아직까지 연락은 없었다. 사실 저것도 형식적으로만 저렇게 연결시켜둔거지, 누구도 연락이 올거라곤 기대하지 않았지만.
시간은 흐르고 흘러, 어느샌가 한 달 가까이 지나갔다. 부상병과 짐마저 모두 챙기느라 행군이 늦어진 탓에, 본래의 목적지까지 도착하기까진 무수한 시간이 걸렸다.
그리고 드디어 그 고된 행군이 끝을 맺을 무렵. 마력파의 근원지에 도달할 무렵이었다.
나 또한 너무 지친 상태였다. 그도 그럴게, 하루 14시간 가까이를 눈밭에서 수많은 짐을 메고 계속해서 걸어야 했으니. 눈에 발은 푹푹 빠지고, 식량조차 부족해지기 시작해 힘겨운 숨소리만을 내뱉고 있을 뿐이었다.
언제나, 지쳐서 모든걸 다 놓아버리려고 할 때면 나의 목적을 떠올린다. 고아원의 원장님이 바라셨던, 그리고 이제는 나조차 확신을 갖고 따르는. 마치 신앙과도 같은 목적.
루시에 의해, 다시금 깊이 되새겨진... 그런 목적을.
인간을 구하는데 의도란 없다. 그저 동족이기에 구하고, 미래를 볼 수 있게. 함께 미래를 마주할 수 있게 구할 뿐이었다.
옆에서 팔에 깁스를 감은 벨라가 이를 악물고 걸어가는 것이 보인다. 대부분의 상처는 나았기에 지난 3일부터 행군에 동참하기 시작했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힘들어하는 모습이었다.
나머지 아카데미생들은 뭐... 나이와 훈련량탓에 정규 군인들과 히어로들에 비하면 살짝 뒤쳐지긴 했어도 저 뒤에서 잘 따라오고 있었다.
그러다가, 앞에서 무언갈 발견한 탓일까. 밤새 행군하던 사람들은 모두 정지명령을 받고 제자리에 멈춰서게 되었다.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수근거리는 목소리. 잠시 그렇게 기다리고 있자니, 앞에서 누군가 인파를 뚫고 나에게로 다가온다.
언제나 선두에 서서 가던 한국인 통신병이었다.
"한서우 학생 맞나?"
"아, 넵..."
"루카스 대령님이 찾으신다. 최대한 빨리 오라더군."
사내에게서 들려온 말.
자신을 따라오라고 말한다. 대령님이 찾으신다며.
왜 갑자기 날 찾는건진 모르겠으나, 본래부터도 난 군쪽과 접점이 있으니, 그 사람의 귀에도 들어가 있을거라 생각하며 넘길 뿐이었다.
그렇게 정신없이 걸어가던 내가 마침내 마주한 광경이란.
휘이이...
믿을 수 없을 만큼 거대한, 공터의 풍경이었다.
그리고, 그곳에 가득 쌓여있는 엄청난 양의 검은 잔해들.
"자네가 한서우 학생인가?"
들려오는 대령님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린다.
"아, 네! 헬리온 아카데미 3학년 한서우라고 합니다."
"한서우 학생, 자네 초상능력이 공명계열 맞나?"
"네. 맞습니다."
"그렇다면 질문 하나 하지. 혹시 이곳에 들어온 이후로 새로운 마력파가 관측된 적이 있나?"
이어서 들려온 질문은, 마력파에 관한 질문이었다.
지금 이 타이밍에? 꽤나 뜬금없는 질문이었으나, 내가 이곳에 들어온 이후부터 느껴진 마력파란 정말 수도없이 많았기에 있는 그대로 얘기해줬다.
한번. 한번. 조금씩 며칠간격으로 울리기 시작한게 어느 날에는 미친듯이 몰아쳤다는 것까지.
그 얘기를 들은 대령님은 얼굴을 굳히더니 이내 손으로 턱을 쓸었다.
"...무엇때문에 그러시는거죠?"
결국, 참을 수 없어서 질문하고 만다.
잠시 고민하던듯한 대령님은 내 대검을 바라보고선 입을 열었다.
"이곳에서 엄청난 규모의 전투가 있었던 모양이야. 마법진조차 새겨지지 않은 마력의 잔해들이 여기저기 너무 많이 퍼져있다."
"그 말씀은..."
"마력파의 근원지가 이곳일거라는거지. 심지어 혈액마저 수두룩하게 남아있다. 초능력계열 초상능력자까지 사용하면 전투의 당사자까지 알 수 있는거야."
"혈액이 남아있다는 말입니까?"
이상한 말이었다. 그도 그럴게, 애초에 지난 몇주간은 눈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엄청난 양의 블리자드만이 몰아쳤으니.
그 속에서 혈액이 남아있다는건 분명 블리자드가 끝난 지난 하루 사이에 전투가 일어났어야 할거라는 소린데, 애초에 이정도 규모의 공터가 만들어질 전투라면 그 거리에서 우리가 관측하지 못 할 이유도 없고, 무엇보다 마력파가 그 때 발생했어야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가 가장 최근에 느꼈던 마력파란 거진 몇 주 전.
도저히 그 사이에 이만한 규모의 전투가 벌어졌을 거라곤 생각할 수 없었다.
하지만, 곧이어 들려온 말에 그만 아연실색하고 말았다.
"기상의 흐름까지 뒤바꿀만한 거대한 전투였다. 이곳엔 구름이 전혀 없어. 눈도 전부 증발했고. 온도마저 주변과는 확연히 차이날 정도로 뜨겁다. 인간이 범접할 수 있는 수준의 전투가 아니야."
성층권까지 치솟아 올라가는 전투의 여파. 그 여파에, 기상현상이 모두 뒤틀렸다는 얘기였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