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3화 〉 1부 49. 정리
* * *
피로 벽지를 만든 듯한 모양새다.
이런것도 고문의 일종인가. 고개를 어디에 돌려봐도 새빨간 피만이 보이고, 공기를 들이마실때마다 토가 나올 정도로 역한 피비린내만이 느껴진다.
어딜 돌려봐도 나의 조직이었던것들이 한가득. 러브크래프트스러운 장면들이 눈앞을 가득 메운다.
이젠 아예 방을 옮겨 괴롭히는 것 따윈 그만 뒀나보다. 하긴, 그냥 자그마한 장비 몇개 가져와서 내 입속에 쑤셔박으면 알아서 다 해결되는데 뭐 그렇게 복잡한 절차를 걸쳐. 게다가 이 편이 정신에 주는 데미지가 더 크기도 하고 말이야.
지금 내가 어떻게 생겼는진 볼 수 없다.
거울이 너무 더럽다. 원래 저렇게 생겼었나 싶을 정도로 시뻘건 피가 너무 많이 묻어있었다.
누군가 말을 걸어도 반응을 안한다. 누군가가 눈앞에 보여도, 별 반응을 못하겠다.
안하는건지, 못하는건지. 솔직히 잘은 모르겠다.
최근에는 잠마저 못자게 한다. 죽는것 자체를 교묘하게 피해가면서, 정신나갈듯한 고통만을 준다.
육체적으로 주는건 뭐 기본 옵션이니 설명할것도 없고, 요즘엔 환상같은걸로 기분을 오락가락 하게 하는걸 즐기는 듯 했다.
미친새끼들.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한다. 희망이란 없지만, 미친듯이 발버둥쳤다. 방안에 들어온 사람을 때려눕혀 탈출하려고도 해보고, 몰래 숨어있다 문이 열리는 순간 뛰쳐나가보려고도 했다.
뭐, 결과는 알다시피... 여기저기 튀어있는 내 시체들이 증명하고 있다.
멍하니 주저앉아있던 그때 이상한 기계가 방 안을 싸그리 갈아버린다. 피들이 씻겨나가고 조직들이 증발한다.
물론 그 사이에 껴있던 나 또한 어떻게 됐을진 말할것도 없다.
일어났을때 방 안은 깨끗했다.
주기적으로 청소하는 타이밍이니 그러려니 했다.
너무 쌓이고 더러우면 그 사람들조차 들어오기 역겨워할테니까.
오늘로 며칠째더라.몇년째? 음. 몇년이 지나갔더라. 잘 모르겠네.
하루종일 방 안은 새하얀 빛들만이 비추고, 밤낮은 알 수 조차 없고, 맡아지는 냄새란 피비린내뿐. 눈앞에 보이는 광경도 모두 내 몸에서 뿜어져나오는 선홍빛 혈액들 뿐이었다.
뭐, 익숙해지는건가?
아니, 익숙해진다고 말할 수 있나?
계속해서, 외부에서 무언가가 간섭해온다. 고통이 무뎌지질 않게 뇌를 조물락댄다.
적어도 고통이란게 오래겪으면 익숙해질법도 한데. 전혀 그러질 않네.
시간이 흘러갔다.
*
도대체 뭘 원하는지 모르겠다. 분명 이렇게까지 공들여서 사람 정신 피폐하게 하는거 보면 분명 뭔가 원하는게 있을텐데, 도저히 다른 원하는걸 말하질 않는다.
뭐, 가끔씩 너의 주인이 누구냐고 묻는다거나, 본인들보고 주인님이라고 부르라는 둥의 개소리는 지껄였지만, 그딴걸 할 수 있을리가 없잖아.
적어도 주인취급 받고싶으면 이런 짓이나 당장 그만두라고 말했던게 벌써 2년전이다. 그때 표정이 가관이었는데 말이야.
뭐, 몇년간 그렇게 공들여서 고작 원한다는게 자신을 주인취급 해주는 것 따위라니. 속도 어지간히 음습한 새끼들이라고 생각했다.
ㅡ버티다보면. 무언가. 변하겠지.
언젠가는.
이 사람들도, 지쳐서 그만 둘 수도 있고.
...잘은. 모르겠네.
*
중2병이 다시 도진 느낌이었다.
그러니까 이걸 뭐라고 표현해야하나. 마치 새로운 감각에 눈을 뜬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이 감각을 색으로 표현하자면 푸른색이려나.
붉은색? 검은색? 아니, 애초에 감각같은걸 색으로 표현할 수가 있는거였어?
이게 판타지같은 것에 흔히 나오는 마력이라는 걸 깨달은 건 몇개월 후의 시점이었다.
멍하니 방 구석에서 나뒹굴고 있을땐 내 나름대로 마력을 움직여봤다.
그러다가, 한번은 괴물 하나의 대가리를 작살낸 적이 있다. 그 때 그 사람들이 떼거지로 몰려오더니, 지들끼리 이것저것 중얼거리다가 뭔가 이상한 시술같은 것을 했다.
물론 마취는 안해서 어디에 뭔짓을 하는진 모두 똑똑히 보였다. 심장쪽에 무언가를 연결시켜 주렁주렁 조립하고 있었는데, 놀랍게도 시술이 끝난 후에도 그 기계의 끄트머리가 가슴 밖으로 튀어나와 아이언맨의 그것같은 모양새를 만들어냈다.
손에 힘을 줘 뽑아보려고 하면 언제나 내부에서 폭발을 일으켜 가슴을 박살내기에 해체따위는 불가능했지만... 아무튼, 그 덕에 마력이 심장을 근원으로 움직인다는 점을 알게됐으니 나쁜것만은 아니려나.
근데 안다고 해서 뭐 어쩌게. 쓸데도 없는데.
*
시간이 흘렀다.
원래부터 흘러간거였다.
모두 다 원래부터 있던 거였다.
내가 누군진, 이제 상관없다.
*
■■■■■■.
뭐가?
아니, 애초에 극단적인거라고 해봐야 겨우ㅡ
아. 어지러워.
생각이 멈춰간다.
안되는데...
뭐, 이건 미래의 내가 알아서 해주겠지.
졸려.
지금은. 잠이라도...
근데, 잠도 못자게 하니깐 뭐...
아.
...살려죠.
*
나.
나는.
나는ㅡ
뭐였더라.
내.가.
언젠가 한번ㅡ
*
"ㅡㅡㅡㅡ..."
어눌하게 중얼거린다. 말이 되다 만 무언가.
눈앞의 소녀가 왜이러는진 알고있었다.
언어능력의 상실까지 단계가 진행된 모양이었다.
피투성이로 바닥에 나뒹구는 소녀를 격리실에 던져넣었다. 이제는 비명조차 지르지 않는 모습이었다.
눈은 무엇도 비추지 않는 심연과 같아, 과연 제대로 살아있긴 한건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소녀는 절망적인 상황이었음에도 끝까지 발악했다. 언제나 눈가에는 광채가 돌았고, 몸은 너덜너덜 했음에도 생기가 넘쳤다.
허나, 8년이 지난 지금.이제는 어떻게 됐지? 그냥 살아있는 시체라고 보는것이 가장 알맞은 표현일 터였다.
그래서, 지금 내가 느끼는게 뭐라고? 소녀를 보며 머릿속에서 분비되는 호르몬이, 뭐라고?
이게 뭔진 알고있다만, 적어도 내가 겪어선 안 될 일이란 건 확실했으니 그저 숨길 뿐이다.
이레귤러인가, 무엇인가.
돌연변이? 진보인가, 퇴화인가.
집단에서 배척받는 소수인가, 지배하는 소수인가.
ㅡ.
나는, 인간이었다.
나는, 인간이었나?
어째서인지 지금의 프로젝트와는 전혀 관련없는 의문들만이 뭉게뭉게 피어난다.
간단한 질문임에도 머리는 이전과 다름없이 뜨거워진다. 차가워지기만 했던 뇌에, 무언가가 채워진다.
그냥 뇌에서 오가는 전기신호가 변화했을 뿐이었다.
*
...다음 이야기는 뭐... 뻔했다.
서서히 마음을 알아가는 연구자의 클론과, 서서히 무너져내리는 나.
이게 만화라면 그 클론의 희생으로 성공적으로 탈출해 세상을 맛보며 살아갔겠지만... 탈출은 없다. 이 세계에서.
세상이 감옥이고, 유토피아는 없다.
훗날 그런 일이 벌어졌고, 그건 그저 '나'의 정신을 더 망가뜨렸으면 망가뜨렸지, 탈출은 성공하지 못했다.
따뜻한 온기가 사방으로 흩어지고, 수년간만에 처음 띄었던 미소는 사라졌다.
시체가 여전히 눈앞에 남아있다. 잠시간 남아있던 빛마저도 이내 모두 사라져 완전한 암흑만을 비추게 되었다.
ㅡ모든것이. 전부.
아무런 빛 한점조차 비추지 않았다.
절망의 끝까지 도달했다ㅡ라는 말이 얼마나 오만하고 이기적인 말인진 알고 있었지만, 그때의 나는 그렇게 느꼈던 걸 수도 있다.
이 세상에는 나보다 불행한 사람들이 있고, 나는 행복한 편에 속하는 사람이란걸 벌써 잊어먹은 모양새였다.
그렇게, '나'는 무너졌다.
끝까지. 저 아래의 검은 구덩이까지.
그런 그 순간 가장 강렬했던 감정이란건ㅡ
절망이었다.
분노보다도. 훨씬.
*
수 년간 떠돌았다.
바깥에 나오면 공기도 땅도 모두 반가워 펑펑 울거라고 상상했는데, 무너진건 되돌릴 수가 없나봐. 아무것도 느껴지지가 않았다.
자아는 사라진지 오래, 멍청하게 텅 비어버린 눈으로 정처없이 걸어다닐 뿐이었다.
철근에 가슴을 뚫어, 심장의 장치를 망가뜨렸다. 마력은 움직이기 시작했음에도 이걸로 뭘 할지 별 생각은 들지 않았다.
걸어다니다가, 사람들을 발견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들이 붙어다니는 일은 없었다.
머리에 총구를 들이대도 아무말 안하고, 몸에 손을대면 죄다 죽여버리는데 과연 옆에 다가올 사람이 있었을까.
그렇게 몇년을 떠돈지는 모르겠다.
밥도 안먹고, 잠도 안자고. 발바닥이 갈려나갈 정도로 그냥 걸어다녔다.
연구소에서 본 그 검은 괴물들이 폐허에 수두룩했다. 멍하니 발걸음을 옮기고 있다보면 어느샌가 다가와 허리를 끊어 즉사시킨다.
그럼에도, 그것마저 별 감흥은 없었다.
하늘엔 구름이 흘러가고, 밤낮은 무심하게 계속해서 바뀐다. 시간은 흘러간다.
사람이 많은 곳으로 걸어갔다. 간혹 이런 모습을 보고 다가오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결국 머지않아 전부 떨어져나간다.
죽어서든, 질려서든. 끝까지 곁에 남아있는 사람들은 없었다.
그렇게 떠돌다가, 화려한 빛들이 반짝이는 도시를 봤다.
본능에 이끌리듯 발걸음을 옮겼고, 반가운 광경을 마주했다.
마천루가 가득하게 들어찬, 체감상 몇백년 전인지도 모를 이전의 삶에서 보았던 도시를 생각나게 하는 모습.
ㅡ하지만, 이곳에서도 내 자리는 없다.
밤새 거리를 떠돌다 슬럼가의 한구석에서 몸을 뉘었다.
몇년만에 잠을 자보려고 시도해본 것 같다. 하지만, 잠은 오지 않아 텅 비어버린 머릿속의 전기신호만이 오락가락 할 뿐이었다.
"..."
멍하니 천장을 바라봤다.
회백색의 낡아빠진 콘크리트가 보인다.
고개를 돌려 창문을 바라봤다.
휘황찬란하게 빛나는 대도시가 보인다.
"..."
몸이 움찔거리기 시작했다.
어째서인진 모르겠다.
눈가가 점차 흐릿해진다.
볼을 타고 무언가 흘러내리는게 느껴진다.
몸을 심하게 움찔거리기 시작했다.
가슴이 너무나도 아파, 몸을 웅크렸다.
머리가 깨질듯.
ㅡ아파?
...아프다.
아프네.
*
환영은 끝나고, 눈을 떴다.
숙소의 천장이 보였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