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9화 〉 1부 45. 종말
* * *
눈을 뜨자 검은 천장이 보인다.
푸르스름한 달빛이 긴 선을 만든 천장.
내가 왜 일어난걸까, 하고 생각해보지만 역시 짐작가는 내용이 너무 많아서 딱히 뭐라고 콕 찝어 얘기할 수는 없었다.
갑작스럽게 한기가 몰려와서? 악몽을 꿔서? 어쩌면, 몸이 숙면을 허락하지 않아서 일수도 있었다.
하지만 곧이어 느껴진 감촉.무언가가 내 몸을 주물럭거리고 있다는, 소름끼치는 감각이 느껴졌다.그 감촉에 눈을 돌려 옆을 바라봤다.
"..."
그러자 마주친건 익숙한 얼굴.익숙하다 싶기엔 단발이 장발로 변한 차이점은 있었지만.
분명 이건 윤서아.
윤서아가, 내 옆에 무릎을 꿇고 주저앉아 손으로 내 몸 이곳저곳을 어루만져주고 있었다.
처음 든 생각은 공포. 그리고 그 다음에는 여느때처럼 '또 이 꿈인가' 라는 생각이 들었다. 애초에 윤서아가 나오는 악몽이란 벌써 몇개월째 반복해서 꾸고있는 악몽이기도 했으니까.
그렇기에, 악몽을 꿀 때마다 언제나 토템으로 넣어뒀던 권총을 찾아보기 위해 주변을 둘러봤다. 어디든, 시야가 닿는곳으로.
하지만.
"...?"
없다.
아무것도.
권총도, 생각대로 나오지 않는 목소리조차도. 꿈에서 나올만한거라곤 전부 없다.
그제서야 느껴진다.서아가 배를 만지작거릴때 느껴진 감각이, 창밖에서 불어오는 찬바람이. 전부 생생하게 느껴진다.
꿈이 아니었다.
윤서아가 왜 지금 여기에 있는거지?
다시한번 서아를 바라봤다.능청스럽게 인사를 건네던 그 모습이, 너무나도 역겹고, 소름끼쳤다.
어째서, 왜, 라는 의문은 접어두자. 이년은 원래 미친년이니까.
살의가 솟구친다. 꿈속에서 언제나 봐왔던 얼굴에, 마음속 깊은곳부터 증오가 흘러넘쳤다.
그렇기에 곧바로 손을 뻗어 서아의 머리를 움켜 쥐어 터뜨리려고 했다.
퍼걱!
그러나 다음순간 잘려나간 오른손.
피가 솟구치고, 바닥이 붉게 적셔진다.동맥에서 쏟아지는 피가 벽면을 물들인다.
하지만 내 의지를 막을 순 없기에, 그대로 터져나가는 숙소의 벽면.
콰아아앙ㅡ!
저 건너의 옥상에 서있는 윤서아를 바라보며, 욕짓거리를 내뱉는다.
저 미친년.
진짜로.
아마도 내가 인생에서 만나본 사람들중에 단연코 세 손가락 안에 든다고 자부할 수 있을 정도로 미친년.
윤서아는 그런 날 잠시 바라보더니, 곧이어 떠나갔다. 자연스럽게.
잠시간 멍하니 서아가 떠나간 자리를 보고 있었다. 소름끼치는 방금전의 상황이 다시금 머릿속에 떠오른다.
그러니까 이해하기 쉽게 방금 상황을 비유하자면, 자고있다가 느껴진 소름끼치는 감각에 눈을 떠보니 귀 바로 옆에 지네가 떨어져있던 상황이랑 똑같은 것이다.
드러난 뽀얀 배에 여전히 온기가 남아있는 것이 느껴졌다. 만져보니 부드럽게 말랑거리며 기분좋은 느낌을 만들어냈다.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느껴지는 한기에 몸을 웅크리며 주저앉았다.
그러다가 느껴진 격통.
"끄, 흐윽...?"
너무나도 오랜만의 감각이라 뭐라 표현해야할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좆같네. 오랜만이라서 다 반가운게 아니었다.
잘려나간 오른손의 단면에서 계속 울컥울컥 쏟아져나오는 피가 바닥을 물들인다. 하지만 이전에 본적이 있을까, 싶을정도로 빠르게 재생하는 손.
영화에서 본 것 같아. 이런 장면.
어쨌든 격통에도 몸이 반응을 안하니, 딱히 뭐라고 할 말이 없긴 했다.
그나저나, 방금 벽 부서지는 소리 듣고 누가 오진 않으려나? 적어도 그 정도로 큰 굉음이었다면 누구 하나는 분명 올텐데.
그 전에 손이 다 자라날지는 알 수 없었지만, 적어도 윤서아가 여기에 나타났다는건... 해방자들마저 이제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징조니까. 소리를 듣고 뛰쳐나온 성화연이 또 나를 보고 울지나 않으면 다행이었다.
배상문제는 일단 나중에 생각하자. 괜히 격분해서 선넘은건 아닐까 생각해봤지만, 내가 냉정했어도 방금전의 상황은 똑같았을 것 같다.
...아무튼 윤서아는, 내 인생에 있어선 악몽 그 자체니까. 당연한거겠지. 아직도 내 배에 아무 망설임도 없이 팔을 꽂아넣었던 그 기억이 선명하다.이 참에 확실하게 그냥 콱 죽여버렸으면 마음놓고 잘 수는 있었을텐데 말이야.
"하아..."
난 여전히 시체처럼 차가운 피부를 붙들고 그자리에 가만히 서있을 뿐이었다.
*
시간이 흘러간다. 시계는 없지만, 저 하늘 너머의 달이 위치를 이동한게 눈에 명확히 보일 정도다.
마음속으로 시간을 잰다.
10분, 20분.
하지만, 아무도 오지 않는다.
어째서??
방금전의 그 굉음소리가 울려퍼졌음에도, 오는 사람이 없다.
뭐지? 다들 귀가 멀어버린건가? 귀 바로옆에 벨트를 쳐맞는 것 만큼 커다란 굉음에도 깨어나는 사람 하나 없다고?
게다가 여기 제 1안전구역에 거주하는 사람들 중 대부분은 성인. 즉, 22년전의 대재앙을 겪은 세대들이라는거다. 그 덕에 다들 마음속 갚이 트라우마가 박혀있어 방금전과 같은 굉음이라면 여기저기서 불켜지고 난리도 아닐 법 한데, 이렇게나 조용한 모습이라니.
...이상해.
응. 이상하고 말고.
부자연스럽다. 모든게.
침대에서 일어났다.
피범벅인 오른손을 바라본다.
방금전으로부터 지난 시간은 딱 30분. 그 사이에 다 나았다.그럼, 지금 당장이라도 움직일 수 있을거야.
손을 쥐락펴락 해본다. 새끼손가락이 덜렁거리긴 하지만, 그래도 멀쩡하게 쥘 정도는 된다.
잘은 모르겠지만, 적어도 이 근처에서 무언가 벌어지고 있다는 건 확실했다. 마법이라던가, 결계라던가. 분명 해방자들이 무슨 술수를 써서 이곳의 상황이 밖으로 새어나가는 걸 막은거겠지.
곧바로 문으로 걸어가 문의 손잡이를 돌리려고 했다.
달칵
하지만 내가 문고리에 손을 대기도 전에 끼릭, 하며 저절로 열리는 문. 그 너머에서 말소리란 없다. 달빛은 내 뒷편에서 비쳐들어오고 있기에, 문 아래로 그림자는 보이지 않는다.게다가, 그 주변으로 서서히 퍼지는 푸른색 결계의 잔파.
...결계였던 모양이다.
하지만 이 너머의 사람에게 이렇게 결계가 나오는걸 보면, 분명 해방자일텐데.이렇게 먼저 나오겠다는건가?
문을 확 뒤로 재낀다.곧바로 상대방의 머리를 움켜쥐어 터뜨리려고 했다.
하지만 문이 확 열리자 그에 끌려 앞으로 고꾸라진것.
"크윽..."
"..."
엣된 목소리가 울려퍼진다.고개를 내려 상대의 얼굴을 바라봤다.나보다 큰 키를 상정하고 위로 뻗은 손을 내렸다.
"...너 뭐하는 애야?"
날 올려다보는 푸른색의 눈동자.빛바랜 노란색 머리칼....이 꼬맹이가 왜 지금 여깄는거지?전부터 느껴지던 위화감에 경계는 하고 있었다만, 이렇게 바로?
"..."
잠시간 어색한 분위기가 계속됐다.
*
"루시. 맞나?"
"...네."
침대에 앉아 눈앞의 꼬맹이에게 이야기를 듣는 중이다. 어째서 존댓말을 하냐고 묻는다면, 말투때문에 그럴수밖에 없을 것 같은 상황이라고 해야하나.
너무 애늙은이같은 분위기를 풍겨 나도 모르게 존댓말을 해버린다. 이전의 누나누나 거리던 그 모습은 어디가고, 갑자기 이런... 늙은이가 되어있는거야.
역시 대화를 좀 더 해봐야 알겠지.
"그래, 루시. 내가 누군지 궁금하겠지?"
"당연하죠."
"말해주면, 믿을텐가?"
"...아마도요?"
"그래, 하긴...뭐, 말을 듣고 믿느냐 마느냐는 본인 판단이긴 하지만... 받아들이기엔 꽤나 힘겨울 수도 있는데."
...나한테 힘겹고 말고가 뭐가있나. 어차피 겪어볼거 웬만한건 다 당해봤다고 생각하는데. 그냥 고개를 끄덕거린다.
"그럼, 한가지 묻겠다. 루시 넌 사람들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네?"
"인류라는 종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었네. 너는 그들을 아끼고 사랑하는가?"
"...?"
꼬맹이는 환경 다큐멘터리에나 나올법한 대사를 읊었다. 인류를 아끼고 사랑하느냐고?
아니 난...
"...딱히 별 생각 없는데요..."
"그런가..."
...난 딱히, 그들이 어찌되던 별 상관은 없었다. 친한사람이나 아는사람이면 모를까, 인류 전체에 대한 내 생각이 어떠냐 물으면 그건 역시 애매했다.
그냥 별 생각 없다고 표현하는게 맞겠지.
그 말을 들은 꼬맹이는 잠시 손등에 턱을 올리고 고민하더니, 결심을 굳힌 듯 내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한다.
"인류가 멸망한다고 했을때, 너의 가족과 친구가 모두 죽었다고 했을때. 너는 어떻게 행동할거지?"
"..."
가족과, 친구가... 모두 죽었다라.
생각하기 어려운 문제였다.
일단 나에게 가족이야 뭐 말할것도 없었지만, 친구라면 또 달랐다.
만약, 그런 상황이 닥치면 난 어떻게 행동할까?
막 친구들 죽으면 목놓아서 울어야하나? 서러워서 나도 같이 따라죽고 그러려나?
상황이 눈앞에 안닥쳤으니, 그때의 내가 어떻게 행동할 줄은 알 수가 없었다. 그래도 막상 한서우나 마스같은 애가 죽었다고 생각하면... 슬프긴 하겠네.
현실쪽에서도. 마찬가지고.
이렇게 말하자 꼬맹이는 뭔가 더 착잡한 표정을 짓는다.
그렇게 한참을 지속된 정적. 날아가버린 벽에서 들어오는 바람소리가 귀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그러다가, 마침내 자세를 풀고 입을 여는 꼬마.
"...뭐, 앞으로를 위해서라도... 언젠가는 알아둬야했을 사실이니. 지금 말해두는게 좋겠지."
"..."
"루시, 단도직입적으로 묻겠다."
"너는, 이전의 생을 기억하고 있나?"
...
"...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