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8화 〉 1부 44. 네?
* * *
"이거 어때? 괜찮아?"
성화연이 내 앞에 검은색의 안대 하나를 내보이며 말한다. 붉은색 문양이 새겨진, 멋을 추구하기 위해 만든듯한 안대.
딱히 별 생각도 없었기에,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내 머리를 쓸어 왼쪽 안구를 잠시 본 성화연은, 어딘가 서글픈 미소를 지으며 머리에 안대를 씌워준다. 시야라고 해봤자 이전과 달라질 것도 없었지만, 머리에 무언가가 씌워졌다는 느낌은 상당히 기분 좋았다.
그도 그럴게, 이런건 구속구도 뭣도 아니라 그저 '옷'일 뿐이었으니. 불안하지도 않고 따뜻하기만 했다. 고개를 들어 성화연을 바라본다.
"좋네."
웃으며 말해주는 성화연. 사람좋은 미소였다.
'소피야는 아직 안 온건가...'
주변을 둘러본다.
점심시간이라 사람은 많지만, 그중에 아는사람이 껴들어가 있지는 않았다.
마스와 제인, 준서는 제 1 안전구역에서 준비작업 시작한다고 나가고, 알비나와 레프 아저씨는 제 24구역에 파견해둔 팀을 정리하기 위해 행정처리 문제로 바쁘다고 없는 상태였다.
따라서, 지금 이 테이블에 앉아있는건 나와, 성화연. 그리고 파벨 아저씨와 그 꼬맹이 뿐이었다.
꼬맹이는 잠시간 음식을 신기하다는 듯 바라보더니, 한입 먹고선 엄청나게 퍼먹기 시작했다.
"왜 네 주변에는 다 어린애들밖에 없는거냐..."
"아하하...어쩌다보니..."
뭐, 성격 좋은걸 뭐라 할 수는 없는거니까. 현실의 가혹함을 맛보지 못한 순수함이란것도 매력이긴 하지.
"파벨 아저씨는 안가요?"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는 파벨 아저씨에게 묻는다. 그 말에 잠시 날 바라보더니, 자신은 레프와 알비나같은 사람이 아니라 그런 문제에 참여할 수는 없다고 한다.
레프 아저씨랑 알비나가 어떤 사람인데요?
대단한 사람들이지. 나랑은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아무튼 그렇다. 자세한 사항은 기밀. 본인은 그저 친구로서 알고있는 사실이라고 했다.
"...그런가..."
다들 바쁘네.
난 그냥 아무 할일도 없이 여기 앉아있는데.
"으음..."
옆에서 수프를 떠먹는 꼬맹이를 잠시 바라본다.
일단은, 생각좀 해보자.
앞으로 뭘 어떻게 해야할지.
우선은 상황정리부터.
지금 유럽쪽에서는 작전 진행중. '비버 오퍼레이션'이라는 이 작전이 성공하면, 군대가 대륙 내부로 투입되어 연구자들에게 대항할 조력자를 추가로 얻을 수 있다.
광대들은 생사불명. 역시나 이것도 아직은 모를 일이다. 허나 이전의 일을 생각해보면 현재 광대들의 세력은 정말 극단적으로 약화된 상태. 이전처럼 뒤통수 치고 들어올 작정이 아니라면, 무시해도 된다.
그리고, 해방자들. 얘네들은 역시 알 리가 없다. 지금껏 관련 인물은 전혀 만나본 적이 없으니. 역시 누군가와 접촉을 안하면 정보파악은 불가.
마지막으로, 연구자들.
...이새끼들은.
역시 목적이란 나를 확보하는거겠지.
...하지만 어째서, 연구시설 전체에 전이마법까지 가하면서 나를 포함한 모두를 속이려고 했었단말인가?
혹시, 원하는게 나뿐만이 아닌건가? 속아야만 하는게 나뿐만이 아닌건가?
이전의 말을 잘 기억해보자. 분명 연구자들에게 필요한건.
...나.
그리고, 코어.
...한서우.
그들에게 필요한건, 나와 코어를 융합시켜 완전하게 만드는 것.
코어의 소유주인 한서우가, 이곳으로 돌아오게 해야한단 말인가.나와 한서우를 접촉시키는것이, 일단 그들의 목적인 걸 수도.
어떻게 불러오느냐, 그것또한 문제이긴 한데... 일단 마스의 말대로라면 거대한 규모의 마력이 움직일때마다 몇몇 원자구조를 조금씩 변형시키는, 마력파가 발생된다고 했었지.
아마, 마력파가 한서우를 이곳으로 불러들이는 원동력이 될 수도 있다.
그 마력파의 영향력이 세계에 준 영향력이 얼마나 컸을진 알 수 없지만, 적어도... 한서우가 비버 오퍼레이션에 동원됐다는 건, 지금까진 연구자들의 중요 계획중 일부분은 제대로 돌아가고 있다는 것.
한서우가 이전에 총공습 사태때 동원됐다는 것. 그 점만으로도 한서우가 가진 코어가 국방부에까지 들어갔다는 걸 알 수 있다.
...그럼, 어쩌면 비버 오퍼레이션에 한서우가 동원됐다는 것도, 그저 우연이라고 볼 수는... 없으려나.
"루시, 혹시 불편해?"
"응?"
"표정이 안좋길래..."
"아, 그냥...생각좀 하느라."
고개를 돌려 창밖을 지나가는 남녀들을 바라본다.
"..."
뭐, 지금은 우선 행동부터 정하는게 최선이겠지.
자, 앞으로... 어떻게 해야할까.
이곳에서 벗어나 제대로 삶을 누리려면.
영생에 미쳐버리기 전까지...제대로 살기 위해선.
강해져야하나? 여타 정석들처럼, 무너뜨리기위해 강해질 수 있으려나?
...아니야.
이건, 아니잖아.
지금도 마력의 위력이 어마어마해서, 육탄전따윈 꿈도 못꾸고 그냥 파워싸움으로만 가는 중인데.
심지어 연구자들도 내 마력을 봉쇄하기위해 구속구에 뭐에 치렁치렁 달아두기도 했고 말이야.
일단 강해지는 것 따윈 별 상관 없다.
지금으로서도 충분히 강하니까.
애초에 강해질 방법도 연구자들의 계획에 충실히 따르는 것 뿐이지만, 결코 그딴짓은 하지 않는다.
저들이 싸움으로 걸어두는 방식은, 그저 심리전과 각종 도구들, 술수들의 활용. 그것뿐이다.
무해해보이는 인간들을 이용해 사지로 끌어들이는 방법.
그들이 쓰는 방식은... 그런, 우회하는 방식들 뿐이었다.
결국엔, 나 혼자 대비해야 한다는 것밖엔 되지 않는 소리네.
그러다가 문득 느껴진 시선에, 고개를 돌려 성화연을 바라봤다.
걱정스러운 시선으로, 수프를 먹는건지 마는지 모를 정도로 날 바라보는 모습. 시선이 마주치자 황급히 눈을 돌린다.
"...핫."
"응?"
"아.으."
피식,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웃음에.
나조차 놀라버렸다.
창문을 바라보니 비치는 모습.
눈은 죽어있음에도 입만은 웃고있는게 상당히 소름끼치는 모습이지만... 그래도 자연스럽다. 퍽이나.
뭐, 나 혼자 대비해야하는 건 아닐지도 모르지.
잊지말자.
이곳은 그저 악역들만 수두룩하게 넘치는 곳이 아니란 사실을. 이곳도 사람사는 곳이란 것을, 잊지말자.
꼬맹이의 수프 떠먹는 소리가 멈췄다.
***
은은한 달빛이 폐허를 비춘다.
허나, 여기저기 기워지고 보수된 폐허에 빼곡하게 달린 따뜻한 전구는, 그곳이 사람사는 곳이라는 걸 알려주고 있다.
여기저기 오가는 사람들. 허름한 건물과 총들만 빼면 대도시의 야경이라고도 볼 수 있을만한 풍경.
그리고, 그 풍경의 한구석에서 적막하게 울리는 소리.
파각, 파각.
마치, 날카로운 무언가로 계속해서 콘크리트를 내려찍는 듯한 소리다.
그 소리를 따라가면 보이는 것, 그것은 바로. 거미마냥 외벽을 타고 올라가고있는, 소녀의 형체였다.
지친 기색조차 없이, 계속해서 외벽을 타고 올라가는 소녀. 그 손가락 끝은 칼처럼 날카롭게 변질되어있어 타고 올라가기 적합한 구조다.
얼마나 그런 동작을 반복했을까, 마침내 벽 한가운데에서 멈췄다.
그러고선, 손을 뻗어 옆의 창문을 달각거리기 시작한다.
자물쇠를 따기 위한 동작.
잠시간 그렇게 달각거리며 울려퍼지던 소리는ㅡ
끼익...
조용히 열리는 창문과 함께, 멈췄다.
소녀.
윤서아.
나.
나는 조용히 발을 뻗어, 방 안으로 집어넣었다.
조심스럽게 방 안으로 들어오자 보이는것.
푸르른 달빛을 받으며, 환하게 빛나고있는.
이불조차 덮지 않고, 새근새근 자고있는 루시였다.
"...아..."
이런 감정을, 뭐라고 표현해야할까.
기쁨? 그리움?
...어쩌면, 슬픔.
일전에 나눴던, 그 선구자와 나눴던 대화를 기억해낸다.
루시는, 우리가 태초에 받았던 그 사명에서 나와있던, 바로 그 소녀라고.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란게, 이토록 아픈거였단 말인가.
선구자님은 상당히 특이한 생김새였다.
여기서 만나게 될 줄은 상상도 못했지만, 그래도...
마력파를 좇아 달려온 곳에서 선구자님을 만난건... 모두 루시 덕분이었으니.
루시덕에, 자신이 다시 재활성화 됐다고 말씀해주셨다.
"흐흥~"
조용히 발걸음을 옮기자, 콘크리트 위에 덧씌운 나무 마루가 삐걱거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침대의 곁으로 가서, 무릎을 꿇고 루시와 눈높이를 맞추었다.
여기저기 하얀 피부들이 보인다.
요망할 정도로, 노출도가 높은 복장.
그런 복장을 입고선 춥지도 않다는 듯 이불을 다 걷어차고 조용하게 잠들어있다.
루시는... 줄었다.
어려졌다? 라기엔 무언가 이질적인. 아마도 '줄었다'라는 말이 더 어울릴 모습.
팔 한짝이 떨어져나가고, 감은 눈두덩이 하나가 푹 내려앉아있는 모습.
너무나도 가여운 모습이라, 아름답다.
손을 뻗어 루시의 머리를 매만져준다. 절로 새어나오는 미소.
손가락끝으로 배를 쓸어본다.
굴곡이 모두 느껴진다.
차가운 피부가 애처롭다.
정신이 아득해질 정도로 부드럽고, 매끄러운 그 감촉에, 다시금 이전의 기억이 떠오른다.
델리지아에게 심장이 뽑혀 죽어버린 루시를, 창고에서 조용히 지켜보던 그때의 모습이.
지금은 그때와 달리 쏟아져나오는 피도 없고, 그저 아름다운 모습 뿐이지만...
손바닥으로 피부를 쓰다듬어준다. 팽팽하게 긴장되어있는 근육이 느껴졌다.
온몸을 팽팽하게, 자고있음에도.
이렇게 자면 숙면조차 하지 못할텐데, 본능인건가.
불쌍해라.
계속 루시를 어루만져주고 있던 그때, 느껴진 움찔거림.
"..."
루시가, 한쪽만 남은 눈으로 멍하니 날 내려다보고있었다.
"...어..."
고개를 돌려 옆의 사물함을 바라보는 루시.
잠시 그 위에 시선을 준 루시는, 이내 눈이 크게 뜨인다.
광채조차 없는 그 눈으로, 날 바라보는 루시.
"안녕, 루시."
"..."
대답조차 하지 않고, 그저 내 손이 루시의 몸 여기저기를 더듬는 걸 보고있을 뿐이었다.
그러다가, 그 텅 비어버린 눈에 한순간 비친 감정.
"...?"
저 감정이 무엇이었을까, 궁금해하기도 전에.
스윽
루시가 몸을 일으켜, 내 머리로 손을 뻗는다.
"...아?"
그 작은 손으로, 내 얼굴을 움켜쥐는 루시.
아니, 손이 너무나도 작기에 움켜쥔다ㅡ 라기보단, 갖다댄다는 표현이 맞을 것 같지만.
루시의 얼굴을 바라본다.
여전히 멍하니 내 얼굴만을 바라보는 루시.
그러다가, 손 끝에 무언가가 모이기 시작했다.
마력, 이라기엔 무언가 이질적인. 전혀 본적없는 무언가.
하지만, 알고있다.
그 끝에 벌어질 일이 무엇인지, 내가 어떻게 될지 분명하게.
"...루시..."
그렇기에, 슬펐다.
아직도 이렇게나, 무서워하고있었을 줄이야.
퍼걱!
그렇기에, 마력이 모여드는 그 손을 잘라내고, 창문 밖으로 뛰어내려 건너편 건물의 옥상으로 올라갔다.
콰아아아앙!
곧이어 울려퍼지는 굉음에 뒤를 돌아본다.
그 너머로 보이는건, 한쪽 벽면이 날아가버린 방과, 날 바라보는 루시.
이쪽을 바라보며.
"야 이... 미친년아...!"
다 들릴정도로, 크게 외친다.
미친년. 미친년.
속으로 곱씹어본다.
좋은 울림은 아니네.
결국 난 서글프게 웃어주며, 등을 돌려 떠나갈 뿐이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