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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해주세요, 마수님!-42화 (42/162)

〈 42화 〉 1부 38. 집

* * *

계곡사이로 흐르는 물살마냥 오락가락하는 날씨.

한때는 모든걸 다 덮어버릴 듯 어두운 먹구름이, 한때는 세상을 다 비출듯 새하얀 태양이. 높이 떠올랐다 지고, 별이 가라앉는다.

새하얀 평원 아래 잿빛으로 뒤덮인 폐허가 된 도시는, 행군하는 군사들의 사기를 떨어뜨리기에는 충분히 암울한 광경이었다.

하지만, 모두들 이곳으로 온 이유가 있기에. 의지도, 결의도 모두 다지고 온 그들이기에, 겨우 이런 분위기따위에 꺾일 발걸음이 아니었다.

제대로 훈련받은 군대라기에는 중간중간 젊은 청소년들도 껴들어가있었지만, 그들의 눈빛이 이 사이에서 가장 밝다는것이 아이러니라면 아이러니.

구둣발 소리만이 수두룩하게 울려퍼지는 공터 아래에서, 지친 숨을 머금고 천천히 목적지를 향해 발걸음을 옮기는 중이었다.

­끼릭. 끽...

"주파수 맞췄습니다, 대령님."

"좋아."

통신병의 이야기를 들은 가장 선두에 서있는 사내는, 곧이어 뒤를 돌아보더니 뒤따라오는 군사들을 한번 쭉 훑어본다. 그러고선 내뱉는 말.

"오늘밤은 이대로 이곳에서 휴식한다. 혹여 통신장치에서 교란신호라도 잡히면 바로 보고하도록."

그 말을 들은 병사들은 어수선하게 흩어져 각자 자리를 잡고 눈을 정리한다. 정찰병도 의무병도 이젠 제 기능을 할거라 기대하기엔 터무니없이 부족한 숫자이므로, 최대한 몸을 숨겨가는 쪽으로 채택된 자리들.

도시의 한구석, 바람막이 삼을만한 빌딩들이 드높이 서있는 곳. 다 허물어져가지만 그래도 본래의 역할을 잃지 않은 콘크리트 덩어리들이 있는 곳.

끄응, 한숨을 쉬며 나도 그대로 침낭 위에 엉덩이를 깔고 앉았다.주위에 같이 자리를 깔고 흩어져 앉은 4명의 아카데미생들이 보인다.

벨라는 중상을 입어 의무병에게 보필받고있으니, 이 자리에 남은건 듀클링 남매와 카인.꽤나 어색한 모임이지만, 적어도 이 자리가 또래들이 모인 곳이라 그런지 군인들끼리 있을 때보단 그나마 안정감이 느껴지는 곳이야.

주위의 어수선함이 가라앉기 시작할때 즈음, 그 사이 벌써 두명은 잠들었고, 아담과 나만이 전등 아래 걸터앉아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며 시간을 떼우고 있을 뿐이었다.

아담 듀클링, 이브의 오빠. 빛바랜 푸른색의 머리를 가지고있는 동갑의 캐나다 출신 아카데미생. 난 그저 조용히 앉아 그의 이야기를 듣고있는 중이었다.

"...여기오기 전에 마지막으로 갔던곳이, 미국에서 제2차 초상능력자 인권시위 일어났을 때... 거기서 주변구역 치안담당 역할 맡았어."

"너희 아버지도 거기서 일하셨다고 했지?"

"응, 아마... 시위대쪽에 참가하셨을걸. 그래서 나도 진압팀엔 못들어간거고."

"그때 너도 시위대에 참여할 걸 하면서 후회한 적은 있어?"

"...뭐, 솔직히 우리를 위해 들고 일어난 사람들인데, 마음속으로는 엄청 죄책감들었지. 하지만 우리가 없으면 방어선이 그대로 무너지는것도 사실이고 말이야. 지금 와서 인권문제를 타령하기엔 세상이 너무나도 불안정한게 아닐까...하고 엄청 고민했어."

"너희 아버지가 화내진 않았어? 왜 동참하지 않았냐고 하면서."

"...애초에 우릴 위해 참여한건데, 뭘 혼내. 게다가 그땐 북미쪽 아카데미 3개 전부다 동원해서 진압할정도로 규모가 큰 시위였는데, 그때 동원령 거부했으면 점수 팍 깎여서 일반병으로 들어가는 건 거의 확실시됐었고 말이야."

"한국은 최전선쪽이라 그런지 그런 부류의 모임은 많이 없었는데, 이런 이야기로 들으니깐 또 새롭네."

"아하하, 하긴 뭐... 너희들은 고작 2년전만 해도 총공습 사태까지 겪었으니."

그 말에, 가슴속 묻어뒀던 기억 하나가 되살아난다.

허공으로 흩날리는 장밋빛의 혈액들, 온갖 고함과 괴성이 난무하는 전장. 사람의 목숨따위 간단하게 사라져버리던 지옥의 풍경. 이미 익숙해졌다고 생각하던, 그런 풍경.

그리고, 마수의 등에 올라타, 날 바라보며 환하게 웃어줬던 루시의 모습.

"...표정이 왜...혹시, 내가 민감한 곳 건드렸나?"

"...아, 아니... 그냥..."

"그때 사상자 엄청 많이 나왔다고 했었지... 세부사항은 다 기밀뿐이라 아카데미 3학년생들조차 접근 불가능한 정보가 대부분이었던데."

"...응."

아무래도, 그때의 일은 모조리 비공개처리 하기로 했나보다. 확실히, 고작 학생 하나때문에 그런 대규모의 공습사태가 벌어졌다고 밝혀버리면, 진작에 넘기지 않고 그대로 방치한 채 결국 전투가 벌어지게 한 정부에게로 비난의 화살이 돌아갈테니.

솔직하게 말해서 이 사실은 부정하지도 못한다. 그저 학생 하나때문에 수천명의 사상자를 냈다는 건 어딜 봐도 말도 안되는 일이었기에.

가능한 한 많은 사람들을 구하고자 한 나의 신념마저 그때의 일로 흔들리고 말았으니.

절친한 친구와, 전혀 모르는 사람 수백명. 과연 누구를 구해야 하는가.

아무래도 난, 그때 전자에 더 마음이 기울었던 듯 하다. 사람 수천명이 죽은 것 보다, 눈앞에서 루시를 잃었다는 사실에 더 슬퍼했던 자신을 수없이 저주했던 지난 수개월이 떠오른다.

­"...그냥, 너 원하는 대로 해. 굳이 남들한테 납득시켜야 할 필요 있어?"

폐건물에서 나눴던 루시와의 대화가 떠오르는 것도, 모두 자기합리화의 일환일 뿐이겠지.

그 순간 떠올린 말이, 적어도 영웅이라면 눈앞의 사람들을 가능한 한 모두 구하라는 죽어가던 고아원 원장님의 말이 아니라, 그저 만난지 3개월밖에 안된 친구의 말이라니.

ㅡ난.

난 대체, 무엇을 위해 히어로가 되려고 하는걸까.

2년전부터 마음이 흔들릴때마다 계속해서 되물어왔던 질문이지만, 여전히 답을 찾지 못했다.

그래서, 이 마음속에 품어둔 질문을 그저 발산이라도 해보고자 아담에게 묻는다.

이 질문을, 마음속에 썩혀왔던 이 감정을.

그 질문을 듣고 잠시 생각하던 듯한 아담은 이내 말을 시작했다.

"...애초에, 그런걸 고민한다는 것 자체가 대단한 거 아니야?"

"...?"

"사실말이야, 요즘에 히어로라고 이름붙은 초상능력자들을 보면 아무 신념도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거든. 그냥 어릴적부터 교육받아온 하나의 윤리의식만을 기반으로 삼고 기계처럼 반복해서 움직일 뿐이지.

그런 사람들한테 물어봤자 나오는 말은 다 어디에선가 들어본 말, 스스로 생각이라곤 하지조차 않고 내뱉는 말에 불과해."

"......"

"잘 생각해봐. 히어로들은 어차피 모두 군인들이야. 이름만 히어로지, 그저 군인인 초상능력자들 뿐이라고."

"응..."

"우리 모두는 어릴적부터 가혹한 환경에서 살아왔어. 대재앙 이전 구시대의 유물인 민주주의는 그저 껍데기로만 남아있는 상황이고, 하루하루 사는 것 조차 버거운데 말이야."

"그건 그렇지..."

"히어로라고 이름붙은 초상능력자들조차 자신이 어째서 히어로인지 알지 못해. 사람들이 알려주는 목표란건 추상적이기만 하고 제대로 와닿지도 않으니."

"그 사이에서, 사람을 구하고자 하는 신념을 쌓아둔 너는 그 자체만으로도 대단하다는거야.

물론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이 비단 너만 있는건 또 아니겠지만, 그게 그렇다고 특별한게 아니게 되는 일은 없다는거지."

"...난, 위로받고싶은게 아니라..."

"루시라고 했었지? 그 아이의 이름이."

"응."

아담은 침낭속으로 들어가 자세를 고쳐앉았다.

"그 아이가, 뭐라고 했어?"

"내가 하고자 원하는게 있다면 그저 다 이루라고. 주변을 납득시키고자 억지로 힘빼지 말고."

"그리고 또?"

"...그 이후에 찾아올 여파는, 모두 자신이 감당하라고."

다시 한번 루시의 그 신비로운 녹안이 눈앞에 떠오른다.

"넌 뭘 원하는데?"

"...난."

나는.

"나는, 전부 다 구하고싶어. 생명이란 무게는 모두 평등하니, 악인이던 선인이던 일단 구하고싶어."

"...역시, 팔자 좋은 소망이네."

"그렇지..."

"난 그냥 이게 걱정스러운거야. 이게 그저 말뿐인 소망이라면, 이루지도 못할 소망이라면. 나는 대체 무엇을 위해 이 하나를 붙잡고 있는건지."

"왜 이루지 못하는데?"

"...그야..."

이전의 전쟁터가 떠오른다.

마수의 벽과, 탱크들과, 밟는곳마다 존재하던 사체들이.

"난 지금도, 전쟁에서의 희생이 당연하다고 보고 있으니까..."

"..."

"죽음이라는 사실의 의미가, 점점 무뎌져가는 느낌이야..."

고개를 푹 떨군다.

처음의 신념과는 너무나도 괴리감있게 변해버린 나의 모습에 회의감을 느끼고 말았기에.

"...그럼, 기억하면 되잖아."

"응?"

"그렇게 변해가는 자신이 싫으면, 그냥 그 사실 하나하나를 기억하면 되는거잖아. 이 모든것이 얼마나 터무니없고 끔찍한 일인지."

"...하지만, 그렇게 한다면 정신이..."

"받아들이지말고, 투쟁하라는거야. 계속해서."

"...아."

"그게 당연하다는 사실로 인식되면 안돼. 그냥 계속해서 그 사실들에 슬퍼하고 분노하면, 적어도 니가 생각하는 그런 모습처럼 될 거 아니야."

"...응."

"힘들고 아파도, 계속 참고 그 사실에 대항하면, 적어도 이 전장에 찌들어버린 저 군인들의 모습처럼 변하지 않지는 않을까..."

"...이런곳에서, 제정신으로 계속해서 그런 사실을 거부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있을리가."

"다들 지친거야. 아마도."

"계속해서 투쟁해봤자, 바뀌는 건 없으니까. 현실에 회의감을 느껴서 결국 다들 지쳐버리는거야.정신력이 버티질 못해서."

"아마 그 상황에서조차 계속해서 투쟁하는 사람이 있으면 멍청한 이상주의자라고 욕먹겠지."

"...그렇네."

다시 한번 고민에 빠진다.

어째서, 인간은 이 끔찍한 사실을 바꾸지 못하는가.

어째서 인류가 존속하기 위해선 사람이 계속해서 죽는게 당연시되어야 하는가.

...계속해서, 생각해본다.

생각한다.

아담이 잠든 이후에도, 한참을 기대어 앉아 생각했다.

그리고, 점차 전등빛이 깜빡이며 건전지가 다 됐다는걸 알려줄 때 즈음.

마음속에서 떠오른 한가지 생각에, 머리가 깨끗해진다.

인간이 그저 죽음을 당연시 여기게 된 이유.

살기위해 희생이 당연시 된 이유.

그건ㅡ

인류에게, 압도적인 힘이 없기 때문이었어.

힘이 없으니 현실을 바꿀 수 없고, 그저 압도적인 힘 앞에 무릎꿇고 절망할 뿐이었어.

당연한 사실이라는 걸 받아들이게 만드는 압도적인 무력앞에, 결국 절망해버린거다.

ㅡ그렇다면.

그렇다면, 이 사실을 뒤바꾸기 위해선.

강해져야한다. 압도적으로.

그 사실조차 뒤엎어버릴만큼 압도적으로 강해져야한다.

생각해본다면, 상당히 뒤틀린 생각이었다. 다만 이것 말고는 그저 이상주의자가 내뱉는 푸념밖에는 되지 않을 것 같았다.

대화는 소용없고, 공감또한 되지 않는다. 서로 조합될 수 없는 두 생명의 싸움이었다.

입에서 웃음이 새어나온다. 다시한번 마음이 정돈된 것 같은 이 느낌이 좋기에.

오늘밤은 악몽에 잠을 설치지 않고 편안하게 잠들 듯 하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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