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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해주세요, 마수님!-33화 (33/162)

〈 33화 〉 1부 29. 분노

* * *

***Side 루시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이렇다.

머리가 갑자기 띵해졌다.

바들바들 떨리던건 점점 심해지고, 머리는 정지해간다.

그러니까ㅡ 내 머릿속으로 순식간에 몰아쳐 들어오는 이 엄청난 양의 '무언가'에 의해.

무기질적이던 과거의 광경이 전부, 전부 되새겨진다.

분명 무기질적이었던 그 광경이, 피튀기는 광경이 전부 생생하게 되살려진다.

...근데.

근데, 실감이 안난다.

눈앞에 피칠갑을 한 채 비명을 지르는 내가ㅡ루시가 보인다.

배가 찢어지면서, 목이 잘리면서.

처절하게 지르던 비명도, 시간이 지나자 어느샌가 모두 잦아든다. 그러고선 조금 지나자 언제 그런일이 있었냐는 듯 다시 평온을 되찾고, 다시 평소처럼 멍때린다.

ㅡ내가, 저렇게 보였다는건가.

난 그냥, 익숙해진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냥 감정에 무뎌졌던건가.

모두 어딘가에 쳐박아서, 그런 일따위 없었다는 양.

현실도피의 극의라도 되는거냐.

그때 쓰레기통으로 쳐박혔던 감정들은 하나가 되어 순식간에 되새겨진다.

머릿속으로 강제로 쑤셔넣어진 감정들은 전두엽을 정지시킨다.

대뇌를, 소뇌를 전부 정지시킨다.

...감정이라.

내가 죽어가던 온갖 상황들이 머릿속에 다시 박혀들어오고, 그때의 감정들이 전부 하나로 뭉쳐 쑤셔박아진다.

모든 일이, 한순간에 벌어진 것.

순차적으로가 아니라, 그냥 한순간에.

원래 하나였던 것처럼, 그렇게 변해버렸다.

...이러니, 누가 비현실적이지 않다고 느끼겠는가.

분명 그 감정들을 모조리, 천천히, 생생하게, 그 자리에서 겪었으면 미처버렸을게 분명해.

몸은 굳어버리고, 감정마저 잃어버린다. 고통마저 익숙해져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게 된다.

ㅡ분명 그랬을 터다.

나 혼자선 아무것도 못하고, 누군가에게 의존해야 하는 그런 상태가 되야했을 터다.

근데, 이제 와서 뭘 어쩌라는거야.

과거의 감정들을 지금 되새긴다고 해서, 달라지는게 있나?

감정은 항상 무뎌지고 희석되어간다.

심지어 그런 감정이 하나씩 하나씩 실감을 느끼게 하며 들어온 것도 아니라, 비현실적으로 하나로 뭉쳐 흘러들어왔다.

...이러니, 내가 이해를 할 수 있을 리가.

내가 그때 왜 비명을 질렀는지, 내가 왜 그때 울었는지 머리로는 이해하지만 마음속으로는 전혀 모르겠다.

...그래, 평소처럼 말이야.

원래의 상태와 똑같아. 달라진 게 없는걸.

하지만 몸은 다른가봐. 어쩌면, 무의식 깊은곳이 변해버려서 저절로 작용하는 걸 수도 있지.

그 왜, 반사작용 있잖아.

내 몸은 그덕분에 어느샌가 그 감정들을 모두 겪었다면 변해있을, 그런 상태가 되어있다.

...정신마저 오염되지 않은건 다행히려나.

얼굴은 웃지 않지만, 나는 웃을 수 있고, 머릿속으로 정상적으로 생각할 수도 있어.

다만 고통이 간지러움으로 대체되었다는 이 지랄맞은 상황이 너무나 웃길 뿐이다. 아니, 이러면 꼭 내가 미친 것 같잖아.

대체 왜 내가 이걸 간지럽다고 느끼려고 하는진 모르겠지만, 몸이 그런데 뭘 어째. 한순간에 휘몰아쳐 들어온 이 감정은 그저 내 몸의 반응만을 변화시켰을 뿐이다.

ㅡ난, 달라진거 없어.

차라리 달라졌으면 좋으려나. 머리는 정상인데 몸이 이상하니까...

돌겠네 진짜.

*

­키기기기긱

금속 마찰음의 소리.

눈앞의 저 거대한, 붉은색과 검은색이 뒤섞인 다면체로 이루어진 초거대구조물이 순식간에 줄어드는 광경.

어느샌가 루스리아의 키만한 크기로 축소되더니, 이내 세밀하게 조정되며 점점 사람의 모습을 갖춰간다.

색이 변하고, 이내 피부의 형상을 띄어가는 정팔면체.

이어진 가닥으로부터 분리하더니, 곧 땅에 안착한다.

마침내 변화가 끝났을때 눈앞에 남은 건, 검은 머리에 붉은색의 눈을 가진 젊은 여성 하나였다. 눈동자에 십자무늬가 새겨져 있는 게 상당히 특이하다.

"...크로체?"

저 뒤에 서 있는 루스리아가 중얼거린다.

크로체라니, 설마 둘이 아는 사람인가?

하지만 눈앞의 여성은 아무 미동도 안 한 채 나만을 바라보고있다. 루스리아는 신경조차 안쓰고.

...왜저래, 소름끼치게.

눈이 죽어있어. 저게 뭐야.

아니, 게다가 저 괴상한 구조물에서 떨어져나온걸 보고 사람으로 착각하다니, 루스리아는 역시 미친건가?

...아니다. 난 애초에 저 거대한 구조물이 뭔지도 모르잖아.

어쩌면, 정말로 루스리아의 지인일 수도 있어.

...예를들면, 초상능력의 폭주로 저렇게 변했다던가.

'...폭주...'

내가 델리지아예게 온몸이 찢겨나가기 전에 루스리아가 중얼거렸던 말이 머리에 떠오르는건 왜일까.

그때 그 폭주는 내 의지도 아니었는데 말이야.

그땐 그냥...머릿속으로 한순간에 몰아쳐온 그 감정들을 감당하기 힘들어서, 무의식적으로...

"..."

...그럴 리가.

나는 그 감정들을 이해하지 못하는데, 뭐가 무의식적으로야.

'이상해.'

그때의 상황을 되새겨본다.

그때 가장 강렬하게 느껴졌던 것.

내 머릿속을 강하게 울리던 것.

­치직...치지직

잡음이.

잡음이 떠오른다.

...목소리도 들렸던 것 같은데.

'...'

하지만 그건 내 목소리가 아니었는걸.

누가 내 머리에 정신간섭이라도 시도한 거면 모를까.

쓸데없는 생각을 뿌리치고선 다시 고개를 들어 눈앞의 여자를 바라봤다.

그 여자는 여전히 날 바라본채로 가만히 서있다.

그리고 잠시 후, 천천히 열리는 입.

"■■■■■■■■■■■■■■■■■"

"..."

...뭐?

"...?"

...저게, 뭔. 개소리야.

하나도 못알아듣겠어.

머리가 진동하는 듯한, 쇳소리가 섞여 있는 기이한 소리가 저 여자의 입으로부터 흘러나온다.

"...뭔 소리야..."

여전히 익숙하지 않은, 음의 높낮이도 없이 중얼거리는 말이 귀에 들어온다.

...방금 말한게 나라는 사실을 빼면, 꽤나 소름 끼치는 목소리였어.

그 말을 들은 눈앞의 여자 ㅡ루스리아의 말에 따르면 크로체ㅡ 는, 다시 한 번 입을 움직인다.

"■■... ■■■ ■■ ■■■..."

...적어도 이번엔 음절은 확인할 수 있었다.

다시 한 번 크로체는 입을 연다.

"아■... ■■■ ■■ ■■다..."

계속해서 다시.

"아직... 수■■ ■■ 아■다..."

"■직... 수확의 ■■ 아니■..."

"아직... ■확의 때■ 아니다..."

말이 반복되면 반복될 수록, 알아들을 수 있는 단어가 많아진다.

마지막에 나온 그 말은 비록 제대로 들리진 않았어도 말의 전체 뜻을 파악하기엔 충분했다.

'아직 수확의 때가 아니다'...라니.

수확의 때?

그때 문득 느껴진 위화감에, 저 멀리 서 있는 두 명의 사내들을 바라본다.

그 둘은 코와 귀에서 피를 흘리며 쓰러져있다.

'...?'

"뭐..."

루스리아를 뒤돌아본다.

루스리아는 귀에서 피를 흘리고있긴 하지만, 아직까진 멀쩡히 서 있는 수준.

내 시선을 느꼈는지 루스리아는 나를 돌아본다.

...뭐야 이게. 무슨 일인데 이게.

­자박...

눈앞에서 들리는 소리에 크로체를 바라보니, 천천히 주저앉아있는 나를 향해 다가오는 중이다.

서둘러 뒤로 도망치려 하지만, 크로체는 어느샌가 내 앞에 쭈그려 앚아있다.

"...너, 누구야."

"...■.■■.■■■."

"아까부터, 자꾸 그게 무슨 소리냐고."

"..."

섬뜩할 정도로 표정이 없는 그 여자는 잠시 침묵하더니.

­팍

"...아?"

내 머리통을 손아귀로 쥐었다.

"...지금 이게 뭐 하는..."

[...이상해.]

의문을 가지며 손을 쳐내려는 찰나, 머릿속에서 울리듯 들려오는 목소리.

뇌가 드러난 듯, 머리가 시리고 아프다.

이건 마치, 통신마법...

"...뭐가 이상하다는거야."

[...분명 자아를 없애버리라 말했을텐데.]

"...?"

[어째서 아직까지 자아가 남아있는 거지?]

...어째서 아직 자아가 남아있냐니.

무슨 그런 소름 끼치는 말을.

[...넌 그저 제때 익어 얌전히 먹히기만 하면 되는 것을, 왜 그리 반항하는 것이냐.]

"...네?"

[...얌전하게 자아가 사라졌으면 좋았을것을...]

"그..."

[...자아를 무너뜨리기 위해 가능한 한 고통이란 고통은 다 느껴보도록 해줬건만, 정신력이 강한가보구나.]

아까부터 자꾸 무슨 소리 하는 거야.

[...설마, 자유의지인가...]

"..."

[어쩌면, 스스로 보고 듣고 느낄 수 있어 이렇게 된 걸지도 모르겠구나.]

"아니..."

[보고, 듣고, 느낄 수 없으면 자아가 사라지려나?]

"...갑자기 그게 무슨..."

[스스로 움직일 수 없으면, 의존하게 되려나?]

...소름이 돋는다.

이거 분명, 어디선가 느껴본 감각이야.

마치, 서아를 보는 것 같은...

"...씨발."

...여기서 도망쳐야 한다.

내 감정을 읽은건지, 크로체는 그 섬뜩할 정도로 표정없던 얼굴을 일그러뜨려, 환하게 함박웃음을 지어보였다.

[어쩌면, 사지를 자르고 두 눈을 모두 뽑아버리면, 자아가 무너질 지도 모르겠어!]

"미친년."

곧바로 손아귀를 뿌리치고 뒤로 달려 나간다.

­파악!

"으, 핫."

하지만 다리로 휘감겨 들어오는 이 철덩어리는.

사면체와 팔면체가 조합해 만들어진 이 뾰족뾰족한 금속덩어리는 내 움직임을 막아버렸다.

"뭐, 뭐... 뭐하려는..."

계속해서 섬뜩한 웃음을 지으며, 나를 향해 다가오는 크로체.

저 뒤에서 미동하는 검붉은 거대한 구조체가 보인다.

덩어리.

구조물덩어리.

크로체의 등 뒤로, 그 위를 넘어서, 나에게 다가오고있다.

"...아?"

[너에게, 자아란 필요 없다. 알파.]

공중에 떠오르며 뱀의 아가리처럼 변한 금속물.

그 구조체는 그대로 아래를 향해 추락하더니ㅡ

­쿠우웅!!

나와 크로체를, 그대로.

그자리에서 집어삼켜버렸다.

"..."

­차라라락

...집어삼켰다?

주변의 금속들이 다시 마찰음을 울리며 변화하기 시작했다.

공간은 확장되고, 정돈되며. 이내 하나의 모습을 갖춰간다.

­카락...

이내 드러난 공간의 풍경이란.

"...?"

직육면체로 이루어진, 하나의 거대한 방.

그 방 안에, 크로체와 나.

단둘이 남게됐다.

여전히 내 몸은 구속되어 방의 중앙에 그대로 묶여있는 채.

[...코어와도 아직 제대로 융합하지 못했으니... 갈 길은 멀군.]

"...무,슨짓을..."

[코어와 융합하지 못하면, 완전한 것이라고 볼 수 없지.]

"..."

[...알파 넌, 어떻게 그 몸속의 내장들을 모두 교체했는지 알고있나?]

"...닥쳐."

[넌...자아가 너무나도 강렬하군. 꼭두각시란...]

"...아까부터 자꾸 지혼자 무슨 말을 지껄이는거냐고..."

소리를 지를 수 없는 지금 몸의 상태가 원망스럽기만하다. 아무리 화난 채 얘기해보려고 해도 도무지 소리가 질러지질 않는다.

감정이 없다는 게 이렇게 불편한 거였나.

몸 상태를 어떻게든 되돌려야 하는데, 솔직히 이미 되돌아가긴 그른 것 같아. 이미 본래부터 하나였다는 느낌이 든다.

가만히 크로체를 노려보고있자니, 크로체는 이내 웃음을 사그라뜨린다.

곧이어 내뱉는 말.

[그나저나, 알파. 설마 머릿속에 그런게 연결되어 있을줄은 몰랐다.]

"...뭐?"

[벌레들이 재밌는 짓을 해놨더구나.]

...이해하게 설명해줄거라 기대한 내가 잘못이지.

크로체는 계속해서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고, 난 그대로 고개를 숙인 채 가만히 듣기만 한다.

시간은 흐르고, 가슴은 초조해진다.

여기서 대체 뭘 하려는거야.

이런 자그마한 방 하나에서.

점차 두근거리며 뛰던 심장을 억누르려던 그때. 다시 그 끔찍한 쇳소리가 들려온건.

[그럼ㅡ 지금부터. 제대로된 꼭두각시로 만들어보여주마.]

고개를 들어 크로체를 바라보니, 알 수 없는괴상한 검은색의 물질로 만들어진칼을 들고 있는게 보인다.

"...그건 뭐야."

[곧, 알게 될거다. 알파.]

눈앞으로 다가온 크로체.

곧이어.

­콰직!

"아?"

왼쪽 안구에서, 미칠듯한 간지러움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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