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1화 〉 1부 27. 해체와 융합
* * *
***Side 루시
행복한 나날들의 연속이었다.
혼자서, 홀로 드넓은 밀밭 위에서 뛰놀 수 있는, 마치 동심으로 돌아간 것만같은 그런 기분을 느끼며 하루하루를 행복하게 보내고있었다.
분명, 분명 스스로 행복하다고 느꼈을터였다. 이보다 더 즐거운 일은 없다고, 이보다 더 행복한 일은 없다고.
여기가 환상속이라는거?
이미 알고있어.
근데 어쩌라는거야. 현실이라고 해봤자야 언제나 날 고통받게 하는 사람들밖엔 없는데. 난 그저 잠자는 숲속의 왕자님이고, 그저 날 구원해줄 사람들만 기다리면 되는거다.
그런 이기적인 생각으로, 어쩌면 반즈음 포기하다시피 현실에서 도망쳐, 잠시간의 이 환상을 극한의 극한까지 늘려 될 수 있는한 끝까지 붙잡고 늘어졌다.
하지만.
하지만.
내게 필요한건 그저 휴식이었던걸까.
이 행복마저도 질린다.
이 행복마저도, 어느샌가 지루해져 감흥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마음속에 고독감이라는 감정이 차오른다. 허전하고, 무언가 텅 빈 느낌. 그런 감각이 온몸에 차오르기 시작한다.
어째서.
도대체, 뭐가 문제길래.
예로부터 전해져 오던 말 하나가 지금에서야 떠오르는건 어째서일까.
'망각은, 생물에게 내려온 가장 큰 축복이자 저주이다.'
아니ㅡ 아니야.
난, 지금.
행복하잖아.
여기선 날 고통받게 하는 사람들도 없고, 아무런 패악조차 없어. 지금 내 마음속에 차들어간 이 감정은 그저 고독감일 뿐이다.
ㅡ그래서. 사람들을 만들어냈다.
이 환상의 나라에 사람들을 만들었다.
"안녕하세요!!"
"오, 루시냐? 떡꼬치 하나 먹고갈래?"
마치 만화에서나 나올법한 이상적으로 착한 사람들을.
마을은 시끌벅적해지고, 내 마음도 덩달아 충족감으로 차올랐다.
나는ㅡ
모든 게.
모든 게 좋았다.
하지만 어느새부턴가 내 마음속에서 울리던 잡음은 점점 심해져 이내 환청으로까지 들리기 시작한다.
아니, 그래.
어차피 이건 다 내 환상이니까.
결국 언젠간 놔야 하는 거니까.
마음은 점점 부풀어올라, 이내 머릿속을 가득 채운다.
위화감으로 가득하던 인간들이, 고원에 가득 넘쳐 웃음짓던 인형들이 증발해간다.
아ㅡ그래.
저것들은 애초에, 진짜가 아니었어.
알고있어.
이미 처음부터, 전부다.
개같네 진짜로.
알고 있어서, 뭘 어쩌라는거야.
내가 좋으니까 그렇게 한 거고, 내가 좋으니까 도피한 거다.
나에겐 그저 휴식이 필요했어.
그러니까ㅡ 어쩌면.
이 빌어쳐먹을 환상도 질리기 시작한 지금이라면 깨어나야 하는 걸까.
...
지랄하지마 씨발.
지 멋대로 도피하고, 지 멋대로 빠져나오고.
그것참 편리한 도피처네요.
이곳은 환상이었다.
환상으로 도피하는 건 현실도피. 하지만 내가 본래 있던 세계도 만화속이었다. 그것도 그저 환상...
환상.
일 뿐인가?
어쩌면, 정말로 어쩌면. 인간 신우주로서의 삶이 그저 이곳에서의 레플리카였고, 진정으로 살아가는건 이 세계의 내가 아니었을까?
신우주가, 루시의 아바타.
어쩌면 그저 머릿속으로 모조리 만들어낸 환상이 아닐까?
지랄하지마.
누굴, 좀먹으려 드는거야.
현실과 뒤바뀐 환상은, 환상이 현실로 대체됐다고 볼 수 있을까, 아닐까?
환상이 현실이고, 현실이 환상으로 뒤바뀌어버리면, 과연 무엇을 현실이라 부를 수 있단 말인가.
ㅡ아.
진짜로. 지랄하지 말란말이야.
뭘 그렇게 복잡하게 생각하는 건데.
너는, 나는.
나는 지금, 나는...
나는 루시이며, 신우주.
모든것이 그저 내 의식의 연장선.
구분하는 것이, 의미조차 없어.
치지지지지지직
잡음과, 기억이 뒤섞여서 만들어낸 환상의 풍경이란 가히 파멸적이다.
기억속에 있는 모든것들이 끄집어 나와 알 수 없는, 기이하고도 오묘한 형태의 나열을 전시한다.
눈앞에서 무언가 쏟아지고, 흘러가고, 터져나가며. 무언가가 조각난다.
이것이, 이것이.
내가 겪어온 세상. 앞으로 겪어야할 세상.
하지만, 그런 세상따위.
애초에 모든게 거짓인걸.
게다가 난.
알잖아.
이 광경은ㅡ
내 머릿속에서 나온 감각이 아니라는걸.
내가 생각하고 있는, 자그마한 뇌에서 조합한 이미지들이 아니라는걸.
모르는게 너무 많다.
전부 다ㅡ 알 수 없다.
어디서 흘러온건지도 모를 이미지들이, 감각들이, 지식들이.
"ㅡ아아아아아아...!!"
무언가가 연결돼있다.
의식속에, 모든곳에. 몸으로부터, 저 머나먼 미지로부터 무언가가 연결돼있다.
이게 무엇인지 알아보면 알아보려 할 수록, 머릿속의 무언가가 터져나가는 느낌이다.
환상은 부서지고, 눈앞의 모든것이 무너져 내린다.
내 머릿속에서 나온 모든 것은 그저ㅡ 하나의 꿈일 뿐.
지식의 단편이, 극히 일부분이, 빙산의 일각이 내 머릿속으로 흘러들어온다. 미지와 연결된 저 가느다란 선으로부터 애태우듯 방울방울 조금씩 흘러내리는 그 지식들은, 미래를, 과거를, 현재를 모두 뒤섞는다.
"...아...아아...!"
잡음이 이내 온갖 곳을 가득 채운다.
귀에서 울리던 잡음이, 머리에서 느껴지던 두통이 이내 몸을 파열시키기 시작한다. 군데군데에서, 온갖곳에서, 내몸은 형태를 잃고 사라져간다.
ㅡ나.
아니, 너.
그래, 나?
내가, 네가.
내가 대체, 누구지?
무의식은 심연이다.
알 수 없는, 어쩌면 뇌에서 가장 밝혀진것이 없는 공간.
무의식이란 인간에게 그저 '미지'.
심연속에서, 어둠속에서.
접점도 없이 누가 들여다보고 있는지도 모른 채로 홀로.
그런 미지에서, 그런 심연에서. 너무 오래 있었던걸까.
도피라는 선택은 결국 알기도 싫었던 진리의 편린을 맞아들여 파멸하는 것으로 끝이난다.
머릿속에서 흘러들어오는 저 머나먼 미지로부터의 연결과, 루시의 머릿속으로 흘러들어오는 알 수 없는 마력적 흐름.
누군가는 나를 깨우려 하고있고, 누군가는 깨어나기 전 내 정신을 완전히 파열시키려 하고있다.
인간 신우주로서의 삶이, 모두 거짓이라고 알려주려 하는 그 중얼거림에 귀를 가로막는다.
모든 게 거짓이라.
모든 게.
지식의 편린을 마주하며 얻은 진리란 가끔은 가혹하지만, 뭐 어쩌라고.
그래서.
나보고.
뭐 어쩌라는건데 씨발아.
뭐, 미쳐버리기라도 해줄까?
대체 뭘 하고 싶은거야?
대체 이딴 걸 알려줘서, 나한테, 뭘, 하고싶은 건데.
저 머나먼 구멍 위로, 누군가가 웃는 소리가 들린다.
무너지기 시작했다.
마지막 남은 검은 배경마저도 서서히 조각조각 부딪치며, 저 심연 아래로 떨어진다.
괴물과 싸우는 사람은 그 싸움 속에서 스스로 괴물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우리가 그 심연을 오랫동안 들여다본다면, 심연 또한 우리를 들여다보게 될 것이다.
미지의, 무의식속에서.
저 머나먼 곳과 연결된 무의식속에서 지낸, 바깥에선 짧겠지만, 이 안에서라면 몇년이고 이어진 그 도피는 결국, 심연이 날 들여다보는 것으로 끝이나버렸다.
ㅡ아...
잘 가...
***
살며시 눈을 뜬다.
나를 내려다보는 두 명의 인영이 보인다.
...눈부셔.
머리가 어지럽다.
방금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더라. 잘 기억이 안 나네.
무언가 깎여나가는, 아니 그런듯한 느낌...
아니, 머릿속은 왜 또 이렇게 복잡한 생각이나 하는 건지. 영 나답지 않아. 머리아파지는 고민은 그만 두자.
감각이 돌아오기 시작한다.
날 내려다보는 성인 둘도 이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고, 온몸의 감각 하나하나가 등에 닿은 이 딱딱한 대리석 바닥을 느끼게 해준다.
땅에서 올라오는 차가운 공기가 몸을 떨게 만든다.
바들바들.
'...어라.'
지금 내가 추워서 떠는게 맞나?
"..."
아니야. 이건, 추위가 아니잖아.
간지러워.
간지러워?
간지러워서, 온몸이 바들바들 떨린다. 미친 듯이 간지러워서 웃음이 터져나오려고 하지만, 내 얼굴근육은 도무지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는다.
뭐야, 이거 왜 이래.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거야ㅡ?
감각이 뒤섞였다. 분명, 무언가를 보고 깎여나가는 느낌이 들었던 것 같은데, 설마 그 깎여나간 부분이 이런 감각이었을줄은.
간지러움이 느껴지는곳을 바라보니 거대한 상처가 새겨져있다.
피가 울컥울컥 쏟아져 나오는 그 상처에서 미친듯한 간지러움이 느껴진다.
"...으하, 하으..."
적어도 웃음이라도 터뜨려야 속 시원해질 것 같은데, 입에서 내뱉어지는 말은 그저 어딘가 되다 만 소리.
깔깔거리며 웃고싶다. 너무 간지러워.
통증이 전부 간지러움이란 감각으로 대체된 듯한 느낌이다.
그만. 숨막혀서 죽을 것 같아! 간지러움도 너무 지속되면 통증이야.
뭐, 상처가 나으면 사라질 감각이겠지.
일단은 너무 간지러우니까 그냥 몸에 정신을 맡기기로 했다.
***Side 루스리아
"...일어났네?"
"...아니, 이게 무슨..."
알테리지아 본인도 성공할거라는걸 예상치 못했는지, 온몸을 바들바들 떨며 요상한 신음을 흘리는 루시에게서 뒷걸음질친다.
"이렇게 단번에 성공이라니... 솔직히, 무의식 깊은곳까지 떨어져있어 기대는 안했다만..."
"시간 줄였네. 가자, 빨리. 델리지아 기다리고있잖아.
"...그래."
떨떠름하게 서 있는 알테리지아를 뒤로하고선, 온몸을 벌벌 떨고있는 루시를 안아들었다.
이제, 이 메트로의 중앙 홀로 가면 집결지가 있겠지.
조용히, 또각또각 구둣소리를 울리며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
.
.
"...여."
...사실 집결지라고 해봤자, 보이는 사람이라곤 그저 델리지아 하나뿐.
메트로의 지하 1층, 넓은 홀 부분에 서 있는 델리지아는 반팔 티셔츠에 반바지라는 파격적인 복장을 하고 서있다.
저 미친놈. 지금 알테리지아와 난 추워서 검은색 털코트까지 꽁꽁 껴입은 실정인데, 저런 차림이라니?
역시 이해 불가능한 근육돼지다.
품 안에 앉혀있는 루시는 어느샌가 떨림이 조금은 잦아들어 내 옷을 움켜쥐고 기대어있다.
그런 루시를 그대로 땅바닥에 툭 떨어뜨려뒀다.
"...아, 그 소녀군."
"솔직히 거기서 얠 만날줄은 상상도 못했는데 말이야. 그 입 가벼운 조직 보스라는놈이 술술 불어댔으니 좋은거였지."
"전력은 저 정도면 충분하겠군. 맞나?"
"그래. 얘 살짝 정신나간 것 같으니까 접촉은... 어라?"
델리지아와 인사를 나누고 있으려니 어느샌가 엉금엉금 기어와 내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늘어지는 루시.
얘 진짜 갑자기 왜 이러는거야.
바닥에 엎드린채 내 바지를 붙잡고 바들바들 떠는 루시를 보고있으려니 짜증나기만 하다.
음, 보통 사람이라면 안쓰럽다고 느꼈으려나. 난 보통 사람이 아니라 잘 모르겠네.
그냥 무시하고선 발을 툭툭 털어 루시를 떨쳐낸다.
"야, 루시. 니가 지금 뭘 원하는진 모르겠지만 제발 그만좀 해. 이런 추태도 적당히 부려야지."
"아, 우으..."
"그러니까 지금은 그냥 얌전히 퍼질러서 얘기 듣고만 있어라. 니 역할은 어차피 우리가 알어서 할 테니까."
"으, 아흐, 핫..."
그때 갑작스레 위화감이 느껴진다.
목소리에서, 아니 어쩌면 행동거지 모두에서.
그 소름 끼치는 감각에 루시를 유심히 살펴본다.
"아흐흣, 흐하, 핫..."
...
...
...뭐야.
...얘, 지금...
웃는거야?
지금? 웃고있다고?
아니, 잠깐. 내가 지금 알아챈게 사실이 맞나?
상상하지도 못한 충격적인 결론에 당황하고 있던 그때, 루시의 몸에서 이변이 발생한 것은 한순간이었다.
"끄으으으윽ㅡ!"
...갑자기 또 왜 이지랄인데.
"끄하아악?"
루시는 그대로 몸을 뒤틀며 신음하기 시작한다.
그 기이한 광경에 나도 모르게 천천히 뒷걸음질치기 시작했다.
얼마 후, 루시의 온몸에서 피어오르는 빼곡한 양의 푸른 연기.
마력이. 주변의 마력이 모조리 루시에게로 휩쓸려 들어가는 게 눈으로 보일 지경이다.
이건...
"폭주..."
마력의 폭주.
갑자기, 지금.
왜??
나만 아는 이 정보를 델리지아와 알테리지아가 알 리가 없다. 알테리지아를 바라보니 역시 벙찐 표정으로 푸른색 연기가 피어오르는 루시를 바라보고있다.
'...도망쳐.'
도망가야해.
당장 여기서.
하지만 저 피어오르는 연기의 양을 보면,지금부터 전력질주로 뛴다고 해도 저 폭주의 영향권을 벗어날 수 있을지 의문스럽기만하다.
'...죽는다고?'
여기서?
갑자기, 왜 일어났는지도 모를 저 빌어 처먹을 폭주현상때문에?
...아ㅡ
콰아아아앙!!!!!
푸거걱!!!
절망적인 감정으로, 다리가 풀려버리려던 그때. 굉장한 폭음 직후, 얼굴에 핏덩이가 퍽 하고 날아와 매끄럽게 흘러내린다.
"...아?"
델리지아.
루시가 있던곳에 보인건 델리지아였다.
온몸을 피로 적신 델리지아가, 그곳에 서 있었다.
...지금 뭔 일이 일어난거지.
루시를 바라본다.
"..."
다시 델리지아를 바라보며.
"무식한자식..."
"...이건 위험한 것 아니었나? 문제라도 있는건가?"
"..."
후우...
"아니, 문제 없다. 잘했어... 설마 그런 방법으로 폭주를 막을 줄은... 상상도 못했지만."
"단순하게 생각해라. 간단한 문제였다."
"...그래, 너 혼자 그렇게 해라."
이미 하나의 훌륭한 예술작품으로 변해버린 루시를 뒤로하고선, 계속해서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