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0화 〉 1부 26. 혼파망
* * *
***Side 마스
"...추워..."
"우리, 식량 얼마나 남았지..."
"......이제... 이틀 분 정도..."
"시발..."
걷고 걷고, 또 걸어도 눈덮인 도시의 폐허밖엔 보이질 않는다.
설상가상으로 성화연은 지난번의 그 일 이후로 텐션이 나락으로 떨어져버려서 앞으로 진전될 기미조차 보이지 않는다.
여기서 죽는 건가?
아니, 그럴 리가.
그럴 리가 없다.
컨테이너에서도, 총공습사태때도 살아나온게 누구였는데! 내가 여기서 죽을 것 같으냐.
결국 일행에서 가장 활발하게 움직이는건 나밖에 없었다.
"...성화연, 아직 근처에 아무것도 안느껴져?"
조용히 고개를 끄덕인다.
한숨을 푹 쉬며 여기저기 터져나간 자동차를 뒤적거린다.
오랜시간 방치돼있었던 듯, 자동차라고 볼 수 있을 만한 곳은 그저 알루미늄 뼈대밖에 없지만.
역시 그 속에서 나온거라곤 없다.
"..."
막막하다.
이제, 제한 시간은 길어봤자 5일.
그 안에 도시든 뭐든 찾아야 여기서 살아나갈 수 있어.
솔직히 가망은 없지만,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희망을 잃으면 안돼.
아카데미에서 가장 중요하게 가르치는 점이 무엇인가?
바로 포기하지 않는 마음가짐이다. 정말 틀에박혀 썩어 넘치다 못해 석유가 될 정도로 뻔한 교훈인 이 말이, 지금 가장 필요한 말이라는건 당연하겠지.
적어도 여기서 죽기는 싫으니 계속해서 움직인다.
***
이틀이 지난다.
식량은 어느새 부스러기밖에 안남아 모두의 사기를 떨어뜨린다.
성화연은 그 사이 조금 기운을 차린 듯 이젠 부축 없이 스스로도 걸을 수 있게 됐다.
하지만 여전히 아무런 생명체도 감지되지 않은 이곳에서 빠져나갈 기미란 도저히 보이질 않는다.
밤에는 눈폭풍마저 들이닥쳤다.
근처 건물에 숨어 하룻밤을 지내보려 했지만, 당연하게도 다 깨져버린 유리들이 추위와 눈들을 제대로 막아줄 리는 없다.
끔찍한 공복으로 인해 내 불길은 사그라진지 한참.
지옥같은 6시간이 지나가고, 다음날에서야 겨우 눈을 떴다.
정말 한발자국도 못 움직일 것 같지만, 움직여야한다.
온몸에서 쑤시는듯한 감각을 느끼며 겨우 자리에서 일어났다.
.
.
.
걷는 내내 대화란 없다.
당연한 거겠지. 안 그래도 배고파서 죽겠는데 누가 말꺼내서 쓸데없이 에너지 낭비해.
지난 밤 눈폭풍이 분 것 치고는 빌어먹을 정도로 기분나쁘게 파란 하늘이 밉기만 하다.
***
저녁.
어느새 해가 저물기 시작한다.
저 하얀 설원 너머로 넘어가는 붉은 햇빛의 단말마는 마치 마지막으로 믿고있던 등불이 꺼지는 것만 같은, 마음속 일말의 희망마저도 모두 무너뜨리는 듯하다.
죽는거야?
이대로?
몇 번이고 되물어왔던, 최근에 와선 벌써 수십번씩이나 되물었던 질문이지만, 이젠 정말로 죽을 것 같다.
내 몸은 개판에, 성화연은 정신적으로 흐뜨러져있지, 준서는 지속된 마력사용으로 탈진상태다. 그나마 멀쩡한건 제인이라지만 제인도 우리의 짐을 각각 더 받아서 들고 간 탓에 훨씬 지쳐보인다.
마지막이라는 심정으로, 저 기나긴 어둠을 향해 발걸음을 내딛었다.
그리고.
역시, 희망은 우릴 놓지 않는다.
"...야, 이거..."
"...왜..."
"...이거, 타이어 자국 아니냐...?"
"...뭐?!"
제인이 가르킨 곳을 본다.
괴상한 모양의 패턴으로 눈더미가 파여있다.
저 끝까지 쭉 이어져있는 자국들.
확실해.
이건 타이어자국이다.
"...아!!"
갑자기 온몸에서 힘이 솟아난다. 아드레날린의 분비로 그렇게 느끼는 걸 수도 있지만, 적어도 지금은 뭐라도 할 수 있을법한 기분이다.
뒤에서 부르는 제인의 말을 뒤로하고, 타이어를 따라 곧바로 앞으로 뛰쳐나갔다.
달리고, 달리고.
새하얀 설원위에 기나긴 발자국을, 타이어 자국옆에 나란히 새기며 뛰어간 내 눈에 보인것은.
"허억, 허억..."
도로다.
포장도 안되어있고, 투박한 흙길이긴 하지만.
적어도 도로야, 이건.
새하얀 설원위에서 유일하게 드러난 도로.
"아..."
찾았다.
드디어.
양손을 높이 치켜든다.
"우아아아아아아아!!!"
지금은 미친놈처럼 보이더라도 상관 없어.
"살았다아아!"
우린 살아남은거야!
***Side 파벨
"와...이거 발동 타이밍 회로 한 번 봐요. 여기 완전 빼곡한데?"
"난 어차피 초능력자 유형이라 마법식 그런 거 말해도 못알아듣는다."
"아...안타깝네요. 이 마법식이 얼마나 정교한건지 알면 놀라 까무러칠텐데."
"아무튼, 겁나게 정확한 타이밍에 마법진 발동시키려고 그쪽 회로를 그렇게 복잡하게 작성했다는 거 아니냐? 이 정도만 대충 알아들으면 됐지, 뭐."
"결과만 말고 원리를 알아야죠!"
"귀찮아. 싫어."
"이래서 남정네들은..."
일리야는 뾰로통한 표정을 지으며 다시 마법식의 잔재를 탐색하기 시작한다.
"후우..."
담배땡긴다.
주머니에서 연초를 꺼내며 찬찬히 주위를 둘러본다.
트럭 수십대가 각자 도착한 이 황량한 폐허에, 사람 수백이 모여 조사하고 있는 지금의 모습.
한순간 증발해버린 연구자들의 본거지를 탐색해보기 위한 시도이다.
가드의 주체로 시작되어 파견된 이 조사단은 대부분 초상능력자로 이루어져있고, 그 덕에 나도 껴들어가있는 중.
이름은 '글린카 조사단'.
종달새 조사단이라니, 너무 유치한 거 아니야?
아무튼 이번 사건에서 조사단은 심상치 않은 점을 너무나 많이 발견했고, 이 때문에 체류 기간은 더 길어졌던 것뿐이다.
이 황량한 폐허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기이한 점.
너무나도 광대하고 널찍한 이 전이 마법의 존재는, 연구자들이 그저 타의로 사라진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었다.
마치 누군가를 속이려는 듯, 발동 시간 관련식은 이전에 본 적 없을 정도로 빼곡하게, 그리고 정밀하게 적혀있었다.
이 폐허에 유일하게 떠다니는 붉은색으로 발광하는 마력식의 잔재가 이 마법의 규모를 짐작하게 해줄 뿐이었다.
"...대체 얼마나 이런 짓거릴 더 해야 속이 풀리는건지..."
지난 20년 전부터, 그저 인류를 갖고 놀기만 하던 연구자들이 이번에는 무슨 장난을 칠 셈인지.
머리가 지끈거리며 아파온다.
그렇게, 조사는 커다란 의문점들만 남기고 종료되어간다.
***
쾅쾅쾅!
노크를 뭐저렇게 시끄럽게 한담.
소파에서 밍기적거리며 일어나, 문을 열러 움직인다.
문을 열자 보이는것은, 구역 경계 담당 니콜라이.
얘가 갑자기 뭔일이야. 지금 일하고 있을 시간인데.
"어...어?? 야 뭐냐? 니가 먼저 다 찾아오네?"
"혹시 여기 레프 있냐?"
"레프? 걔 지난주에 제 24구역으로 일 나갔는데. 아마 오늘 저녁즈음에 도착할걸."
"아으...미친. 우리 구역에서 번역마법 쓸 줄 아는 사람 걔밖에 없는데..."
니콜라이는 한숨을 푹 내쉬며 자연스레 숙소 안으로 들어온다.
조사단에서 복귀한 지 겨우 3일밖에 안됐는데, 갑자기 또 뭔일이야.
"번역마법이라니, 대체 뭐가 또 문제길래."
"...밖에서 젊은놈들 들어왔어. 네명."
"젊은놈들? 몇살인데?"
"보디랭귀지 보니깐 19살이라던데, 넷 다? 남자애 한 명은 만신창이에다가, 나머지 세 명도 다 굶어 죽을 것 같길래 적당히 수프 꺼내줘서 먹이고있는데, 갑자기 남자애가 말을 건거야."
"...혹시 외국인이었던거냐?"
"...응, 외부인이야. 외부인."
"밖에서 들어왔다...고? 미쳤나보네. 대체 뭐하러?"
"아직 말조차 제대로 통한적이 없으니 그걸 모르겠다. 지도 보여주니깐 가르키던 곳이 확실히 외부쪽이야. 여기 내부사람이 아니라는 말이지."
...외부에서, 마수들을 뚫고 들어왔다...
심지어, 마수들이 급강화된 지금에.
"...미쳤네. 보통 실력자가 아닌 것 같은데."
"근데 생긴거 봐서는 그냥 딱 아직 성인 되기 직전의 풋내기들로밖에는 안보이던데..."
"넌 루시 벌써 잊은거냐."
"...그 꼬맹이는 규격외잖아. 제외해."
"레프 올 때까지만 잘 구슬려서 남아있게 해봐. 혹시 몰라, 여기서 나갈 방법이 생길지."
"...알겠어."
니콜라이는 대접해준 커피잔을 가지고 숙소를 나간다.
지금은 좀 쉬고싶은데, 말도 안 되는 일이 또 벌어졌네.
왜 요즘 갑자기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건지.
평화로운 일상은 어디간거냐.
한숨을 푹 쉬며 준비하기 위해 소파에서 일어났다.
***
"아, 아. 알아듣겠어?"
"...아!"
본인을 마스라고 가르킨 남자애가 동공을 크게 뜬다.
레프와 날 번갈아 보더니 , 이내 고개를 마구 끄덕이는 모습.
주변에 앉아있는 세 명도 놀란 듯 입이 헤벌레 벌어져있다.
하긴, 번역마법이 확실히 신기한 거긴 하지.
대단하다, 우리 레프.
괜스레 자랑스러워지네.
"전, 전 마스라고 합니다. 여긴 성화연, 제인, 이준서고요. 아카데미에서 파견임무 나왔다가 이런저런 사정때문에... 여기로 오게 된 거에요."
"아카데미? 파견임무? 그게 뭐냐?"
"어, 그게 그러니깐..."
마스는 땀을 삐질삐질 흘린다.
어떻게 설명하면 될 지 몰라 난처해 하는듯한 모습.
결국 단어의 뜻을 설명하고, 말이 통하게 될 수 있을 즈음에야 제대로 된 대화가 설명됐다.
정리하자면 이렇다.
이 학생들은 아카데미에서 블랙드림의 유통 경로에 관한 조사문제로 파견임무를 나왔고, 일이 틀어져 이곳까지 흘러오게 된 것이다...
어째 중간에 빈 부분이 많긴 했지만, 그것만으로도 설명은 충분하니 문제는 없다.
"...아무튼 그래서, 지금..."
갑자기 말소리가 멈춘다.
...아마, 지금부터 어떻게 해야할 지 고민하거겠지.
얘기 들어보면 자신들이 뚫고 들어온것도 아니랜다.
그렇다는건 지금 눈앞의 이 애들은, 지금 쌩판 모르는곳에서 외부와의 연락수단도 없이 고립된 상태라는거나 마찬가지라는 소리다.
한참이 지난 후, 그제서야 겨우 말을 땐다.
"...지금 당장 나갈 수도 없고... 여기 정보도 없어서... 일단은, 이렇게 된 김에 유통자 본거지라도 날려버려야하나...음..."
스스로도 확신이 안서는 듯한 말투다.
"...혹시 아시는 정보같은거 있으신가요?"
잠시간의 정적.
눈치를 보던 레프가 슬쩍 말을 꺼낸다.
"...블랙드림 해외유통이라면 보통 벨피스에서 90%이상 독점하고 있을텐데."
"...벨피스요?"
"마피아야. 갱단. 너희도 마피아라는 단어 뜻이 뭔지는 알지?"
"아, 네..."
잠시 고개를 숙여 고민하는 듯한 마스.
"그럼 혹시, 그 벨피스란 갱단의 본거지가 어딘지도 알고계세요?"
"어? 응... 알기야 알지... 근데 어차피 너희들은 나설 필요도 없을 텐데."
"네? 무슨 말이세요?"
옆에 앉아있던 제인은 그 말을 듣고선 튀듯이 일어난다.
"설마... 여기 사람들 전체가 벨피스 소속인거에요?"
"...뭐?"
저게 뭔소리야.
레프는 그 말을 듣고선 엄청나게 웃는다.
"그게 아니라... 어차피 우리가 곧있으면 싹다 섬멸할거라 그래. 너희들이 나설 필요조차 없다는 말이지."
"아...?"
"걔들이 우리한테 죄지은게 좀 있거든. 아마 한 달도 안돼서 지도상에서 싹 사라질거다."
"...무슨 잘못을 했길래..."
"......"
"정 불편하시다면 말씀 안하셔도 돼요!"
잠시 표정이 어두워졌던 레프는 이내 얼굴을 풀고 다시 눈앞의 학생들을 마주본다.
"...너희 출신지가 어디라고 했지?"
"어... 대한민국이요."
"벨피스가, 여자애 한 명을 알 수도 없는곳으로 팔아넘겼어."
"네?"
"솔직히, 그 여자애랑 우리 관계를 설명하라고 하면 잘 못하겠는데... 아마 동료 비슷한 관계일거야. 응."
...루시가?
루시가 팔려갔다고?
왜 진작 말 안해준거지?
레프 혼자 돌아온 것도 다 그것때문이었나?
나 또한 놀란채 레프를 바라본다.
"그래서 그런 거야. 친하냐고 하면 잘 모르겠는데... 아무튼 서로는 엄청 믿었다고 보거든."
"...아."
"그 여자애도 출신이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였대. 너희들처럼."
정적.
갑자기 학생 둘의 얼굴이 굳는다.
마스와 성화연이라고 했던 그 두 학생은 루시의 출신지 얘기가 나오니 갑작스레 표정을 굳히고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갑자기 왜저러는건가, 하고 의문이 생겨나던 그때, 성화연이라고 하는 여학생이 입을 열었다.
아니, 반즈음은 거의 소리치다시피.
"그 애... 이름이! 이름 뭐라고 했어요! 혹시 아세요?!"
"어...어?! 그야 알지...?"
갑작스러운 두 학생의 태도변화에 레프도 당황한 듯 보인다.
"이름은 루시...인데. 왜?"
풀썩.
성화연은 그대로 자리에 주저앉았다.
반즈음 울것같은 표정으로.
마스또한 정신을 못차리겠다는 듯한 표정이다.
"...혹시, 긴 은발에 초록색 눈을 가지고 있던... 여자애 맞나요?"
"......너희가 그걸 어떻게 알아?"
...아무래도, 생각지도 못한 인연이 꼬인 것 같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