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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해주세요, 마수님!-29화 (29/162)

〈 29화 〉 1부 25. 꼬인 실

* * *

순백의 방.

다만 조금은 넓은 방.

연구소의 그 방과는 다르게, 기계장치들도 여기저기 널부러져있고, 사람도 꽤나 많아서 그다지 적막하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 방.

천장에서 비추는 차가운 LED조명에 방 전체가 밝게 빛난다.

그 방의 중앙에 있는 것은, 거대한 마공학장치 [어비스].

지난 총공습사태때 연구자들의 스파이였던 얀센 대령에 의해 발견되고, 확보된, 미지의 기술력으로 만들어진 오버테크놀로지 장치다.

연구를 계속해오고있지만 아직까지도 작동방식조차 알아내지 못한 상태.

다만 전 세계에 존재하는 어비스끼리는 모두 연결되어있어 작동될때마다 알림이 온다는게 그나마 위안이 될만 했다.

오늘도 여느때처럼 마법식의 회로를 고쳐가며 어비스를 통해 이것저것 실험하고있던. 그런 평범한 날이었다.

"A­3 회로 살짝 수정좀 해봅시다. 아마 좌표 관련쪽이 저쪽이 아닐까 싶은데요."

"거긴 이미 예전에 실험한곳이에요. 다른쪽이랑 서로 얽혀있어서 지금은 다른거 먼저 해봐야 할 것 같네요."

"...음, 여긴 어떤가요?"

계속해서 실험과 시행착오를 반복하며 조금씩 회로수정을 하고있던 그때, 알림이 울린것은.

"...또야? 오늘 갑자기 왜 이렇게 알림 많이 울리냐?"

"그걸 어떻게 압니까, 제가 해방자도 아니고."

후배놈의 불평을 무시하고 한숨을 푹 쉬며 가동 위치가 표시되는 디스플레이로 가기 위해 사다리에서 툭 내려온다.

또다시 이용 기록을 위로 보고하기위해 걸쳐야할 복잡한 절차에 발걸음이 절로 축 쳐진다.

­띠디디디디디딕

"...알람소리가 원래 저런거였냐?"

"뭔가 엄청나게 여러 개 울리는 것 같은데요."

"흐음..."

이변이 일어난것은 어찌 보면 예정된 일이 아니었을까.

여느때와 다름없는 평범했던 그날에.

"...미친."

마침내 도착한 디스플레이에 보인것은, 평소와는 비교도 할 수도 없을만큼 화면을 빼곡히 채운 붉은 점의 양.

해방자가, 대규모로 움직이고 있었다.

이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만큼 대규모로.

지난 총공습 사태때도 이 정도로 많이 움직이진 않았는데, 어째서 지금에야?

디스플레이에 표시된 지도를 컨트롤해 축소시킨다. 대륙 전체가 다 드러나도록.

그러자 해방자들의 전체적인 움직임이 보이기 시작했다.

해방자들은 집결하고있었다.

아시아대륙으로, 마수들이 차단한 그곳으로.

유독 서아시아에 집중된 그 붉은 점의 양은, 붉은색으로 발광하는 디스플레이와 어우러져 모두의 머릿속에 경각심을 울리기에는 충분한 양이었다.

***Side 루시

찌르르르.

귀뚜라미가 울어대는 밤에, 반딧불이를 잡기위해 투명한 병을 들고 밀밭을 여기저기 뛰어다닌다.

­사아아...

귓가로 스치는 바람소리가 부드럽다.

맨발 아래로 밟히는 밀들의 단이 푹신하다.

머리위로 빛나는 새하얀, 푸르른 은하수가 고원을 밝게 물들인다.

아, 이렇게 행복했던적이 언제였더라.

오랜만에 지구에서의 기억이 떠오른다.

음, 그러니깐. 루시가 아니라 '신우주'였을 시절의.

내가 지금처럼 행복했을 적이라.

아마 놀이공원에 갔을 때가 아니었을까.

13살즈음 인생 처음으로 놀이공원에 갔던 기억.

롤러코스터도, 청룡열차도 모두 다 그때 처음 봤던거였는데.

구슬아이스크림도 입안에서 오독오독 씹히는 느낌이 기분 좋았어.

친구들과 같이 놀러간 그곳에서 인생 처음으로 최고점의 기분을 느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때는 친구 한 번 잘 만났단말이지.

원래 사람 대부분이 좋은 사람이라곤 하지만, 그래도 놀이공원에까지 데리고 간 사람들은 처음이었는걸.

"앗."

반딧불이가 병 안으로 흘러들어온다.

­팍!

뚜껑을 재빨리 닫았다.

"헤헤."

병 안에 잡힌 두마리의 반딧불이가 야광빛을 깜빡이며 밀밭을 형광색으로 물들인다.

기쁜마음으로 집안의 다락방에 쌓인 수두룩한 책을 펼쳐보기 위해 반딧불이가 담긴 병을 들고 흙길을 따라 발을 옮겼다.

아, 그러고 보니 신발도 만들어서 써야하나? 계속 이렇게 맨발로 흙바닥 밟으면 냄새 스며들 것 같은데.

'음...'

신경 쓰지 말기로 했다.

뭔 상관이야.

어차피 사람도 없는걸!

­치지직ㅡ

...며칠 전부터 울리고있는, 귀에서 울리는 이 잡음은 어느샌가 익숙해져서 이젠 별 문제조차 아니다.

중간중간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려오긴 하지만, 익숙한 목소리는 아니니까 그냥 무시하기로.

­팔락

달빛이 들어오는 다락방 아래, 반딧불이 전등을 내려놓으며 동화책을 펼쳤다.

***Side 알비나

­쾅!

발이 저리다.

빗자루로 가로막힌 폐공장의 문을 걷어차자 난장판인 공터가 시야에 들어온다.

"저새끼들..."

곧바로 공터의 중앙에 널부러져 헐떡이는 두명을 향해 뛰어갔다.

"너희들, 루시 어쩐거야."

멱살을 잡힌 세르게이는 끌끌거리며 웃을 뿐.

"큭, 큭... 한낱 용병주제에, 지금 뭔짓거리냐..."

"닥치고 어디갔는지나 말해. 아? 옆에 이반도 있었구만? 둘이 대체 뭔 수작을 부린거지?"

"머리에 피도 안마른 새파란것들이..."

­빠각!

"커헉! 컥..."

"말해 이새끼야! 루시 어디갔어!"

아무리 생각해도 아직까지 도착하지 못할 이유가 없잖아.

게다가 24구역 전체를 다 뒤져도 나오질 않는다.

어디간거야, 대체.

"정말, 정말 순진하군... 푸흐흐..."

"...여기서 죽고싶은게 아니면, 당장 말하는 게 좋을거다."

"어쩌긴 어쨌겠나? 나도 우리쪽에 접선해온 사람에게 팔아넘겼을 뿐이지."

"도대체, 뭘 주기로 했길래 벨피스랑 루테슘이 서로 손을 잡은거지?"

"말할 것 같나? 어차피, 너희들도 이미 알고 있을텐데."

...그래, 알고있었지만. 이미.

공터 도로 저 중앙에 놓인, 격렬한 싸움의 여파를 완전히 빗겨나간 저 거대한 트럭이 값이겠지.

"그 인물은... 대체 누구였던거지."

"...풉ㅡ"

­빠각!

내지른 주먹에 세르게이는 눈을 까뒤집고 기절했다.

"하아... 빌어먹을 새끼들..."

"알비나, 저거 열어봐야하지 않겠어?"

레프가 트럭을 향해 다가가며 말한다.

"그래. 그래. 열어봐야지. 대체 뭘 받기로 했길래 이런 무모한 짓거리를 한건지. 가드를 건드리면 도시 하나정도는 초토화된다는건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사실일텐데."

"......멍청한것들."

오늘 이후로 벨피스와 루테슘은 지도상에서 흔적조차 남기지 않고 섬멸될거다.

우리가 그렇게 정했으니깐.

지금껏 얼굴이 알려진 간부들은 죄다 암살당하거나 시종일관 귀찮은 습격에 휘말렸기에 숨기고다녔건만, 그 덕에 루시를 잃었다.

거참, 빌어먹을 장난 아닌가.

평범하지 않은 꼬맹이란건 알고 있었지만, 만난 지 이제 한 달 조금 넘은 시점인데 이렇게 헤어지게 될 줄이야.

물론 찾으러 갈거지만 그 전에 어떤 짓을 당할지 모른다.

"...알비나."

머리를 꽁꽁 싸매며 후회로 가득 찬 푸념을 중얼거리고있자니, 트럭의 문을 열어본 레프가 어두운 표정으로 조용히 날 부른다.

"..."

조용히 손짓하는 레프를 따라 트럭의 화물칸을 열어본 내 눈에 보인것은.

"개새끼들."

레프는 곧장 뛰어가 이미 기절해버린 세르게이의 얼굴을 몇 번이고 후려친다.

난 지금 당장이라도 목을 비틀어 죽이고싶은 심정이지만, 저정도로 자제할 수가 있다니, 레프도 대단한걸.

­타앙ㅡ

일어나 도망치려던 루테슘의 보스, 이반의 이마 한가운데에 구멍이 뚫려버렸다.

트럭속에 한가득 쌓여있던것은 피로 뒤범벅인, 질척거리는 내장조직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검은색이라는점이 마수의 기관이라는것을 은유하지만, 이미 루시라는 소녀를 알아버린 내 머릿속에는 그저ㅡ

"...애초에, 이만한 양의 마수 시체를 지금으로선 도저히 구할 도리가 없잖아..."

무참하게 살해당하는 루시의 모습이 자연스레 그려지는건 어쩌면 그저 피해의식이 아니리라.

현재와 과거의 상황을 모두 결합하여 도출된 합리적인 의심이었다.

"...A블록 전부 다 집결시켜도 되겠지, 이 정도면?"

"당연하지. 애초에 루시를 알고있던 놈들이야. 루시를... 그 속에 든걸 활용할 생각마저도 했고. 어쩌면 연구자들이나, 그와 관련된 '누군가'일 수도 있어. 움직일 개연성은 충분해."

그래. 개연성은 충분하다.

루시를 납치한놈들이 누군진 모르겠지만, 적어도 일반적인 마피아나 갱단따위는 아닐거라 예상한다.

그렇다면, 지금부터 당장이라도ㅡ

***

"자네, 요즘 그 소문 들었나?"

"무슨소문?"

"놀라지말고 듣게나."

"또 무슨 말을 들었길래? 네 그 팔랑귀는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라 신빙성이 없다는 건 알고 있겠지?"

"아냐, 이건 확실해. 심지어 내가 검증까지 끝냈으니깐."

"아무튼 그래서, 대체 무슨 소문이길래 그러나?"

꿀꺽.

말해선 안될 걸 말한 듯 두리번 거리는 모습이 주점에 있는모두의 호기심을 자극하기엔 충분했다.

"...산이 솟아나고있다는 모양이야. 요 근처에."

"..."

정적.

"푸ㅡ하하하핫!"

"자네!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나? 산이 땅에서 솟아난다고?! 지진도 없이? 하하하, 근래 들은 농담중에 가장 웃긴 농담이었어."

사내는 얼굴을 찌푸린다.

"아니, 이건 확실하다네. 심지어 증거마저도 있고."

"하하, 그래. 그 증거가 대체 뭐길래 그러나?"

"자네 요즘 주간지 읽어보면 알고 있겠지? 제 1안전구역과의 교류가 갑작스레 뜸해졌다는걸."

"...거긴 애초에 그다지 거래가 규칙적이던 곳은 아니지 않나? 마수들이 들끓던 곳이기도 했고 말이야."

"하지만, 자네도 2개월 전부터 대륙내에 마수들이 싹 사라진건 알고있지 않나!"

"끄응... 그건 그렇지."

"아무튼, 소문에 따르면. 거래가 뜸해진 것이 제 1 안전구역과 제 3 안전구역의 도로 사이에 언제부터인가 솟아나있던 거대한 산때문이라는 얘기가 있어."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린가.

그리 말하려 했다.

허나, 지난번 신문에서 본, 그 사진의 모습이 지금에서야 떠오르는 건 왜일까.

"줄무늬가 가득한 기이한 산이... 땅에서 솟아나고 있다는 소문이네."

"...다들 미친게 분명하군."

"중간에 끊어지지도 않고, 기나긴 산맥처럼 계속해서 무언가를 따라 움직이는듯한 모양새의 산이..."

"..."

주점은 싸늘해진다.

바텐더조차 정리를 멈추고 숨죽인채 이야기를 유심히 듣고있었다.

"...하..."

"......하하핫! 짗궂은 농담이야! 요즘 그런 이야기 지어내서 먹고사는 이야기꾼들 많다더만, 자네도 그런 이야기에 혹한 거로구만!"

"쓰읍! 아니라고 해도!"

"크흐흐, 너무 정색빨지 말고 한잔 들게나."

"끄윽, 뭐. 술이라고 해도."

거부할 것처럼 보이던 남자는 어느샌가 술잔을 잡아채 꿀꺽꿀꺽 들이켰다.

그 모습에, 싸늘해졌던 주점엔 다시 한 번 웃음이 돌아왔다.

시끌벅적.

여느때와 같은 안전구역의 풍경이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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