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화 〉 1부 20. 그만해줘
* * *
***Side 마스
"...으윽."
혼미한 정신으로 눈을 뜬다.
저 위로 보이는것은 군청색 천막의 천장.
...무거워.
배에서 느껴지는 무게감에 눈을 돌려보니 엎드려 뻗어있는 성화연이 보였다.
"...야, 일어나."
"아, 컥."
"..."
"쓰읍."
비몽사몽한 눈으로 일어난 성화연은 날 보더니 침을 황급히 닦는다.
"아, 일어났냐."
"일어난거 알았으면 몸 좀 치워봐. 지금 너때문에 못 일어나겠잖아."
"...너란놈은 어떻게 일어나자마자 하는 소리가 그런 거냐."
"...뭐. 문제있어?"
"아니, 됐다. 애들 불러올 게."
"먹을거 없냐, 나 지금 배고픈데."
"...이 미친..."
"..."
"아, 아니다. 그래, 넌 고생했으니깐... 어휴."
품에서 비스킷 하나를 꺼내 내 가슴팍으로 던져둔 성화연은, 곧바로 천막 밖으로 나간다.
비스킷은 이미 다 부서져있어서, 이젠 그냥 가루라고 봐도 좋을 수준.
그래도 뭐, 지금은 배고프니깐 그딴 거 신경도 안쓰이지만.
탈탈거리며 입속에 모두 털어넣었다.
"후우..."
이제 좀 낫네.
'...그나저나, 여기 대체 뭐야.'
뱃속이 나름 진정되니, 이제야 겨우 주변을 둘러볼 수 있게 됐다.
주변에 보이는 거라곤 3평규모의 작은 천막과 전기가 끊어져 열은 안나오는 전기난로 하나. 전등은 천막 중앙 뾰족한 부분에 매달려 흔들거리며 하얀 빛을 비추고 있다.
바닥은 딱히 돗자리조차 덮여있지 않아 새하얀 눈밭이 그대로 드러난다.
눈? 겨울?
여기 대체 어디지.
배타고 어디까지 실려온거야.
적어도 한국이 아니라는건 분명하다.
우리가 떠나왔을때 한국은 이제 막 가을이 시작될 무렵이었으니.
그렇다면, 여긴 적어도 북부쪽 지방이라는건데.
만약에 남극이라치면 태평양을 가로질러 건너왔다기엔 항해시간이 너무 짧았잖아.
게다가 태평양쪽은 아예 마수로 점령당했다고 봐도 좋을 수준인데, 이번 항해에선 마수의 습격도 3번으로 꽤나 적었고.
아마 러시아나 북유럽 지방쪽이 확실하다.
팔락
그렇게 현재의 위치를 추리하고있던 중, 천막의 문이 부스럭거리며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준서.
"마스, 괜찮냐?"
"뭐, 보다시피."
"치유마법은 처음 써본거였는데, 잘 됐나 보네."
"지금 사람 상대로 임상실험 했다는거냐?"
"긴급상황이었어. 어쩔 수 없었단말이야."
"...하긴. 뭐, 나도 진짜 죽을 거라고 각오하고 나섰는데."
"...살았으니 된 거지."
"그치."
"..."
"제인은? 구했어?"
"그래, 구했다. 우리보다도 쌩쌩한게 밥하나는 잘 먹은 모양이던데."
"...음, 다행히네."
"...앞으로, 어떻게하지."
"..."
그걸 왜 나한테 물어보냐.
지금 그렇게 물어본다고 해봐야 나올 답은 결국 하나밖에 없다. 아무도 모르는 미지의 공간에서, 해야 할 일.
원시의 인류조차도 사용했던 바로 그 원초적인 방법.
"일단 움직여봐야겠지."
"원시적이야."
"잘 아네?"
"아니, 그걸 아는녀석이..."
"솔직히, 너도 떠오르는 방법같은 건 없잖아."
"......"
천막 속이 급격히 조용해졌다.
휘오오...
"...지금 몇시야?"
"한밤중. 너 쓰러진지 얼마 안됐어."
"이 천막은, 역시 그 사람들이 쓰던건가..."
"응. 주변에 여러 개 있어. 꽤 많이 모였던 모양인데..."
"그걸 내가 다 죽였고."
침대가 불편해진다.
"...너무 신경 쓰지 마라. 애초에 범죄자들이었어. 그냥 빨리 털어버려."
그럴까?
근데 그게 원하는 대로 되는 것도 아니고.
"졸려."
"한숨 자, 어차피 우리도 지금 여기서 못움직이니깐. 밖에 눈보라 너무 심해서 하룻밤정도는 쉬고 움직여야돼."
"그럼 불좀 꺼줘."
"아니, 불 끄는것정도는 니가..."
"아이고, 팔이야. 내가 누구 구하려고 이렇게 다쳤는데ㅡ"
"닥치고 그냥 자라."
딸깍
세상이 어둠으로 휩싸였다.
***
"야, 저거 표지판."
"...저게 보여?"
제인은 눈을 찡그리며 고개를 쭉 뻗는다.
"...저거, 러시아어같은데."
"개소리말고."
"..."
"...진짜?"
번역마법같은걸 쓸 수 있는 사람이, 여기 있을 리가 없잖아.
한참은 고위마법인데, 그걸 학생따리가 쓸 수 있을 리가.
결국 여기가 러시아라는 사실만 확인하게 되고, 나머지는 다시 모두 미궁속으로 빠져버린다.게다가, 러시아면 마수들로 포위된 그 대륙이잖아. 탈출은 한 걸음 더 멀어졌다.
"...우리, 식량은 며칠분이나 있지?"
"아무리 아껴먹어봤자 일주일이 한계야."
"여기서 한 명정도만 줄어든다면..."
"아, 좀 싸물어라."
이런 절망적인 상황속에서 기분나쁠정도로 파란 하늘을 뒤로하고 계속해서 남쪽을 향해 걸어갔다.
***
걸어가고, 걸어가고.
하룻밤이 지나고, 이틀이 지난다.
보이는거라곤, 여전히 새하얀 눈밭과 나지막한 과거의 향기가 묻은 정형화된 주택들. 모두 폐허가 된 채 잿빛으로 물들어있지만, 새하얀 눈들이 그 모습을 덮어준다.
보기엔 아름답지만, 죽음의 땅.
어째서인지 짐승도 안보이고 식물들조차 없기에, 식량도 뭣도 없다.
적어도 눈 덕분에 물은 걱정없다는 게 장점이라면 장점일까.
계속해서 걸어간다.
.
.
.
구름은 흘러가고.
다리는 점점 흐트러진다.
마침내, 닷새가 지났을때.
새하얀 눈밭 위에 무언가 이물질이 관측됐다. 낮은 주택들 사이에서 눈에띄게 삐죽 솟아있는 잿빛의 무언가. 딱히 눈이 덮여있는것도 아니었기에 더욱 눈에 띈다.
그곳으로 행선지를 정한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으리라.시종일관 똑같은 풍경을 향해 걷다가 나타난 새로운것이란 호기심을 자극하기엔 충분했다.
이런 상황에서조차 호기심이라니, 어쩌면 인간의 원초적인 욕구중에 호기심조차 포함돼있다는건 맞는 말이었나봐.
반론의 여지란 없었다.
"오..."
아무튼, 그 이물질.
반나절을 꼬박 걸어 마침내 도달한 그 이물질은 꽤나 거대하다. 멀리서도 보였던게 이해가 갈 정도로.
"이게 뭐 같냐."
"...아무리봐도 그냥 병원이잖아."
땅속에서부터 삐죽 튀어나와 있는듯한 모양새의 때묻은 순백의 건물이었다.
순백이라고 해봤자야 눈보다도 훨씬 짙었지만.
뱅글뱅글.
건물의 주변을 둘러본다.
입구라고는 없이, 확실하게 건물의 최상층인듯한 모양.
별 특별한 일 없는 건물인가보다 하고 넘어가려 했던 우리의 눈에 기묘한 붉은색의 발광하는 입자가 발견된건 우리의 행로를 바꾸기엔 충분했다.
"...이건, 대규모 전이마법의 흔적인데..."
"뭘 이동시킨걸까."
"규모를 보자면, 뭔가... 엄청나게 거대한 건물을 통째로 전이시킨 것 같네."
"왜?"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들어가 보자."
"..."
뇌마저 근육으로 이루어진 놈인거냐.
"화연, 혹시 여기 안에 사람같은거 있어?"
"요 근방엔 우리뿐이야. 아무도 없어."
"그럼, 들어가도 별 문제 없다는거네?"
"그런 셈이지. 근데 뭐, 혹시 모르니깐 너무 긴장 놓지는 말고."
"그럼, 들어가자."
.
.
.
찰그락
드러나있는 창문을 깨부수고 안으로 발을 내딛었다.
조각난 유리 조각들에 신발이 채이며 잘그락거리는 소음을 만들어낸다.
그 소음은, 저 끝까지 뻗어있는 어두운 복도를 따라 난반사되며 길의 끝을 비춘다.
"으스스하네."
"...일단은 흩어져서 각자 찾아볼까?"
"난 통신마법은 영..."
"별 수 없잖아. 투정부리지 마."
"...으."
파앗
시린 느낌의 반복.
마치 병원의 로비처럼 보이는 이 공간에서 각자 갈라진 네갈래의 길을 따라 서로 흩어지기 시작했다.
"뭐 찾으면 불러!"
"누구를?"
"나를!"
"아, 좀!"
걸음거리에 맞춰 군화가 자박거리는 소리가 울린다.
벽마다 걸려있는, 소름끼칠정도로 감각없는 미술품들을 무시하고, 방마다 전부 열어본다.
끼익거리며 열리는 미닫이식 문은 얼마나 오랜시간 이 건물이 방치돼있었는지 반증하는 듯했다.
조명조차 들어오지 않는 무감각한 방 속에서, 뭐라도 찾아보기 위해 눈을 혹사시킨다.
대리석바닥에, 전체적으로 깨끗한 공간.
특별한 거라곤 없이 방의 중앙에 의자 하나가 놓여있다.
생긴 게 뭔 고문의자같네.
아니, 고문의자라기보단 처형의자가 알맞는 표정이려나.
의자 위에 매달린 모자형태의 기계에는 알 수없는 용도의 톱니같은것이 빙 둘러 달려있다.
섬뜩하게 그 주변으로 튀어 말라붙어있는 혈액들.
진짜 여기 뭐 하는데야.
서둘러 방을 빠져나와 다른 방들도 둘러본다.
***Side 성화연
"성화연?"
"왜?"
머릿속에 목소리가 울리며 통신이 들어왔다는 걸 알린다.
"너 지금 어디가냐? 거기 땅 속인 것 같은데?"
"아... 계단따라서 계속 내려가는 중인데."
"계단? 여기 지하 있어?"
"그런가본데?"
"너무 멀리가진 마라. 이거 중거리 통신이라 너무 떨어지면 우리랑 연락못해."
"알고있어."
나선형으로 이어진 계단은 저 깊은 심연으로 이어진다.
엘리베이터도 있긴 있었지만, 심지어 작동마저 했지만, 정작 메인인 승강기가 줄에서 끊어져 추락해있었기에 발로 뛰는 중이다.
"하아, 하..."
마침내 도착한 지하는, 꽤나 좁다.
위에 있던 복도들보다도 폐쇄적인 모습에 있지도 않은 폐소공포증이 몰려올 것만 같다.
창문도 없고, 달려있는건 삐걱거리며 우그러진 자동문들과 천장에 달린 LED 조명들.
지하는 전기가 들어오는건지 조명이 이따금씩 깜빡거리며 으슥한 환경을 조성한다.
삐걱...
적어도 힘으로 열 수 있는데까진 하나하나 뒤져가며 조사해보기 시작했다.
***
"..."
기분이 좋지 않다.
'흐익?!'
문을 여는 족족, 실없는 비명이 새어나오는 광경들 뿐.
온통 피로 물들어 있는 데다가, 가끔 굴러다니던 침대는 모두 구속구까지 달려있는 모습이었다.
병원이라기엔 고문실과도 같은 모습.
여기서 도대체 무슨일이 벌어졌던걸까.
쌓여만가는 의문을 묻어둔채 조사를 계속한다.
.
.
.
끼릭
있는 힘껏 잡아당긴 문은 꿈쩍도 안한다.
미련없이 발걸음을 돌렸다.
"후우..."
이제, 남은곳은 단 하나.
지하실 가장 깊숙한곳의 저 방이다.
다른곳과는 달리 완전한 철문으로 되어 폐쇄적인 느낌을 가득 풍기는 저 방. 문은 다른곳보다 더 크고, 살짝 열린 문 틈 사이로는 미약한 푸른빛이 새어나온다.
내 마음속에 쌓인 이 의문들을 풀어줄 방이라고 마음 한구석 깊은 곳에서 확신하고있었다.
꾸드득...
어째 문이 잘 열리지 않는다.
손바닥이 살짝 베여 피가 나기 시작했다.
카강!
결국, 문은 열리지 않았다.
대신 통째로 뜯어져 쿵 쓰러졌을 뿐이지.
손바닥에 흐르는 피를 대충 바지에 닦고 방 안으로 들어갔다.
"...?"
푸른색으로 음산하게 빛나는 커다란 방.
그리고, 저 중앙에 보이는 커다란 모니터.
EXCESS
누르라는듯이 살랑살랑 점멸하고있는 버튼이 부착된, 거대한 모니터였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