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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해주세요, 마수님!-21화 (21/162)

〈 21화 〉 1부 17. 제 24 안전구역

* * *

***Side 윤서아

"서아야."

"..."

대답대신, 침대에 누워 얼굴을 베개 깊숙이 파묻는다.

"...말이라도 좀 해봐. 제발."

"......"

싫어.

전부 다.

아무것도, 하기싫어.

몇 번째 하는 생각인지조차 모르겠다.

천장에 달린 은은하게 노란빛을 일렁이는 샹들리에 형태의 전등이 눈에 들어온다.

어딘가 아련한 라벤더향을 풍기는 이 방의 향기는, 너무나도...

"..."

아...

아리아는 옆에서 이것저것 말을 걸어오지만, 하나도 안들려.

멍하니 침대에 누워 천장만을 바라보고있을 뿐이다.

.

.

.

몽상에 빠져 가만히 누워있기를 10분.

그 사이 할 말을 다 마친건지 아리아 언니는 한숨을 푹 쉬며 침대에서 자리를 털고 일어난다.

"...아무튼, 다음주엔 다시 돌아가니깐, 그때 한 번 찾아보자. 조금 기운이라도 차려. 마음은 이해하지만..."

"..."

이해하면, 그냥. 혼자 내버려두기라도 할것이지.

어쩐지 더 우울해지는 날이다.

지난 2년간, 이러지 않은 날이 있었던가. 모르겠어.

­달칵

아리아가 나가자, 베개를 내려놓고 살며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선, 찬장의 앞으로 걸어간다.

유리문, 저 너머로.

유리문의 저 너머로 보이는것은, 나의 가장 소중한.

­톡

작은 유리병을 조심스럽게 꺼낸다.

아름답게 치장되어있는, 화려한 유리병.

"...루시..."

그 유리병속에 들어 있는, 이미 예전의 생기는 잃은채 간신히 형태만 유지하고있는 덩어리 하나.

덩어리?

덩어리가 아니라, 보석이지.

루시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 그 순간부터, 고동을 멈춘 이 작은 보석을 지키기 위해 정말 갖은 노력을 다했고, 그 결과가 이 너덜너덜해진 보석이다.

그 보석을, 조용히 침대에 누워 품으로 가져와 껴안는다.

'루시...'

인생에.

하나뿐인.

앞으로도 영원히 하나뿐일.

'나의 것.'

"...보고 싶어..."

***Side 루시

"으윽..."

어째선지 갑자기 소름이 돋는다.

피가 너무 많이 빠져나가서 그런가?

...과다출혈 증상에 소름돋는게 포함돼있었나.

마지막으로 의학서적 읽어본지 꽤 돼서 잘 기억이 안 나네.

"...이거, 의심한게 무색하게..."

저 앞에 서서 휘몰아치는 눈보라를 정면으로 받고있던 아저씨가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본다.

"그 상처는, 역시 시간이 지나면 다 낫는거겠지?"

"..."

끄덕거린다.

아마 이 정도 상처라면, 십 몇분만 지나면 금방 낫지 않을까.

"...고통은 있는건가?"

"......"

거, 이상한걸 물어보시네.

"음..."

아무 반응도 안하자 자신도 민감한 부분을 건드렸단 걸 눈치챘는지, 그 아저씨는 고개를 돌려 저 멀리 서 있는 레프를 향해 돌아갔다.

...뭐, 첫 실전이지만. 이론도 확실하게 확립됐고, 마력을 움직이는 방식도 확실하게 터득했다.

그때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작은 상처지만, 마법의 위력은 오히려 수십 배.

어쩌면 수백 배, 수천 배까지 될 지도 모르겠다.

게다가 마법이 기동된 위치도 내 신체가 아니라 저 하늘의 구름 위라는건, 역시 일반적인 형태의 마법이란 건 아니겠지.

마법이라기보단 그저 갈망하는 바를 이루어주는, 그런 유형일 수도 있다.

일단은 내가 마력을 움직일 수 있기만 한다면, 규모던 위력이던 위치던 상관없이 일단은 기동되니 말이야.

기동 조건이 '강렬한 감정'이라는게 어딘가 걸리긴 한다.

현재로선 이 조건때문에 원하는 때에 원하는 대로 마법을 쓸 수 있는 수단이라곤 자해뿐이고.

게다가 이 고통이란것도 결국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무뎌지는 거니까, 나중엔 아예 마법을 쓰지조차 못할 수도 있다.

물론 그때가 되면, 난 이미 죽은거나 마찬가지일테지만.

"...하아..."

대체, 내가 뭘 잘못했다고 이런 꼴이 돼야하는 걸까.

제대로 읽지도 않은, 좋아하지도 않던 세계관 속으로 대체 왜, 하필 내가 떨어졌어야만 했던건지.

이곳에 와서, 내가 의식을 지닌 채 보냈던 기간은 기껏해야 1년.

솔직히, 이 짧은 기간안에 생긴 기억들이 더 강렬하긴 했지만, 그래도 지난 17년간의 기억들이 그냥 사라져버리는것도 아니니깐...

누가 강제로 지워버리려고 하지조차 않았는데.

"..."

아...

집가고싶어.

유튜브도 보고싶고, 게임도 하고싶고, 밀린 웹툰들도 정주행하고싶다.

라면국물에 밥도 말아먹고싶고, 따뜻한 닭고기 수프도 양껏 들이키고싶다. MRE같은 맛대가리 없는 음식들이 아니라.

'...'

'씨발...'

때아닌 향수병에 괜히 우울해졌다.

***Side ???

"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햇빛을 머금은 먹구름 같은 칙칙한 빛을 내뿜는 전등이 음침하게 달려있는 피뿌려진 방 안에, 고음의 비명이 울려퍼진다.

곳곳에 피가 흩뿌려진 이 모습은, 마치 공포영화에나 나올 것만같은 폐퇴적이고 음습한 분위기를 풍긴다.

"컥...허억...!"

손톱이 모조리 뽑혀나간채 눈앞의 의자에 묶여있는 이 여자는.

증오스럽다는 눈길로, 날 바라본다.

"...너, 너... 이... 개자식이..."

­빠득!

"끄윽...끅...!"

입술을 깨물고, 어떻게든 고통을 참으려 감내하는 모습. 하지만.

­꽈지직!

"끄억, 컥!"

얼마나 버틸지는, 모르는 일이지.

"이성주... 너, 이... 개자식이... 언제부터... 언제부터 배신한 거냐..."

"입좀 닥쳐봐, 누나."

"지랄하고 있네 씨발새끼가! 너 죽은 줄알고... 내가 얼마나..."

"...아무도 그딴 거 신경안써, 이유리. 그냥 잠자코 따라주면 안될까?"

"개자식... 나가 죽어..."

쉽게 넘어오진 않을 걸 알고는 있었지만, 굳이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가 뭔데? 굳이 그 아이 하나를 위해서? 이렇게까지.

­콰직!

대체 왜 다들.

­빠직!

그런 덜되먹은 어린애 하나때문에.

­꽈득!

이렇게까지, 하는 걸까.

대체 왜? 모두가?

"허...허억...허..."

"그냥, 조금만 도와주면 안될까 유리 누나?"

"다른... 애들도... 이렇게 팔아먹은거냐...?"

"...후후, 팔아먹다니. 말이 심한걸."

"미친 새끼... 대체 뭐가 문제야..."

"그건 니 알바 아니고."

­콰직!

넘어오지 않으면, 뭐.

그냥 죽어버리라고 하지, 뭐.

하지만, 그거 알아?

누나는 결국 넘어오게 돼있어. 어떻게든.

남을 향한 동정과 연민까지도 모두 가식인 사람들이, 한두명이 아니잖아.

자기 자신마저 속이는 그 역겨움에, 눈살이 찌푸려진다.

***Side 루시

지금 내 눈앞엔 웬 드레스 한벌이 놓여있다.

대체 뭐지, 이게.

의아하다는 눈길로 주범인 알비나를 바라보자, 횡설수설 변명을 늘어놓는다.

힘들게 구한 옷인데다가, 아무리 그래도 후드티 달랑 한벌만 입고다니는건 아니라는 둥, 여자아이라면 보통 드레스 한벌즈음 입어보는 건 꿈 아니냐며 궤변을 늘어놓는다.

저게 대체 뭔말이야.

"아니, 아무리 그래도 이건 좀..."

그렇게 말하자, 어딘가 모르게 표정이 어두워지는 알비나.

"그, 그런가..."

그 표정이.

슬퍼보이는 건 분명 기분탓이 아니겠지.

'왜?'

내가 드레스를 안입는다고, 알비나가 슬퍼할 이유는 없을 텐데.

어차피 그냥 옷 한벌 갈아입는거고, 딱히 일상에 문제는 없으니깐 말이다.

굳이 이유를 대자면, 드레스는 너무 거추장스러운데다가 입으면 내 정체성이 깎여나가는 느낌이다.

지금까지 입어본 완전한 여성복이라고는 교복.

딱 이 한벌밖에, 심지어 이것도 아카데미에 다니기 위해선 필수적이라 입은 것 뿐이지 절대로 내가 자의로 입은게 아니다.

지금까지 자의로 여성복을 입은적은 단 한 번도 없고, 그럴 생각도 없었어.

하지만, 저 표정이 대체 뭐야.

왜 저렇게까지 슬픈 얼굴을 하고있는건데.

괜히 사람 마음 무거워지게 만든다.

"휴..."

어쩔 수 없지.

대체 왜 저렇게까지 구는건진 모르겠지만, 그렇게 원한다면야.

입어도 안죽잖아.

그냥 그런 거지, 뭐.

입을게요.

알비나의 표정이 환해진다.

눈가에 미소까지 띄는게, 역시 내가 드레스 입은 모습을 보려고 안달났었다는 거겠지.

심지어 이 드레스도 엄청 먼곳에서 사이즈 겨우 맞춰서 간심히 얻어온 거라고 했잖아.

성의를 봐서라도 뭐...

그냥 입어볼까.

.

.

.

드레스는 꽤나 무겁다.

이렇게까지 무거웠던건가, 보통.

사이즈는 딱 맞는 게, 경이롭기까지 하다.

예전이라면 너무 작다고 칭얼거렸을만한 이런 사이즈가, 내 몸에 딱 맞다니.

굉장히 신기한 기분이야.

"큼, 예쁘네?"

"...?"

그런건가.

거울 앞에서 살짝 한바퀴 돌아본다.

검은색의 칙칙한 드레스의 치마가, 바람을 따라 넓게 퍼지며 우산같은 형상을 만들어낸다.

이 칙칙한 드레스가 그렇게 예쁜가?

다리랑 목쪽엔 카라같은것조차 없어서 흉측한 흉터가 그대로 드러나는데, 이런 모습이 예쁘다고 할 리는 없고...

그냥 이쪽 취향인가보다.

그 왜, '이모'들 있잖아.

상상도 못했던 일이긴 하지만 뭐, 사람 취향이라는게 그런 거긴 하니깐.

본인이 좋다면 좋은거겠지, 뭐 어때.

물론 그날 저녁에 이 복장 그대로 식당에 가자고 했을땐 엄청 화내긴 했다.

선넘었지 그건.

아무리 그렇게 슬픈표정 지어도 이것만큼은 안된다구.

레프 아저씨도 황당한 표정으로 알비나를 쳐다봤다.

"..."

여전히, 계속 우울한 표정을 하고있는 알비나.

"..."

"......"

그만...

정신공격이잖아... 이건...

그렇게까지 슬퍼하면, 내가 나쁜놈 된 것 같잖아요.

결국 원하는 대로 이리저리 끌려다니는건 나였다.

***

'우리 꼬마아가씨, 이름이 루시랬나?'

­타박, 타박

'루시, 루시양.'

­기잉

'이름 예쁘네요.'

­기이이잉

'있죠, 전. 루시양이 망가져서 비명지르는 모습이 좋은데, 루시양은 생각이 어때요?'

싫어요.

그딴 거.

­기이이이이잉

'비명을 질러야하는데, 정신을 잃어버린다는건 너무나 안타까운 일이지 않나요? 시간낭비에요, 완전히.'

아니야.

그런게 아니야.

그건 그냥 탈출­

'그래서 조금만 조작을 가하려고 하는데, 괜찮죠?'

'영원히 깨어서, 고통받았으면 좋겠어. 루시.'

아냐.

­기잉, 기이이잉­­­

­타박, 타박.

아냐. 하지마.

­우우우우웅­­

하지마.

하지 말아주세요. 제발요.

제발...

­기이익...

'...'

'...'

아...

...

......

...

하지마 하지마 하지마 하지마 하지마 하지마 하지마 하지마 하지마 하지마 하지마 하지마 하지마 하지마 하지마 하지마 하지마 하지마 하지마 하지마 하지마 하지마 하지마 하지마

제발 제발 제발...

하지­ 말아줘요.

­콰득!

'...'

눈앞이.

하얘.

"...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

번뜩.

눈을 뜬다.

거친 숨소리가 새어나오는 입.

저 위에는 그저 숙소의 천장만이 보인다.

"..."

아 씨발꿈.

오늘도 이 꿈이야.

"...윤서아 개자식 진짜."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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