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화 〉 1부 16. 트라우마
* * *
"이유리 요원 연락 안된지 얼마나 지났지?"
"...음, 오늘로 딱 한 달째네요."
"마지막 보고가 분명 '사냥개로 선발됐다' 였지."
"네, 그렇습니다."
"아직 조직 구조 체계조차 명확하게 밝혀지지가 않았으니... 사냥개가 팀으로 움직이는지조차 모르겠네."
"이렇게까지 연락이 뜸한걸 보면, 역시 24시간 팀으로 움직이는게 아닐까요?"
"역시 그런건가..."
저 안으로 들어간 요원중에서, 마지막까지 연락되던 요원은 이유리 소위가 전부였는데.
혹시 그 이유리조차 들통난건가. 하는 불안감이 든다.
물론 반즈음은 근거없는 불안감이지만, 그래도 이렇게까지 오랜시간 갑자기 연락이 끊긴건 지난번 연구자 제 1기지 잠입 이후로 처음이니... 어쩌면 당연한 걸지도 모른다.
이 이후로 대륙 내부로 다시 한 번 들어가려면 또다시 엄청난 희생을 감수해야만 할텐데, 그런 지옥을 또다시 만들긴 싫으니깐.
최대한 이번 작전에서 가능한 한 얻을 수 있는 정보는 전부 다 긁어모아야한다.
하지만 이게 뭔가. 기껏해야 알아낸 정보라고는 신조직 하나의 등장이라는 그저 그런 정보가 전부라니.
물론 연구자들 제 1기지의 소멸이라는 엄청난 정보 또한 있긴 했다. 그러나 그 일조차 또 다른 비극을 불러왔는데, 뭐가 대수란 말인가.
괜히 밝혀봤자 역효과만 날 수도 있어.
결국 이 바깥에서 할 수 있는 일은 한정돼있고, 얻을 수 있는 것 또한 한정돼있다.
"연구자들 본거지 들어갔다가 살아나온 놈인데, 설마 죽진 않았겠지."
이중첩자 노릇이 힘든 일이라는 건 알지만, 뭐.
설마 죽기라도 했겠어?
***Side 마스
"죽겠다..."
벌써 일주일이 지나갔다.
배 안의 컨테이너에 숨어서, 굶어죽기 직전인 상태로.
나갈 수도 없고, 무언가를 얻을 방법조차 없으니.
다들 어딘가에 널브러져서 간신히 숨만쉬고있을 뿐이다.
대체 어쩌다 이렇게 일이 돌아간건데.
왜.
대체 이 배에 실려있던 그 마수는 무엇이고, 지금 이 거대한 화물선이 향하는 곳은 어디란 말인가.
당장이라도 뛰쳐나가 멱살잡고 전부 다 말하라고 소리라도 치고싶다.
하지만 자제하자. 지금 일주일째 먹은거라곤 비스킷 한박스밖에 없으니깐 정신이 나간게 분명해.
최대한 에너지를 아껴야한다.
천천히 눈을 감고, 지난 한 달간의 일을 끄집어내기 시작한다.
"..."
...지난 한 달간, 뭘 했더라.
마력파 사건 세번, 달 위상 역변사건 한 번.
그리고 파견임무 한 번.
파견임무는 뭐 뻔해서 기억조차 안나는데.
적당히 현장급습하고, 차례차례 조직원들 잡아서 자백하게 하고. 전부 다 외국인이었기에 통역마법은 필수적이라 고위마법 선생님까지 사정사정해서 항상 대동해야했지만 말이지. 덕분에 작전 끝나고 선생님의 일까지 도와줘야 한다는 일정이 새로 잡혔다.
아무튼, 전부다 자살시도하려 했다는점이 꺼림칙한 일이긴 했지. 대체 무슨 짓을 하고있길래 걸리면 자살하라는 말까지 바로바로 따를정도로 공포심조차 없는걸까.
단순노가다만 하고있던 그 지적장애인이 행운이었다.
최말단중의 최말단이라 아는 정보가 없긴 했지만, 적어도 물건 옮기려면 위치라도 알고있어야했으니까.
그렇게 그 이후로 시간이 흘러흘러 이 꼴이 되고 만것이다.
"..."
씨발...
이러다가...
진짜로 죽는거 아니냐...
.
.
.
.
.
.
절망적인 심정으로 컨테이너 한구석에 쳐박혀서 농성하고있던 우리의 귀에, 이변이 들려온건 저녁무렵.
준서가 화연이의 뱃멀미를 치료해주고있을 무렵이었다.
"...□■■■□□!!!"
■■■□□□□!
쿠구구구궁!!!
갑자기, 온갖 괴성과 폭발음이 들려오기 시작한다.
배가 순간 기울어지고, 컨테이너가 끌리며 소름 끼치는 소리를 만들어냈다.
'...뭐...뭐야...!'
'쉿, 조용.'
콰과광!!
퍼엉!
...어차피 이 폭음에 묻혀 목소리는 들리지조차 않겠지만, 조심해서 나쁠 건 없어.
안 그래도 흔들리던 배가 훨씬 더 출렁이기 시작하니 뱃멀미가 더 심해진다.
배고프고, 여기저기 쑤시고, 눈은 잠을 못 자서 뜨거운데다가, 이제는 뱃속까지 울렁거리니 정신이 나갈 지경이다.
미칠듯한 굉음과 괴성의 축제는 계속되고, 그 한가운데의 컨테이너 속에서 우리는 몸을 벌벌 떨며 기다릴 뿐이었다.
.
.
.
그리고 마침내, 이 괴이한 전투가 끝나기까지 걸린 시각은 30분.
정신이 혼미해질 지경이다.
눈앞이 번쩍거리고 귀에선 이명이 들려온다.
안돼. 정신차려.
그나저나 이 난리가 일어났는데, 제인은 무사하려나.
무사하겠지?
만약 죽었다면 여기가 어디던간에 적어도 히어로 한 명은 달려올테니깐.
정신을 추스른다.
"...야 이준서, 나한테 진정제좀..."
"나부터, 좀... 신경좀 쓰고..."
하긴, 다들 제정신일리가 없지.
울렁거림은 잦아들지를 않는다.
그렇게 한참을 컨테이너의 벽면을 짚고 헛구역질을 하던 그때. 작게 대화소리같은것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위치는 컨테이너의 오른쪽 저 멀리.
파도소리에 묻혀 간신히 몇 마디만 알아들을 수 있는 수준이다.
"...얼마나 죽었지?"
"3분대 4분대 5분대 전부 전멸입니다. 1분대랑 2분대 대기 시키겠습니다."
"이번엔 꽤 적게 죽었군."
...6할이 전멸당했는데 꽤 적게 죽은거라니, 정신 나간놈들.
저 사람들이 싸운 '무언가'는 역시 마수들이겠지.
대재앙이후로 물자운송이 뜸해진 것도 전부 해양과 상공을 점령한 마수들때문인데, 마수가 강해진 지금 이런 짓을 벌인다는 것 자체가 무모했던거다.
방금전 6할이 죽었다고 했는데도 무덤덤한건, 이런 짓이 벌써 한두 번이 아니라는거겠지.
'역시, 미친놈들이야.'
...절망적이다.
사람 목숨울 개미취급하는 저런 놈들 앞에서, 뭘 어떻게 하라는거야.
***Side 루시
"정말 이런 꼬맹이로 충분한 거냐?"
"물론, 그냥 한 번 보세요. 제가 보장합니다."
못미덥다는 눈으로 날 바라보는 비니 쓴 아저씨에게, 레프가 가슴을 오른손으로 치며 자신 있게 말한다.
뭐, 날 믿는다는 것 자체야 좋은데, 그렇게 전적으로 믿었다가 뒤통수 맞으면 어쩌려고.
나는 몰라도 다른사람한테까지 저런 태도면 문제있는 거다.
뭐, 아무튼.
휘오오...
지금 서 있는 곳은 눈보라치는 언덕.
바닷가 근처라 그런지 비린내도 조금씩 풍겨오고.
언덕 저 아래는 휘몰아치는 눈보라때문에 잘 보이지 않지만...
끼이이이이!
케르륵!
끄어어어어...
저 기이한 소리들이 온 천지를 다 뒤덮고있는걸 보면, 분명 마수들이 빼곡하게 들어차있겠지.
도대체 어떤 정신 나간 사람이 이딴 의뢰를 준건진 모르겠지만, 이번 의뢰만 완료하면 몇 개월은 놀고먹어도 된다며 덩실대던 파벨이 떠오른다.
그만큼 위험하고, 미친짓이라는거지.
애초에 성공가능성도 없는 이 짓을 대체 왜 하겠다고 한건진 모르겠다.
숙소에 있던 처음 보는 아저씨들이 친한척 말걸면서 가드의 일원으로써 테스트하겠다는 말도 몇 번 들었던 것 같은데. 꽤나 띠꺼웠다.
하지만, 분명 농담조로 말한 거 보면 그 사람들도 이번 의뢰가 성공하리란 예상따윈 하지 않았을거야.
상식적으로 외부에서도 대륙을 봉쇄한 마수들을 처리하지 못해 들어오지 못하는 건데, 안쪽에서 그렇게 쉽게 부술 수 있으면 이상한 거다.
심지어 한 달 전부터 마수가 십수배로 강해지기도 했고.
내 실력을 엄청 띄워줬던 파벨과 레프의 말을 믿진 않지만 그래도 잘 해보라는 말을 하던 아저씨들.
이번 일에 날 맡긴건 내가 세계관 최강자라 변호하던 그 두 아저씨들 때문인건가.
딱히 싫지만은 않다. 내가 필요하다는거잖아.
결국 그러한 일련의 해프닝 이후 사람 십수명이 모여 형성한 공간이동 마법을 타고 '카라 해'라 불리는 이곳으로 온 것이 방금 전.
이렇게까지 많은 사람이 관여한 걸 보면 분명 의뢰한쪽은 엄청난 갑부일거야.
마법진 연계한 사람들은 서로 같은 소속인 것 같던데, 혹시 범죄조직같은 건가?
마약이 공공연하게 돌아다니던 이곳이라면, 분명 그런게 이상한 건 아닐테지.
"그럼, 일단 가지."
"..."
끄덕거리며 얼굴에 쓰고 있는 가면을 고쳐썼다.
.
.
.
.
.
.
"저곳에 있는 마수들을 잠시간만 저지해준다면 된다."
"..."
미친놈 아냐 이거?
저걸 저지하라고? 미쳤어?
레프도 이건 무리라고 생각하는지 아무말도 안 하고있다.
해변가에 도착한 우리의 눈앞에 기다리고있던건, 바다로 이어지는 길을 아예 쫙 둘러싸 말그대로 '살아있는 벽'을 형성한 마수들.
높이가 족히 수십미터는 되어보인다.
그 덕에 저 너머에 바다가 있다는 것도 냄새와 파도 철썩이는 소리만으로 간신히 알아볼 수 있을 정도.
여기저기엔 천막이 처져있고, 의뢰한쪽의 조직에 속한 사람들로 보이는 사람들 수십명이 모두 벽 앞에 모여 전전긍긍 하고있는 모습이었다.
"베리어 계열 연계마법을 기동하는 동안, 잠시간만 바다로 통하는 길을 열면 된다. 가능한가?"
"..."
...가능하려나...?
의심스러워. 도대체 저걸 뚫을수나 있는 걸까.
평범한 초상능력자라면 그냥 불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저 아저씨는 이 일이 엄청나게 간절하다는 듯, 거금을 주고 용병을 고용했고, 우리는 일단 왔으니 결국은 시도라도 해봐야지.
"레프 아저씨, 단검 있어요?
"...? 단검은 왜?"
"일단 줘봐요."
의아한 눈길로 날 바라보던 아저씨는 등에 매고있는 배낭속에서 투박한 단검 하나를 꺼내 나에게 건넸다.
"...그걸로 뭐할건진 모르겠지만, 일단은 뭐..."
좋아, 그럼. 해보자.
내가 이전에 마법을 썼던 그 상황을 기억해본다.
레프아저씨에게 배가 꿰뚫렸을때, 그때 나갔던 마법의 위력이 어느 정도였더라.
건물 하단을 증발시키고, 사람 한 명의 팔을 흔적도 없이 소멸시켜버린 거대한 광선이었어. 분명히.
확실히 엄청난 위력의 마법이었지만, 지금도 쓸 수 있을까?
단검으로 그때의 그 상처를 내기란 불가능할텐데.
그래도 해봐야지, 뭐 어쩌겠어.
물론, 그 감정을 억지로 흉내내서 마법을 쓸 수 있기도 하다.
하지만 그러면 움직이는 마력은 고작해야 내 몸만을 두를 강화마법이 전부.
지금 입고 있는건 속옷이랑 바지도 없이, 거대한 후드티 한벌 뿐이었기에 격렬하게 움직이기엔 너무 불안하다.
게다가 아무리 강화마법을 둘렀다고 해도, 저 거대한 벽 속으로 파묻히면 흔적도 없이 찢겨버릴거고.
결국 답이란 원거리마법밖에 없다.
내 어깨에 간신히 걸쳐있던 후드의 왼쪽 어깨부분을 아래로 내린다.
그러자 드러난 상처로 뒤덮인 새하얀 팔.
"...후우..."
단검을 다잡는다.
그러고나선...
푸욱!
어깨가 끊어질정도로 깊숙이, 단검을 찔러넣었다.
.
.
.
.
.
.
"허... 이런 미친...!"
머리는 타는 듯이 지끈거리고, 몸이 바들바들 떨린다.
거대한 상처가 새겨진 어깨를 붙잡고 끙끙대는 내 눈앞에 펼쳐진것은, 하늘에서 쏟아져내리는, 거대한 검붉은 광선.
가히 '천벌'이라 이름붙일만한 위력의 마법이다.
본래 목적은 저지였지만, 이건 아예 그냥 소멸수준.
저 앞에서 불어오는 거대한 바람이 몰아치는 눈보라를 모두 뒤로 날려버렸다.
엄청난 굉음이 사방의 공기를 뒤흔들고, 구름조차 갈라져 바깥으로 퍼져나가는 중.
광선의 직경은 정말 어마어마해서, 마을 하나 즈음은 통째로 집어삼킬만한 크기다.
"끄흐...윽..."
하지만 그딴게 지금 뭔 대수야.
지금 내가 뒤질것같이 아픈데.
내려찍은 왼팔은 아예 마비돼버렸다. 너무 뜨거워서 그렇게 느끼는걸지도 모르겠지만, 아무튼.
'이런것조차 아직도 아프다고 엄살부리면 어쩌자는 건데.'
하지만 그냥 '아프다' 뿐이니까.
이 정도는 그냥 넘겨야겠지.
갈라진 마수들의 벽 틈새로 새겨지는 베리어 마법들을 눈앞에서 직관하며, 몸 좀 추스르기 위해 눈덮인 바닥위에 그대로 다리뻗고 주저앉았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