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원해주세요, 마수님!-18화 (18/162)

〈 18화 〉 1부 14. 배고파요

* * *

***Side 루스리아

또각또각.

메트로의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으로, 구둣소리가 울려퍼진다.

"하아...하..."

몸을 가누기가 힘들다. 도대체 어떻게 움직이는지도 모를 몸상태지만, 움직여야한다.

최대한 부를 수 있는 선까진 다 불렀지만, 얼마나 올 지는 아직 모르니까.

계속해서 계단을 내려가고, 불빛이 사라진 메트로 안에는 내 발소리가 울려 퍼지는 소리만이 남았다.

그렇게, 계속해서 내려가다가, 마침내 승강장에 닿았을 즈음.

희미하게 빛나는 비상등의 불빛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저 멀리 보이는.

온몸을 검은색으로 칠갑한, 중년의 남성 하나.

"...알테리지아."

"오랜만이다. 루스리아."

"...역시, 다른 애들은 안온건가."

"꼴이 그게 다 뭔가? 꽤나 우습군."

"......"

그래. 지금 내 꼴이 말이 아니긴 하지.

온몸이 피투성이에, 신고있는 구두의 굽은 전부 부숴서 없애버렸다.

게다가 입고 있는 옷도 여기저기 찢어져 바람이 숭숭 들어오고.

...어쩔 수 없는거다.

그래도 살아남은 걸 다행으로 여겨야지.

"...대충 얘기는 들었다. 크로체가..."

"...크로체를, 죽여야해."

"답지않게 너무 냉정하군."

"그건 더이상 크로체가 아니야."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진 모르겠지만, 왜 갑자기 그분을 죽여야 한다는진 설명이라도 들어야할 거 아닌가?"

설명, 설명이라. 그때의 크로체가 어땠지. 분명.

마지막의 그 모습은, 분명 어떤 모습이었더라.

기억을 강제로 끄집어낸다. 잊으려고 했던 기억이지만, 적어도 지금은.

하지만, 선택을 후회한다. 기억해야 할 것이 아니었어.

왜 굳이, 다시 꺼내본건지.

검은색의, 노란색의, 푸른색의.

무언가로 가득차있는, 그 질척거리고 불쾌한 몸뚱어리가, 눈앞을 다시 가득 채운다.

"...아니야."

"...뭐?"

"...아니라고..."

아니야.

크로체이기 이전에, 그것은.

"그건 더이상, 사람이 아니었어."

원래의, 그것이 아니라.

"다른, 무언가였어."

"루스리..."

귀가 먹먹해진다. 물속에서 헤엄치는 듯, 붕 뜨는 알테리지아의 목소리들.

그때의, 달의, 뱀의 눈, 그 광경이.

검게 변하고, 검게 물들고, 똬리를 틀기 시작하는.

그 광경이.

뱀의 눈동자와 마주하는 그 두 개의.

노란 눈동자가 세계를 주시하는 그 광경이...

­짜악!

"루스리아!"

"으윽..."

어느샌가 내 앞으로 바짝 다가온 알테리지아가 내 뺨을 후린다.

내 키가 워낙 커서 그런지, 기껏해야 내 가슴까지밖에는 안오는 알테리지아.

"...미안하네."

"......"

"도저히, 설명할 수가 없는 일이라서."

"델리지아는 오고있다. 나머지 3명은... 연락 두절이고. 아마 다른곳으로 떴을거다."

"그럼, 우리 셋이서. 크로체를..."

그게 크로체인진 모르겠지만, 적어도.

한때는.

내 굳어진 입을 확인한건지, 알테리지아가 입을 열었다.

"...그분을, 정말로 죽일건가?"

"......"

"...지금부터 벌써 망설인다면, 결과야 뻔하지. 차라리 히어로들한테 도움이라도 요청해보는 게 어떤가?"

"...지랄 발광하네."

"하긴, 그쪽은 여지따위도 주지 않을테니."

"난 크로체를 살리고싶어."

"......"

"그 안에 든걸 끄집어내서, 크로체를 원래대로 돌려놓을거야."

"웃기는 말이군."

"......"

델리지아가 오고있다고 했던가.

적어도 3명.

알테리지아, 델리지아, 나.

근데, 이 인원으로 '그걸' 공략할 수 있을 리가 없잖냐.

결국,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만은 저명한 사실이다.

하지만 광대인 우리로서 도움을 받을만한 상대가 있을 리가 없잖아.

결국 나오는 답은 하나다.

"...용병이라도 고용해야겠네."

그래, 이거야. 어차피 걔들은 돈만 제대로 받으면 상대가 누구던 토 안달고 도와주니까 괜찮겠지.

크로체가 마지막에, 어디로 향했더라.

분명.

­"제 1 기지..."

연구자들의, 본거지. 그곳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제일 가까운 안전구역은 제 1 안전구역.

전(?) 광대들이 얼마나 숨어들었을지는 모르겠으나, 그곳으로 향해야 한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일종의 전초기지 역할. 게다가,돈도 좀 필요하고.

"그럼, 델리지아 도착하고 나서 바로 움직여야겠네."

"날도 늦었는데, 오늘밤은 이곳에서 쉬고가도록 하지."

"......"

"문제있나?"

그냥, 불안해서...

엄청.

하지만 쉬었다 갈 이유를 반박하기엔 너무나 빈약한 근거.

결국 하룻밤은 메트로 지하에서 쉬다가기로 했다.

지금도 여전히 의식의 심층부 어딘가에서 떠돌고있을 크로체를 상상하며, 불안한 감정을 강제로 억누른다. 어딘가엔 반드시 살아있을 거라고 생각하면서.

***Side 마스

"...이쪽이야."

"여기? 항구쪽?"

"응. 자백한 거에 교차검증까지 끝냈으니 확실해."

"엄청 고생했겠네."

"하하..."

블랙드림 유통경로 조사임무에 관한 결정적 단서의 실마리가 드디어 잡혔다.

제인의 말에 따르면, 붙잡은것은 마약의 유통을 담당하던 조직원 한 명.

이전에 잡는 족족 혀깨물고 자살하려했던 그 조직원들과는 달리, 이번엔 제대로 말이 통하는 놈이었다.

...아니, 말이 통하는 거려나?

제인이 증거인으로 데리고 온 그 남자는 어딜봐도 그냥 지적장애인.

아이러니하게도 이 남자가 그나마 가장 말이 잘 통했다는거다.

붙잡히자마자 바로 자살하라는 지령을 이해 못하거나 거부해서 그랬던게 아닐까 싶기도 하지만.

아무튼, 그 남자의 증언으로 인해 첫 번째 매듭이 풀렸고, 이젠 날짜를 알아내서 습격하거나, 해당 위치에서 잠복해야 한다.

"이런 행운이 언제까지고 계속될 수는 없잖아."

"맞아. 날짜는 또 어떻게 알아내고. 그냥 잠복임무가 최선이야. 나중에 이 사람같은 행운이 또 있으리라는 보장도 없고."

화연이의 말에 '이준서' 라고 하는 검은머리의 남자애 한 명이 동조한다.

"...그래, 그럼. 바로 다음주부터 작전 들어가자."

"히어로들은 어떡하고?"

"그 분들은 이미 다른곳 잡아서 그쪽 소탕작전 진행하는 중이야. 유통사건정도는 우리끼리 해결할 수 있잖아?"

"규모가 좀 클 뿐이지, 뭐... 결국엔 그냥 마약이니깐."

"그럼 그렇게 하자. 의의 있는사람?"

...아무도 없다.

"그럼, 여기 개요부터..."

"인원 배정먼저 해야 하지 않을까?"

"위치만 결정하면 되니깐 딱히 거기까지 할 필요는 없다고 보는데..."

"그건 그렇지."

"그럼, 일단은 큰 틀만 짜고 바로 시작하자. 다음주 월요일에 다들 시간 되지?"

아무튼, 파견 임무는 이렇게 착실히 진행중이다.

***Side 알비나

"알비나, 또 발작했어?"

일어나니 레프가 보인다. 걱정스럽다는 듯 날 바라보고 있는 얼굴.

이마에 통증이 느껴져 슬쩍 만져보네 거즈같은게 붙어있다.

그나저나 발작이라니...

화장실에서 쓰러졌던 기억이 떠오른다. 마지막 순간에 부서지던 화장실 바닥 타일도.

"...아, 맞다. 그랬구나."

"하아..."

그때, 레프의 저 뒷편에서 무슨 소리가 나서 슬쩍 쳐다보니 한쪽 얼굴이 퉁퉁 부은 루시가 들었냐는듯 파벨을 째려보고있다.

루시가 왜저러냐고 물어보자, 파벨이 루시가 날 죽인 줄 알고 순간적으로 이성을 잃어 손찌검을 했다는 말을 하는 레프.

자신이 겨우겨우 말려서 한대 치는걸로 끝났다고 한다.

그나저나, 루시가 날 치료해주려고 로비로 옮기고있었다니.

또 마음이 무거워지기 시작한다.

대체, 대체 루시는 왜 저렇게.지나칠 정도로 생각이 없는거야.

파벨 팔을 날려버린것도 충동적으로 한 일이고, 나를 치료하려고 옮겨준것도 충동적으로 한 일이겠지.당장 눈앞에 보이니깐 그렇게 행동한게 분명하다.

왜 자꾸, 루시한테서 내가 보이는걸까.

어린시절의 내가 왜 자꾸.

그때도, 어릴 적 평범했을 삶에도.

아무 생각 없이 여기저기 뛰놀던, 그때의 삶이 떠오른다.

...

......

그런 일도 아주 잠시였지만.

적어도 어린시절의 내 좋은 추억은 그게 끝이니까.

...루시에게.

나를 투영하는 게 역시 잘못된 걸까.

그때의 내가 경험하지 못했던 일들을 해주고싶다는건 그저 내 자위일 뿐인가.

...

...상관없어, 루시가 뭐라고 생각하던.

그냥. 내가 원하는 대로 하자.

***Side 루시

파벨을 쥐어팼다.

아무튼, 뭐 결국 지혼자 오해하고 난리친거잖아.

파벨 아저씨도 자기가 잘못한 걸 아는지 그냥 가만히 맞기만 했고.

그렇게 파벨의 뺨을 후리고있던 내게 알비나가 다가와서 잠깐 밖에 돌아다니자고 말하자,순간적으로 내가 잘못들었나 싶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알비나를 바라봤다.

하지만 역시 잘못들은게 아니라는듯, 손에 이끌려 밖으로 나와 도시를 돌아다니는 중.

이 아줌마는 개인의사존중도 없이 그냥 막무가내. 하지만 어차피 밖에 돌아다닐건 예정된 일이었기에 잠자코 따라나간다.

.

.

.

전체적으로 모양새는 상당히 을씨년스럽다.

폐허가 된 건물을 그냥 여기저기 보수해서 쓰고있을 뿐인 도시인데, 정상적으로 보인다면 그게 이상한 거겠지.

알비나랑 이대로 같이 쭉 길거리나 쏘다니는건 너무나 어색했기에 잡화점이나 들르기로 했다. 개인적인 일이라 둘러대며 그 아줌마는 밖에 내버려 두고 돈만 받아온다. 일단은 복장때문에 들를 곳이기도 했고.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속옷이랑 바지도 없이 커다란 후드티 하나 달랑이라니. 이건 너무하잖아.

"...속옷이라도, 어떻게 좀 안될까요?"

"이런곳에 아동복장이 있을 리가 없잖냐. 애초에 어린애가 오는 곳도 아닌데. 팔리지도 않는걸 갖고있으면 그건 그냥 페도새끼지 뭐야."

"아니, 그래도 이건..."

"지금 너 입고 있는 그 후드티도 흘러내리지 않는거 겨우 찾아서 맞춘거야. 너무 많은걸 바라진 마."

"..."

그래도 명색이 잡화점인데, 적어도 아동복 하나정도는 있어야지...하지만 주인장의 페도발언에, 결국 반박할 말이 사라지긴 했다. 은근히 논리적이라 더 분하다.

원래도 그랬지만 왜소한 지금 몸의 체구가 더 원망스러워지기 시작한다.

그럼 결국, 아동복 구하려면 저 외곽까지 발로 뛰어야한다는 소리구나. 미친.

절로 한숨이 새어나온다.

"...그럼, 가면이라도..."

"가면?"

"그냥 얼굴좀 숨기려고..."

"가면. 가면이라. 확실히 그건 만들수는 있겠네. 그래. 가면은 되겠다."

밖에 돌아다닐땐 적어도 얼굴은 숨겨야하니깐...

또 광대나 연구자들같은 미친놈들한테 들켜서 무슨꼴을 볼 줄 알고.

다행히 가면정도는 사이즈가 안맞더라도 직접 만들어 줄 순 있다고 하네.

아무튼 그렇게, 잠시간의 절망적인 쇼핑은 끝이 났다

* *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