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화 〉 1부 12. 영웅
* * *
"너... 너 뭐하는거야."
루시의 피묻은 왼팔을 잡아채 번쩍 들었다.
"이게 뭐하는 짓거리냐고!"
"...딸꾹."
말을 하란말이야.
대체 뭣때문에 이런 병신같은 짓을 한건데.
자해.
대체 왜. 이딴짓을.
자해는 보통 사람이 정신적으로 몰려있을때나 하는거다. 원래.
그냥 일반적으로 슬프거나 화난다고 자해를 하는 사람은 그냥 미친놈이다.
정신병자.
하지만...
이 소녀가, 정신병자는 아닐거라고.
분명 그럴거다.
그렇다면 답은 하나잖아.
원래부터 정신적으로 몰려있었다는거다.
"...말하는거 들어보면 원래 평범한 여자애였나봐. 근데 지금 상태 보니깐 뭔가 끔찍한 실험을 받아서 마수가 된 것 같기도 하고..."
"......타이밍 보면 아마 연구자들쪽이랑 연관된 인물이겠지..."
몇시간 전 들었던 레프의 말이 머릿속에서 울린다.
계속해서, 머릿속에서 울리며 날 괴롭힌다.
이 소녀의 과거가 어땠을지, 점점 그려지기 시작한다.
왜.
분명 주변엔 대화도 통하지 않는 사람들만 있었겠지. 혼자서. 홀로.
그 사람들에게 실험을 빙자한 온갖 끔찍한 고문을 당했을 터였다. 죽지도 않는 몸이니 벌써 수백번, 수천번 죽음을 경험했을 수도 있다.
미치지 않는게 이상하다. 그런상황이면.
희망도 없고, 아무것도 없는데 대체 무엇을 붙잡고 살아간단말인가.
행복이란걸 경험하지도 못하고, 그저 고통만이 가득한 인생.
흰 연구복을 입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온몸이 찢기는 루시가 눈앞에 그려진다.
갑자기 왜 이딴 이미지나 떠오르는건지.
상상이지만 너무나도 끔찍한 광경이다.
"...루시."
"...으..."
여전히 몸을 바들바들 떠는 루시.
왜 이러는거야, 대체 왜.
또 뭐가 문제야.
'아.'
벌써. 잊은거야?
내가.
루시한테 무슨 짓을 했는지.
"제...제송함다..."
"...하."
콰지직!
'...'
"..."
루시를 침대 위에 내팽겨친다.
그러고선 곧장 방 밖으로 뛰쳐나갔다.
.
.
.
"하아...하아..."
눈앞이 온통 새하얘진다.
시야가 수축됐다가 확장되고, 비틀리며 일렁인다. 숨소리는 가빠져 귓속을 가득 메운다.
'내가, 내가 대체 뭔 짓을 한거지.'
"아...아아..."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싼다.
'이, 병신같은 새끼...'
헹복? 행복을 느끼지 못한 삶?
루시는 이곳에 와서조차 행복감같은건 느끼지 못했다.
내가 한 끔찍한 짓이 새삼 자각되기 시작한다.
평생을 끔찍한 고통과 질척이는 핏덩이 속에서 살아온 아이가, 연구소에서 탈출해 처음으로 만난 사람들.
처음으로 만난 그 사람들에게 연구자들이 했던 행위와 별다를 바 없는 짓을 당했다.
배가 터지고, 온몸이 송곳으로 꿰뚫리는 경험.
비록 사람 한명을 불구로 만들었다고 하더라도.
파벨에겐 미안하지만 그래도 먼저 죽을뻔했는데 어쩔 수 없던 거였잖아.
그런 짓을 당하고 나에게 온 그 아이를, 난 마구 구타했다.
그저 반격하려고 했다는 이유만으로.
죽일 기세로 구타했고, 사실 이미 한번은 죽였다.
그 어느곳에서조차, 행복을 찾지 못했다. 그 아이는.
만났던 사람마다 모조리 자신을 죽이려들고, 고통받게 했을 것이다.
그런거다.
어떻게, 미치지 않을 수가 있었을까.
대체 어떻게, 왜.
미치지 않았다고?
무엇을 보고?
"으...흐윽..."
어린시절이 갑자기 떠오른다.
왜, 루시의 이야기를 하는데 내 어린시절이 떠오르는건지.
붉다. 온통.
내가 살면서 서서히 깎아낸것들이 떠오른다.
정신이 혼미해진다. 경계가 희미해진다.
"아아아악...!"
눈앞엔 그저 마구 찢겨나가는 사람들과 죽어나가는 아이들이 보일 뿐이다.
붉게 물든 하늘 아래, 검은 짐승들의 대학살.
모든곳에서 피가 흩뿌려지고, 절규가 터져나온다.
부모가 아이를 지키려하고, 모두가 뜯어먹히고, 모두가 죽어나가고, 모두가 분해되는.
그 광경이.
눈앞에 다시 떠오른다.
혼탁해진다. 이게 가짜라는 걸 알고있는데, 도저히 무시할 수가 없다.
'이건 가짜야. 가짜라고.'
이미 지나간 일이야. 지금이 아니다.
'하지만.'
하지만.
그냥 놓을 수가 없어.
'왜.'
대체 왜.
이미, 깎아내버려서 멀리 보내버린 기억들인데.
대체 왜.
남한테 자신을 투영하는 일 만큼 덧없고 쓸데없는 짓은 없다.
그 끔찍한 광경은, 이내 내가 쓰러져있던 루시의 가슴을 박살내던, 그 광경으로 넘어갔다.
콰지직!
루시의.
표정이.
그때의 그 표정이.
그 혼탁한 눈빛이.
지하실의 문틈으로 대학살을 바라보던, 그 시절의 내 모습과 겹친다.
모든게 사라지고, 흩어지고.
점점 무언가를 잃어가는 그 느낌.
그러고선
쾅!
박살나는 화장실 바닥의 타일과 함께,
눈앞이, 암전됐다.
***Side 한서우
"...한서우라고 합니다, 잘부탁드려요."
주둔하고 있게 된 전초기지는 생각보다 엄청난 규모였다.
고작해야 천막 열댓개 정도만 있을거라 예상했던 내 눈앞에 펼쳐진것은, 평원을 가득 메우고있는 어마어마한 규모의 병기들.
세상 모든 초상능력자들이 한곳에 모이면 이런 모습이지 않을까 싶은 정도의 규모였다.
하긴, UN소속 초상능력자들 대부분이 다 유럽쪽으로 파병나오고있다는데, 천막 열댓개만 있을거라 판단한 내가 멍청했던건지도 몰라.
전투기도, 탱크도.
있을만한 병기는 죄다 이곳으로 모아둔 것 같은 엄청난 규모였다.
사람들은 모두 분주한 태도로 이곳 저곳 옮겨다니며 물자들을 실어나르고 있었다.
지금 있는곳은 배정받은 팀의 천막 앞.
아카데미 3학년생들의 담당 팀에 배정됐다.
이곳으로 파견나온 내 또래는 기껏해야 5명이 전부.
한국인은 나밖에 보이지 않는다.
그 사이에 간단히 소개정도나 하는 중.
"어... 그러니깐, 베이커 씨? 라고 부르면 되나요?"
"하하! 뭐 그렇게 딱딱하게 굴어! 그냥 필립이라고 불러라."
"초면부터 이름으로 불러도 되나요, 어른인데?"
"괜찮아, 괜찮아. 지금부터 같은 소속인데, 뭐 어떠냐."
"그나저나 이런 최전선으로 굳이 파견신청하는 견습생들은 많이 없는데, 대견하네~"
"하하하... 그냥 뭐, 경험도 쌓을겸..."
"경험쌓는 곳 치고는 꽤나 빡쎌텐데."
"첫번째 작전은 견습생들 파견 안시키잖아요."
"그래도 뭐... 여긴 최전선이다 보니."
"그건 그렇죠."
서로서로 잡담같은걸 하며 시간이 지나간다.
1시간정도는 비어있다보니, 이렇게 여유부려도 되는거겠지.
얘기를 하다보니, 이번 작전의 상세사항까지 넘어가게 됐다.
"...아무튼, 요점은 완전히 벽을 세워둔 마수들의 무리라는거지. 엄청난 양이야. 근데 너희도 알다시피, 지난달부터 마수의 화력이 미친듯이 급증했단 말이지. 물량은 그대론대, 마수 하나하나가 수십배는 더 강해졌다고 보면 돼."
"그래서..."
"그래. 그래서 사람이 이렇게나 많이 모여든거지. 솔직히 이정도 인원으로도 가능할지는 미지수야."
"그렇군요... 그럼, 내일부터 작전 시작인가요?"
"뭐, 그렇지. 우리로선 행운이나 바라는 수밖에."
작전 성공률이 미지수인 작전이라.
물량으로 밀어 붙이겠다는거구나.
어쩐지 안좋은 예감이 든다.
저번주의 그 달 위상 격변사태도 그렇고. 어쩐지 요즘은 불안한 징조들만 보이는 것 같아.
"야, 시간 됐다. 애들 준비시키러 나가야돼."
"아, 벌써 그렇게됐나?"
자리를 탈탈 털고 일어난 담당 팀은 천막 밖으로 나가버린다.
자기들 없다고 놀지말고 마음 가다듬고 훈련이나 열심히 하고있으라는 말과 함께.
결국 천막 안에는 나를 포함한 최전방 지원 견습생 5명만 남아버렸다.
어쩐지 분위기가 어색해. 이런 상황은 익숙하지가 않은데.
"음... 그래, 서우라고 했지?"
푸른 머리칼을 가진 남자애 하나가 나에게 말을 건다.
"옆에 그 검은 뭐야? 혹시 그게 무기야?"
"아, 응..."
"...신기하네, 초상능력자가 무기 갖고다니는 모습은 많이 본 적이 없는데."
"솔직히, 내가 A급이나 갈 수 있었던 이유가 이 검때문이니깐... 내 전부라고 봐도 무방하지."
"오? 초상능력이 뭐길래?"
"몰라... 공명이라고는 하는데, 대체 뭐랑 공명한다는건지."
"신기하네..."
그렇게 한참을 대검을 바라보던 남자애는 여자애 하나를 불렀다.
푸른 숏컷머리를 한 소녀.
머리색이 같은 걸 보니 아마 남매인 듯 하다. 둘다 3학년이었으니 쌍둥이 남매려나.
"이브, 혹시 여기서 뭐 특별한거 보여?"
"...? 뭐? 그건 갑자기 왜."
"그냥. 내가 보기엔 특별한게 하나도 없는 검이라서 말이야."
주인을 앞에두고 그렇게 이야기하던 그 남자애는, 잊고있었다는 듯 갑자기 날 바라보며 묻는다
"아, 혹시 괜찮으면 이브한테 살펴보게 해도 될까? 이브 초상능력이... 그런 부류의 초상능력이거든. 감지계열."
"응..."
"아무튼, 너한테도 도움될 것 같은데, 어때?"
"나야 뭐..."
"좋아. 이브."
"으... 알았어."
이브가 대검을 바라본다.
한참을 바라보는 듯 하더니, 어느새 이브의 눈동자에서는 청백색의 안광같은것이 서늘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그렇게, 이브가 초상능력을 사용한 그 순간.
"...흡!"
갑자기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버린 이브는, 대검을 침대에서 떨어뜨리고는 곧바로 고개를 돌리고 헛구역질을 하기 시작했다.
"...저기, 괜찮아? 물이라도 갖다줄까?"
"아니, 아니... 괜찮아."
"뭔데, 너 갑자기 왜그래."
"아니... 우읍!! 우웨에엑!!"
대꾸하려던듯한 이브가 대검쪽을 한번 더 바라보더니 이내 토악질을 하기 시작했다.
갑작스레 벌어진 소란에 저쪽 침대에서 누워있던 둘도 어느샌가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모습이다.
누워있던 금발의 여자애 하나가 한숨을 푹쉬며 일어나 손에 마법진을 그리자, 흙바닥 위에 쏟아졌던 토사물이 공중으로 떠오르더니 근처 쓰레기통에 쳐박혔다.
"으윽...아니, 미안..."
"...괜찮아."
"초상능력이나 그만 써. 그것때문에 그런거잖아."
"아, 참... 그렇지."
서슬퍼렇게 빛나던 안광이 사라지자, 그제서야 입을 땐다.
"대체 뭘 봤길래 그러는거야."
"...그래, 대체 뭘봤길래 그렇게 난리쳐."
"..."
얼굴이 굳어진다.
"이상해..."
"응?"
"저거, 검이 아니잖아..."
"그게 무슨 소리야?"
"어딜봐도 검인데... 성인 몸집만한 거대한 대검."
"..."
얼굴이 잔뜩 굳어진채 무언가 크게 고심하는 듯 보인다.
천막 안은 고요해져 밖에서 헬기가 돌아가는 소리와 사람들이 분주히 움직이는 소리밖엔 들리지 않는다.
"역시, 말해주는 편이 좋으려나."
잠시간의 고민끝에, 결정을 내린듯한 이브.
"서우라고 했지?"
"...응."
손가락으로 땅바닥에 떨어진 대검을, 아니... 군 고위장교들이 말하는 바로는 '코어'.
그 코어를 가르킨다.
"저건, 검이 아니라 심장이야."
"...뭐?"
천막 안의 공기가 더 싸늘하게 식어버린다.
내가 못들었을거라 판단한건지, 다시 한번 입을 여는 이브.
이번엔 확실하게. 단호한 음성으로.
"서우 네 검은, 무기가 아니라 거대한 거인의 심장이야."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