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화 〉 1부 11. 그거 아닌데
* * *
***Side 마스
"하아... 하..."
왼팔의 푸른 불길이 서서히 사그라든다.
붉은 머리카락엔 땀이 송골송골 맺혀 '나 지금 지쳤어요' 하는 분위기를 한껏 풍기는 중이었다.
지금 있는곳은 아카데미의 연습실.
아카데미에서 세번째로 거대한 시설이다.
정교한 마공학장치들이 마수의 환영을 만들어 실제와 유사한 전투를 체험하게 해주는 곳인데, 아마 최대한으로 활용하고 싶었겠지.
아무튼 그런 연습실에는 평일 저녁이라 그런지 나 혼자만 있다.
주변에는 마수들의 사체(환영)들이 수없이 늘어져있는 모습.
"..."
오른팔에 달린 의수에서는 여전히 불길이 잘 일으켜지지가 않는다.
아직까지 어색한 모양이겠지.
이것때문에 한서우는 저 멀리 유럽으로 파견까지 나가는데, 나는 아직도 여기 쳐박혀서 이런 꼴이나 하고있고.
"브라보~"
갑자기 목소리가 들려온다.
뒤를 돌아보니 저 멀리 휴식구역에 있는 누군가가 보인다.
"성화연?"
갑자기 여긴 왜 온거야.
평소에도 초상능력 탓인지 연습실에는 코빼기도 안보이는 녀석이.
"여긴 왜온거냐 갑자기."
"왜, 난 오면 안되냐."
"아니, 니가 여기에 오는 경우가 거의 없으니깐 그렇지."
"하긴, 그건 그래."
"뭐, 심심해서 오기라도 한거야?"
검은 생머리를 찰랑거리며 나에게로 다가오는 성화연.
손에는 무언가 종이같은걸 들고있다.
"...그게 뭐야? 보고서라도 쓰라고?"
"아니, 우리 조 파견임무 나왔어."
"아, 맞다."
그러고보니 지금 3학년 전체 파견주간이었지.까맣게 잊고있었네. 한서우 파견나갔을 때부터 눈치챘어야했는데.
"뭔 내용이야?"
"신종마약 유통경로 조사. 다른 조도 꽤 많이 달라붙었어."
"마약?"
"응, 마약. 부작용도 극심하고. 의존증상도 엄청 큰 악성마약이래."
"이름이 뭐래?"
"음... 잠깐만."
팔락
서류를 넘긴다.
"블랙...드림? 이라는데."
"되게 촌스럽네, 누가 지었냐 그거."
"몰라. 그냥 검거했을때 지들끼리 그렇게 부르고있었대."
"그럼 그... 블랙 드림이라는 마약의 유통경로 조사가 이번 파견임무냐?"
"응. 제인은 이미 조사 시작했어. 너만 역할배정하면 끝이다."
"그래... 뭐."
지금 당장 최전선에 나갈수도 없는데, 이런거라도 해야겠지.
내 사라져버린 오른팔이 그립다.
그것만 있다면 지금당장 최전선에 나가서 싸워도 별 문제 없을텐데.
"에휴..."
"...힘내라. 한서우가 특별한거지, 우리가 약한게 아니니깐."
"모르겠다, 나도."
"그냥 지금 니 앞에 있는 일이나 잘 처리해."
"그래야지."
그래도, 마음속에서 피어나는 이 무력감은 어떻게 할 수가 없으니까.
***Side ???
"히윽...끗..."
온몸이 너덜너덜해진 소녀가 눈앞에 뻗어있다.
대련실로 쓰는 폐건물은 벌써 군데군데 피가 흩뿌려져 섬뜩한 분위기를 풍기는 중이다.
"끅...쿨럭."
발끝에서 미약한 진동이 느껴진다.
...너무 심했나.
"..."
밑에서 헐떡거리는 소녀의 머리에 올려뒀던 발을 내렸다.
안죽는다고 그랬잖아. 파벨이 왜 나한테 이런 사실을 알려줬는진 모르겠지만, 적어도 자기 팔에 대한 복수를 해달라고 알려준 게 아닐까.
팔.
팔을 날려먹었다. 그것도 평범한 사람의. 그 대가에 비하면 이정도는 싼편이지. 사람 한명을 평생 불구로 만들어놓고서는 그저 6시간동안 쳐맞는게 다라니, 정말 관대한 처사야.
물론 순간적인 분노를 못이겨 감정적으로 행동한 것도 있긴 하지만. 이건 속죄다. 한참 부족한 속죄. 그냥 그렇게 생각하기로 한다.
빠각!
루시의 대가리를 발로 걷어찼다.
"일어나. 아직 안끝났어."
"...켁, 흑..."
일어날 생각을 안한다. 안죽는댔잖아. 다 낫는다고 그랬다, 분명히. 내 눈앞에서도 뼈가 삐걱거리며 재생하는 과정을 벌써 몇번이나 봤기도 하고. 이것도 다 엄살이다.
"...하아..."
수그려 앉아서 붉게 물든 소녀의 머리채를 붙잡는다.
"...야, 일어나. 당장."
"끄흐... 아..."
"지금 당장!!"
"히끅, 읏, 네...넷."
일어나려고 하지만 자꾸만 엎어진다. 다리가 비틀리는 각도를 보니 아마 뼈가 전부 박살났겠지. 상관없어, 저것도.
다리가 박살났던, 뭐던 상관 없다. 얜 다 상관없으니깐. 누구처럼 한번 부서진다고 끝도 아니고, 한번 잘려나간다고 끝도 아니다. 끊임없이 잘라내도 다시 생겨나는데, 그저 하나뿐인 평범한 사람들이랑 뭐가 같겠는가.
이런상황에서 고통을 논하고 윤리를 논한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이 애는 하나뿐인것을 영원히 날려버렸고, 그에 대한 죗값을 치르는중이다. 보이는 모습에 마음이 달라질 이유따윈 없다. 그냥 사람 자체가 한 일에만 집중하는거다.
...사람.
사람?
"...아 맞다, 넌 사람새끼도 아니었지."
문득 떠오른 그 사실을 조용히 뇌까린다.
"윽...네...?"
콰작!
그래. 사람새끼도 아닌 이것한테, 사람처럼 대할 이유따윈 없어. 원없이 팬다. 마음이 나아질때까지, 답답한 이 감정이 가슴속에서 싹 사라질때까지.
***Side 레프
숙소의 로비로 알비나가 들어왔다.
포대자루 하나를 어깨에 짊어지고 있는 모습. 온통 피로 붉게 물들어있다. 저 안에 든게 뭔진 불보듯 뻔하지.
알비나는 포대자루를 근처 직원한테 던져둔 뒤 그냥 많이 다쳤으니깐 대충 씻기고 적당히 옷이나 입히라는 말을 했다.
대체 왜 저렇게까지 심하게 한거지? 분명 그냥 적당히 시험하는 척만 해달라고 했는데?
"알비나? 입단테스트 치고 너무 심하게 한거 아니야?"
"...파벨 팔 한짝 날려버린 새끼한테, 뭘 자비를 베풀어. 니 친구잖아. 친구. 넌 화 안나?"
"...그것때문에 그런거야?"
"그것때문에 그런거냐니? 당연하지! 사람 한명 반병신으로 만들어놓고선 혼자 멀쩡하게 돌아다니는 꼴이라니, 말이 돼? 심지어 얘 사람도 아니라면서. 뭐가 문제야."
...아무래도 단단히 오해하고있는 모양이다.
분명 눈앞의 이 여자는 루시가 밖에서 아무일 없이 돌아다니던 무고한 우리를 다짜고짜 공격한 괴물로 알고있겠지.
심지어 우리한테 제압당해선 여기로 끌려오니깐, 뻔뻔하게 우리와 같이 일하고싶다는 말을 지껄인거고.
완전히 잘못 이해한게 분명하다.
애초에 루시가 우릴 공격한것도 우리가 먼저 루시를 죽일 뻔 했기 때문이고, 루시 본인도 자신이 마수라는 사실조차 몰랐는데.
아마 루시도 본래 사람이었을거다. 분명 모종의 끔찍한 사건을 겪고 마수로 변해버린거겠지.
본인조차 본인의 몸 상태를 보고 경악하는데, 이게 어떻게 마수라는 말인가.
이 사실을 알비나에게 설명해주자, 잠시 낯빛이 변하는게 보인다.
"...하지만, 파벨이 나한테 얘가 안죽는다는 사실까지 알려준건..."
"하아... 그건 그냥 얘 쓸만하다고 장점 어필하려고 그런거고..."
"..."
죄책감이 좀 느껴지시나.
표정으로 다 드러난다.
"그래도, 사람 팔 하나 날려버린 죄는 크다. 심지어 죽일뻔했다며."
"그건... 그렇지."
"그럼 쳐맞아도 싼거야. 사람 죽인다는게 그렇게 쉽게 용서받아선 안되는 일이라고."
"우리가 먼저 쟤 배 뚫고 온몸에 구멍낸것도 사실인데?"
"쟨 안죽잖아. 목숨의 가치가 달라."
"..."
어딘가 자기합리화같은 말만 계속하는 알비나.
본인도 속으로 엄청 갈등하고있기에 저런 말을 하는거겠지.
"...그래도, 나중에 가면 사과라도 해."
"지랄. 파벨 팔을 그 꼬라지로 만들어놨는데, 사과는 뭔 사과. 파벨은 평생 그렇게 살아야하고, 쟨 아니잖아."
루시는 이미 직원이 씻기러가서 없다.
무안해졌는지 알비나는 가르켰던 손으로 뒷통수를 긁기 시작했다.
"아무튼, 입단 자체는 문제 없으니깐, 그걸로 만족해라."
"고집은 진짜..."
"..."
알비나는 그대로 그냥 떠나버렸다.
***Side 루시
낯선 천장이다.
사실 낯선 천장은 아니다. 일전의 그 숙소와 비슷한 모양의 천장이야.
침대에서 일어난다.
몸에 진득하게 달라붙어있던 피는 어느샌가 말끔히 씻겨나가있고, 옷도 검은색의 엄청 거대한 후드티로 갈아입혀진 상태. 하의는...
누군가가 씻긴걸까.
"으으윽..."
온몸이 쑤신다.
하긴 뼈가 다 아작날정도로 쳐맞았는데, 이정도 고통은 당연한거겠지.
나름대로 억울하긴 하지만. 애초에 걔들이 먼저 나 조진거잖아.
"..."
이제와서 이게 다 뭔상관이야.
그냥 침대에 걸터앉아서 다른 생각이나 하기로 한다.
딴생각 할만한거야 최근에 있던 그 일밖에 없는데...
그 아저씨 둘이랑 처음 만났던 기억. 최근의 가장 강렬한 기억은 그것뿐이라 아무리 다른 생각을 하려고 해도 어느샌가 이쪽으로 빠져나와버린다.
생각은 어느샌가 흘러나와, 오른손에서 검붉은 거대한 광선을 쏟아내던 그때의 기억으로 넘어갔다.
검붉은 광선은 분명 마법이었다. 내 몸속의 마력이 내 의지대로 흘러나와 기동되던 마법.
그래, 마법.
의문은 넘쳐난다. 마법의 기본 상식부터가 근본부터 아작난 느낌이다.
도대체 어떻게 마법을 마법진도 없이 쓴걸까. 게다가, 원할땐 써지지도 않던게 갑자기 써지기 시작했다.
사실 마법의 발동 조건은 어느정도 짐작이 간다.
내 감정. 내 감정에 의해 마법이 움직이는 걸거다. 아마.
그때는 분노라는 감정에 의해서 마법을 썼으니깐, 아마 그쪽 부류겠지.
하지만 억지로 감정을 일으키려할때는 기껏해야 몸에 강화마법을 두르는 수준으로밖에는 마력이 안움직였다.
결국, 가장 강렬한 감정을 불러 일으켜야 한다는 소리인 것 같은데...
지금 와서야 가장 강렬한 감정이라고 해봤자 별로 느낄만한게 없다. 슬프지만.
그나마 강렬한 기억이라고 하면, 레프라고 하던 그 사람한테 배가 찢어지던 그 경험이 전부.
내 몸이 망가질때의 감정이 가장 격렬했다.
어쩌면, 그런 부류의 마법일지도 몰라. 혈마법이랑 비슷한거?
잘 모르겠다.
시험해봐야겠지. 모르면 보통 시험해봐야한다.
숙소의 침실 안을 둘러봤다.
그냥 적당히 콘크리트를 덮은 투박한 벽지, 너덜너덜한 침대 하나. 그리고 가구 몇개가 들어서있는 모습.
내 몸에 상처를 낼만한 유리조각 하나를 창가에서 찾았다.
꽤나 날카로워서, 조금이라도 닿으면 피가 새어나올듯한 모습.
그 유리조각을 손에 쥐고 다시 침대에 걸터 앉았다.
이걸...
이렇게...
손목에 갖다댄다.
"..."
마법을 쓰려고 자해한다니, 말이 되나.
아니, 애초에 내가 자해라니. 이것부터가 말이 안되잖아.
그래도, 알아내야하잖아.
눈 딱 감고, 이번만...
...
몰라, 안돼. 못해. 온몸으로 거부한다.
하지만 안돼. 해야해.
다시 유리조각을 손목에다가 갖다댄다.
"몰라 씨발. 될대로 되라지."
사각!
...손목에서 혈액이 배어나오기 시작했다.
곧이어 지끈지끈. 머리에 두통이 찾아온다.
뭔가 심장이 빠르게 뛰고, 몸이 뜨거워지는듯한 이 느낌.
그래, 이 느낌이야.
서둘러 몸의 마력을 움직여보기 시작한다.
'움직인다.'
움직여. 내 의지대로 마력이 움직인다.
몸에서 푸른 연기가 뿜어져나오며 이게 환상이 아니라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이러면 마법을 쓸 수 있는건가?
이런 감정을 계속해서 기억해두면?
똑똑!
땡그랑!
"...?!"
갑자기 노크소리가 나길래 화들짝 놀라 유리조각을 땡그랑 떨어뜨렸다.
갑자기 이 타이밍에 누구야. 영 안좋은 타이밍이다. 내 손목을 쳐다보니 어느샌가 피로 온통 붉게 물들어버린 모습이다.
이런 모습을 봐서야 그냥 나 혼자서 자해한걸로밖에 안보이잖아.
아니, 맞긴 맞지만 애초에 그런목적으로 자해한게 아니란 말이야.
상황이 영 아니다. 이런 타이밍에 누군가 들어오면 안돼.
벌컥!
하지만 내가 채 일어나기도 전에, 방문은 결국 열려버렸다.
열린 방문으로 들어온, 여성 하나.
...나를 엄청나게 쥐어패던, 그 여자였다.
***Side 알비나
레프의 이야기를 들으니 마음이 착잡해진다.
평범한 소녀였고, 자기들이 공격해서 그저 반격한 것 뿐이라니.
하지만 그런 말을해도 루시가 파벨의 팔을 잘라버렸다는 사실만큼은 변함이 없다.
여전히 분노해야 마땅한 인물.
하지만... 그래도.
본인 입장에선 억울할 거 아냐.
남이 먼저 공격해오고나선 그 복수라며 또 다시 자신을 공격해오다니.
게다가 본인의 입장은 전혀 이해해주지 않고 자신들의 입장만을 강요하며 마구 팬거야.
지금은 마수라지만, 분명히 예전에는 평범한 소녀일거라고 했었다.
"..."
...역시 죄책감이 드는건 어쩔 수 없다.
레프 앞에선 그렇게 말해버렸지만, 결국에 사과는 해야겠지.
전체적으로 나 혼자 분노해서 그렇게 미쳐 날뛰던 일도 있으니 말이다.
지금와서 생각해보니깐 너무 심하게 하진 않았나 하는 생각까지 든다.
쓸데없는 얘기를 들어버렸어. 그냥 완전한 악인으로 남아주는게 마음에도 편하고, 죄책감도 들지 않는데 말이야.
그래도 이제부턴 같이 일해야해.
마음속에 쌓인건 그냥 바로바로 털어버리자.
내가 사과해야 하는건 변함 없으니깐.
"후우..."
심호흡을 하며, 루시가 있는 방 앞에 섰다.
똑똑
노크를 한다.
땡그랑!
하지만 그 직후 들려오는, 무언가가 떨어지는 소리.
이게 뭔소리야. 뭔가 금속덩어리가 떨어지는 소리같다.
...금속덩어리? 갑자기 왜?
게다가 안에서 갑자기 딸꾹질소리까지 들려왔다.
마치 무언가 잘못한것처럼.
심지어 방금은 쇠붙이가 떨어지는 소리까지 들렸다.
"..."
확실하다.
분명, 무언가 떳떳하지 못한 일을 하고있었을거야.
레프나 파벨이 루시를 잘못 본 걸수도 있어. 알고보니 진짜로 쓰레기같은 놈이었고, 진짜로 뼛속까지 마수일 가능성도 있었단 말이야.
곧바로 들어가서 제압할 생각으로 문을 벌컥 열었다.
"딸꾹...!"
하지만, 곧 눈앞에 보인 광경에 나는 그만 할 말을 잃고말았다.
"아...?"
시야에 보인 광경.
바닥에 떨어진 붉게 물든 유리 한조각과붉게 물든 이불.
침대에 걸터앉아있는, 흔들리는 눈빛으로 날 올려다보는 작고 새하얀 소녀 하나.
그리고.
그 소녀의 손목에서 새어나오는...
새빨간.
피.
머리가 어질어질하다.
땅이 출렁이는것 같고, 눈앞이 뿌얘진다.
분명 저건... 자해의 흔적이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