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화 〉 1부 10. 미안해
* * *
***Side 레프
루시를 침대 위에 눕혀둔다.
파벨은 바로 병원신세라서, 지금 숙소에는 나와 루시 단 둘만 있다. 팔 자체의 회복은 불가능할거라서 의수를 달아야할지도 모른다는 소리를 들은 듯 하다. 그래도 파벨은 몸쓰는 타입은 아니니깐, 괜찮으려나...
덕분에 6개월간 번 셀이 전부 사라져버리긴 했지만, 죽는것보단 낫잖아.
Zzz
루시는 오기 전부터 어느샌가 곯아떨어져 있었다.
"후우...겨우 넘겼네."
한숨을 쉬며 중얼거린다.
겨우겨우 설득했어.
이런곳에서 밖에 혼자 돌아다니던 여자애라니, 솔직히 나같았어도 그렇게 쉽게 믿진 않았을거다.
루시의 뱃속에서 나온 정체불명의 덩어리 하나를 뇌물로 넘겼으니 망정이지.
알다시피 마수의 시체는 용병이나 부랑자들의 주 수입원이다.
마약의 원료가 되는 마수의 시체는 당연히 가공된 것보단 싸지만, 그래도 꽤나 비싸기 때문.
그걸로 어떻게든 넘긴 것 뿐이다.
나도 짐이나 정리하고 쉬기로 했다. 짐이 그닥 많진 않다는게 다행일까.
"...끄으윽..."
짐을 정리하다가 문득 루시가 신음소리를 내길래 시선을 돌렸다. 식은땀을 흘리며 끙끙대는 그 모습은 악몽을 꾸고있는건가 싶기도 하다.
루시가 입고 있는 흰색, 아니... 이젠 거의 다 피로 물들어서 붉은색으로 봐야겠지만. 아무튼 그 원피스는 여기저기 찢겨있어서 루시의 몸 상태를 여과없이 보여준다.
온몸이 흉측한 흉터로 뒤덮여있는 모습. 대체 어떤 삶을 살았길래 어린애 꼴이 저런건지.
분명 평범한 삶을 살지는 않았을 거라 짐작한다.
번뜩!
"...아."
"?!"
갑자기 루시의 눈이 번쩍 떠졌다. 놀래라.
"..."
루시는 멍하니 천장을 바라본다.
무언가 생각하는 듯한 모습.
한참을 그러고있다가,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저씨, 이름이 뭐에요."
"내, 내 이름?"
"네."
"...레프."
"레프 아저씨."
내 이름을 부르며 루시는 침대에 걸터앉는다.
"아저씨 뭐하는 사람이에요?"
"용병이지."
"용병이요?"
"그래, 돈받고 싸워주는 사람."
"그럼 돌아다니는 곳도 많겠네요."
"...그런 편이지."
용병이 돌아다니는 일이 사실 그렇게 많은 편은 아니다. 의뢰가 들어오기 전까진 백수나 다름없으니 대체로 마수가 가장 많이 출몰하는 여기 제1 안전구역에 짱박혀서 마수사냥이나 하고있을 뿐이지.
하지만, 그래도 다른 사람들보단 돌아다닐 일이 많은 건 사실이다. 안전구역에서 완전히 거주하는 사람들보단, 확실히 여기저기 많이 돌아다닌다.
이 덕분에 위험한 직종이기도 해서 수가 그리 많지는 않지만, 수익 하나만은 짭짤하다. 자신의 가족까지 다 부양하고도 남을 정도로 충분한 셀을 얻는건 보통 용병이나 우체부같은 고위험직종들 뿐이지.
아무튼, 돌아다니면 돌아다닐수록 수익이 많다. 이 뿐이다.
"레프 아저씨."
고개를 들어 내 눈을 마주본다.
"저도, 아저씨같은 일 할 수 있을까요."
"...뭐?"
"...그냥.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일."
"?"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일이라니. 용병이라는 일 자체를 잘못 판단한 거 아닐까 싶은데.
그리 말하려 했지만, 일전의 그 일이 떠올랐다.
죽을정도로 망가져도, 죽지조차 않고 끊임없이 재생하던 그 징그러운 모습.
확실히, 그런 능력을 가졌다면 밖에서 함부로 막 돌아다녀도 위험할 일 따윈 없을거다. 아마 죽음이라는 일 자체가 그리 특별한 일이 아닐지도 모르지.
그리 생각하자 갑자기 눈앞의 소녀에게 측은한 마음이 들기 시작했다. 이런 어린애가 벌써부터 그렇게 되버리다니, 너무 일찍 철이 든다는건 좋은 일일 수도 있지만, 적어도 본인에겐 그렇게 좋은 일이 아닐 수도 있다.
"아마, 너라면 가능하지 않을까."
"그런가..."
"솔직히 용병이 되는건 딱히 방법이 있진 않지. 그냥 자기 혼자서 나 스스로가 용병이라고 정의내리고 의뢰받아서 일 시작하면 그것부터가 용병인데."
하지만, 집단으로 활동하는 용병 조직과 개인적으로 활동하는 용병 사이엔 크나큰 차이가 있다.
사실상 현재는 가드가 대부분의 안전구역에서의 의뢰를 독점하고 있으니, 개인적으로 활동하는 사람의 밥줄이 다 끊긴건 사실이다.
그 점을 설명해주자 자신도 가드라는 곳에 들어갈 수 있냐고 물어보는 루시.
초상능력자는 대부분 받는다는 가드가, 솔직히 어린 여자애까지 받아줄거라 생각하진 않는다.
"...저 19...살 인데요?"
"..."
"아마도."
일단 말은 해보자.
실력만 확실히 증명된다면, 입단할 방법이 생길지도 모르니깐.
***Side 루시
솔직히 다 놔버리고싶었다.
지치고, 힘들어서.
하지만, 난 살고싶었다.
두번째로 얻은 이 삶이, 또다른 족쇄가 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피곤하고 지쳤지만, 난 살고싶었을 뿐이다.
아무것도 속박된 것 없이. 그냥 행복하게.
그렇게 살고싶었다.
그래서 그냥 살기로 했다.
내가 원하는대로.
그냥 그렇게 정했다. 스스로가.
갈 곳 없이 떠도는 여행자의 삶도 나름대로 멋진 삶이잖아요.
굳이 거창한 이유나 목표따위 필요 없어.
그냥 내가 행복하면 그걸로 된거야.
이 세상같은거 어떻게 되던 알바 아니지.
어차피 전부다 가짜인데.
전부다.
***
어쩌자고 내가 왜 용병같은거 한다그랬을까...
몰라, 어떻게 알아.
그냥 나 하고싶으니까 했을 뿐이야.
왜, 문제라도 있나? 없지. 내가 하고싶어서 하는건데.
빠악!
아무튼, 그래서 지금 입단테스트 명분으로 여기저기 부딪치면서 구르는 중입니다.
어린애랑 다 큰 성인 여자랑 싸워서 이겨보라니, 이게 대체 뭔소린지.
심지어 초상능력 쓰지도 말고 이기랜다.
뻐걱!
봐줄 생각도 안하나봐.
머리가 휙 돌아가버린다.
이래선 뭘 어떻게 하라는건지조차 모르겠다.
신체 스펙부터가 차이나는데.
갈비뼈가 완전히 박살났을 즈음에야 자리에 주저앉아버렸다.
"흣... 흐으..."
"벌써 지친거야 꼬마야?"
"하으... 아녀..."
"사람 팔 날려버릴땐 언제고 여기와서 이러고있어, 응?"
"제...제송함다..."
"......하."
뿌각!
파벨이라고 했던가. 내가 팔 날려버린 그 사람.
아마 그 사람이랑 친했던 사람인가보다. 하긴, 친한사람 팔 한짝 날려버렸는데 이정도 패는건 당연한거려나.
음, 나같아도 화날 일이다. 갑자기 친구가 생판 모르는 누군가한테 팔이 잘렸다니.
평생 불구잖아.
...지금은 그냥 참자.
마음껏 화풀이하게 냅두라지.
가슴속에 쌓아둬봤자 도움될거 하나도 없다.
빠각!
...조금 아픈거 빼면 문제될 것도 없으니깐.
으직.
어차피 시간 지나면 다 낫잖아.
콰직!
...이걸로 화가 풀어진다면, 그걸로 된거겠지.
***Side 한서우
[한서우 학생, 호출입니다. 지금 즉시 총장실로 와주시길 바랍니다.]
호출이 들어왔다. 아마 협회쪽에서 나온 사람들일거다.
또 새로운 파견임무라도 들어왔나보네.
"야, 한서우. 너 부르잖아. 가봐야지?"
화연이가 자고있던 내 어깰 두드리며 말한다.
"아, 어..."
머리가 아프다.
자고있을 때 어떤 꿈을 꾼 것 같은데, 기억이 안나.
하지만 기분나쁜 악몽이었다는 것 하나만큼은 기억난다.
악몽이라면 기억할 필요 없겠지.
어쩌면 지난 새벽, 전 세계적으로 난리가 났던 '그 사건'의 여파 때문일지도 몰랐다.
갑자기 뱀의 눈동자 형태로 변한 달이라니, 얼마나 소름끼치는 일인가.
밤에 보던 뉴스조차 갑자기 중단하고나선 속보를 내보내던 그때 상황이 머릿속에 상기된다.
무언가, 엄청난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예감.
달의 위상조차 역변시켜버린 그 괴현상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그 누구도 밝혀내지 못했다.
다만, 마수들이 처음 나타나기 시작한 그 무렵 벌어진 괴현상과 지나치게 유사하다는 점이 모두의 우려를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을 뿐이지.
사라진 마수들이 돌아올거라는 징조. 저 괴현상은 그것이라는 얘기조차 나돌기 시작했다.
알 수 없다. 아무것도. 그냥 달이 괴이한 눈깔형태의 무언가로 잠시 바뀌었다 뿐이지, 그 이상 무언가를 알아낼 정보란 없다.
아무튼, 거대한 마력의 파동이 그 날 다시 한번 일었다는것도 문제라면 문제랄까.
"아으..."
어째선지갑자기 루시가 머릿속에 떠오른다.
눈앞에서 마수의 등에 올라타던 그 모습이 머릿속에 다시금 떠올라 괴로워질 뿐이다.
이것도 악몽과 다를 바 없어.
방금 꾸던 악몽이 이런 내용일지도.
"..."
"야, 한서우."
"...아, 응. 가볼게."
"수고해라."
"그래..."
악몽을 꿔서 그런지, 어딘가 힘이 없어.
터덜터덜. 무기력한 발걸음으로 1층의 총장실을 향해 계단을 내려갔다.
.
.
.
"지난 밤에 일어난 사건은 너도 알고있지?"
중년의 여성장교 한명이 맞은편 소파에 앉아 얘기를 꺼낸다.
알고있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거리자, 서류첩 하나를 꺼내두는 주아 소령님.
"어제 일어난 그 거대한 마력파동의 근원지를 찾아냈어. 일전의 그곳이랑 거의 비슷한 위치야."
"아..."
"그래서 우린 연구자들의 본거지에서 일어난 어떤 실험의 여파일거라고 추측하고있어.
"그래서, 혹시 파견 문제로..."
"맞아. 얘기가 빠르네. 너도 알다시피, 유럽쪽은 이미 개판이지. UN소속 초상능력자 대부분이 그곳에 파견나가있는데도 전황은 나아질 기미를 안보이니깐."
"하지만, 일주일 전부터 마수들이 사라지기 시작했어. 숨통이 트이기 시작했고. 하지만 어째선지 동쪽으로 향하는 땅이 전부 막혀버리기 시작한거야. 마수들로."
"의문은 여기서 시작됐지. 어째서 마수들이 아시아대륙을 완전히 봉쇄하기 시작한걸까. 본래 날뛰던 전장을 버리고선 말이야."
"그런 의문을 가지던 차에, 두번의 마력파가 발생된거야. 마수들로 봉쇄된 그 대륙 안에서. 심지어 한번은 저 달의 위상조차 완전히 달라지게한 대 사건이었고 말이지."
아무튼, 연구자들의 급작스러운 후퇴와 연관됐다는 점, 그 두번의 마력파동이 심상치가 않은 징조라는 점을 들어 나를 학기중에 파견보내기로 했다는 결정이 내려왔다는 말을 하는 주아 소령님.
너무 멀리 나가는 파견이다.
유럽이라니. 아마 당분간 아카데미에는 발조차 들여두지 못할 가능성이 커.
화연이랑 마스한테는 미리 말해둬야겠지.
마스는 오른팔이 의수라 유럽쪽같은 최전선에서는 힘들지도 모른다.
연구자들의 본거지와 연관되어있다는 말을 들으면 발광할지도 모르니, 일단 이 사실은 숨기자.
어쩌면 이 기나긴 전쟁도 이젠 막을 내릴 시간이 온 것 같다.
루시는 여전히 어디있는지조차 모르지만, 그래도 눈앞의 적들을 하나하나 쓸어버리다보면 언젠간 만날 수 있겠지.
후일을 기약하며, 현재를 그리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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