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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해주세요, 마수님!-9화 (9/162)

〈 9화 〉 1부 5.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거지?

* * *

무기력하게 아무것도ㅡ

내가, 뭘.

내가 뭘 하며 살아가고, 뭘 하며 살아갔더라.

아니, 지금.

눈앞에 세상이 있는지조차 알 수 없는데.

어쩌면 그저 지독한 어둠속에서 모든것이 그저 내가 만들어낸 환상이 아닐까 싶을정도로.

비현실적이고,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

시간감각조차 붕 떠버리고, 한순간에 1초가 지나가고, 수백년이 지나가고, 수만년이 썩어간다.

푹신하고, 미끄럽고, 따갑고, 아프고, 뜨겁고, 아프고, 아프고, 아픈.

아파ㅡ

아프다는게, 감각인건가? 지금 내가 느끼고있는건 감각인건가?

몰라, 모르겠어.

감각을 상실한지 오래된, 어쩌면 먼 옛날의 이야기.

모든것이 그저, 내 머릿속에서 외로움에 내가 만들어낸 환상이라고 생각하고 있을때.

눈이 멀었다.

살이 찢어지고, 고막이 터졌다.

아무것도, 안보이지만.

분명 무엇인가, 이 감각은.

멋대로 폭주하는 이 끔찍한 감각은 분명히.

어디선가 느껴본 적 있는ㅡ

*

"아..."

별이다.

응.

눈앞에 아름다운 은하수가 쏟아져내린다.

세상이다.

세계.

눈앞에 세계가 펼쳐져있다.

사라졌던게 아니야.

살아있다.

다 느껴진다.

강렬하다.

너무나도 강렬하게.

땅에 닿은 등이 깨질 듯 아프고, 귓가에 스치는 바람소리가 대포소리처럼 거대하다.

눈동자속에 쏟아지는 저 별들의 불빛들은 너무나도 밝아서 눈이 멀 것만 같다.

그리고, 냄새가 난다.

본래의 냄새가 아니라. 정말로 다른 냄새.

공기냄새야.

공기.

대기의 냄새가 난다.

이질적인 대기의 향기.

몸에서 강렬하게 뿜어져나오는 라벤더향은 도저히 어찌할 도리가 없지만.

적어도 내 코에는. '루시'의 코에는.

대기의 냄새가 훨씬 강렬하다.

무심한듯 존재감을 과시하는 미칠듯한 대기의 향기.

"...아아..."

목소리가.

내 목소리가 들린다.

가늘면서도 떨리는 목소리.

"...벼리다..."

'별이다' 라고 말하려했는데.

말투가 뭔가 어눌하다.

왜이러는걸까.

내 의지로 너무나도 오랜만에 말해서 그런걸까.

의문은 뒤로한채, 몸을 살며시 일으켜본다.

"끄으윽..."

고통이 너무 심하다.

갑작스레 찾아온 강렬한 감각들은, 온몸에 끔찍한 고통을 안겨줬다.

근데, 좋다.

좋아.

이 모든게, 너무나도 좋다.

"조금만... 누워있다 가까..."

입을 움직이는 연습을 해보기 위해서라도 혼잣말은 해봐야겠지.

그래. 좀만 누워있다 가자.

무슨 일이 일어난건진 모르지만.

왜 갑자기 이런 하늘이 보이는건진 모르지만.

살아있다.

난 살아있다.

그 점을 지금 내 온몸을 통해 강렬하게 느끼는 중이다.

"하하, 하하하...! 히힛!"

웃음이 나온다.

웃음.

웃음이... 주체할 수 없이 터져나온다.

참지말자. 지금은.

좋잖아.

"헤헤헤..."

하늘에서 쏟아져내리는 별빛들을 온몸으로 느끼며.

대기의 냄새를 온몸으로 느끼며.

땅바닥에 쓸려 까진 등의 고통을 온몸으로 느끼며.

내가 살아있다는 걸 느낀다.

***

생각하기가 싫다.

하면 할수록 귀찮아지기만 해서.

다 그만 두고싶다.

그래.

다 그만두고싶어.

그럼 그만두면 되는거지.

굳이 복잡하게 살아서 뭐해.

흘러가는대로 살면 사는대로 생각하게 된다지만, 그것도 뭐 딱히 나쁘진 않으니깐.

방랑벽 걸린 여행자도 나름대로 멋있는 삶이잖아요.

***

­터덜터덜

정신을 차리니 발이 아프다.

이게 뭔일인가 싶어 가던길을 멈췄다.

'가던길...?'

눈앞엔 지평선 끝까지 펼쳐진 도로가 펼쳐져있다.

고속도로인가?

"아으으..."

머리아파.

모르겠다.

그냥 일단은 보이는대로.

난 지금 눈덮인 설원의 한가운데를 가로지르는 도로 한가운데에 서있다. 아마 고속도로겠지.

근데, 설원이라니?

"엣취!"

존나 춥다.

설원이라는 걸 깨달으니 갑자기 온몸이 바들바들 떨리기 시작했다.

"여기가, 어디야..."

모르겠다.

그냥 가던 길이나 계속 가자.

당장 뭘 알 수 있는것도 없으니 말이야.

.

.

.

"저게 먼말이야..."

발음이 여전히 어눌한데.

언제쯤 익숙해지려나 이거.

지금 내가 보고있는건 표지판.

괴상한 언어가 쓰여진 표지판이다.

도로를 따라 걷다보니 나온건 완전히 폐허가 되버린 대도시 하나.

버려진듯한 고층빌딩에 눈이 쌓인 이 광경은 어딘가...평화롭다.

평화로워?

나 진짜 미친건가.

보통 폐허가 된 도시를 보고 이런 감상이 들던가.

"..."

...이상한 건 아니겠지.

아마 대부분이 비슷하게 느낄거야.

아무튼, 지금 내 눈앞에 보이는 저 표지판.

저 표지판에 써져있는 글자는 내 눈이 이상한게 아니라면 분명 러시아어다.

노어. 러시아어.

한국어는 절대 아니야.

"미, 친..."

조용히 내뱉은 그 욕짓거리는 고요한 도시 안에 울려퍼져 메아리가 됐다.

러시아라니.

멀어도 너무 멀잖아.

맞아, 너무 멀어.

근데, 멀다니. 어디서?

한국에서.

한국에서 멀다는 걸 왜 안좋다고 느끼는거지?

사람들을 못만나니깐.

아는 사람이던 모르는 사람이던.

...사람을 꼭 만나야하나.

...그러게.

꼭 만나야하나?

따지고보면 애들 한꺼번에 전쟁하러 몰려온것도 내가 들켜서잖아.

언뜻 들으면 자의식 과잉일지도 모르겠지만 지들이 그렇게 말했으니 빼박이다.

"..."

갑자기 주제가 너무 무거워졌어.

역시 이건 잘 모르겠다.

저번처럼 그런일이 또 없게 하려면 정체를 숨기고 다녀야하나.

광대라던지, 연구자들이라던지...

이것도 잘 모르겠다.

차라리 가면을 쓰고다닐까?

이것또한 잘 모르겠다.

죄다 모르네 무슨.

뭐, 길이라도 계속 따라 걷다보면 어떤 일이던 일어나겠지.

좋은 일이던 나쁜 일이던.

그리 생각하며 회백색의 차가운 도시속으로 발걸음을 겼다.

***Side 이유리

"당장이라도 사냥개들 풀어야 하는거 아니에요?"

"어디갔을 줄 알고."

"적어도 그런 여자애라면 멀리 못갔을거에요. 제1기지에서 가장 가까운 대피구역부터 수색해보는게 어떤가요?"

"알파가 뭘 알고 그런곳에 갔을거라고 생각하는거지?"

"하지만, 그냥 텅 빈 곳을 무작정 수색하는것보다는..."

시끄러워.

머리아파.

그만좀 건드리란 말이야.

멍하니 천막 밖으로 나왔다.

.

.

.

허무하다.

대체 왜 이런 감정이 느껴지는거지.

보통은 해방감과 성취감을 먼저 느껴야하지 않나.

어쩌면, 20년간 지속된 전쟁이 한순간에 끝나서... 일수도 있다.

"...하아..."

20년 넘게 지속해온 전쟁이 끝났다.

전쟁은 끝났고, 더이상 사람이 죽을 일은...

"..."

"하아..."

하늘로 담배연기가 스며든다.

보통 전쟁이 끝나면 사람이 죽을 일은 사라질거라 예상한다. 틀린말은 아니야.

다만, 연구자들 자체가 본래의 것의 아바타라에 불과하다는것이, 예외라면 예외.

아바타라가 사라지면, 남는건 결국 본래의 것 뿐이니깐.

아바타라가 사라졌으니,더이상 어떤 방향으로 세상이 흘러갈지 예상조차 안된다.

그리고, 무엇보다...

알파.

알파가 탈출했어.

완성형의 직전단계인 알파가 세상밖으로 던져졌다.

어떠한 계약도 없이, 그냥 본체 그 자체로.

도대체 무슨일이 벌어지려는걸까.

"...알게뭐야."

...비겁자같으니라고.

눈앞에 있을땐 그렇게도 걱정했더니만, 막상 눈앞에서 사라지니 이성적으로만 판단하려 드는건가.

역시 난 비겁자다.

어린 아이를 끔찍하게 망가뜨려 놓고서는, 막상 그 아이가 눈앞에 없으니 그 감정마저도 모두 잊는 꼴이라니.

모든게 거짓이었다.

가식이고, 위선이었다.

"씨발..."

연구자들(구)처럼, 공감능력이라도 없었다면 이런 더러운 기분따위 안느껴도 됐을텐데.

원망스럽다.

나라는 존재 자체가.

***Side ???

폐허가 된 빌딩을 여기저기 보수해서 만든 이 식당은 항상 사람이 붐빈다.

제1기지 최근방 안전구역 내에 단 하나 존재하는 식당이기도 하고, 무엇보다 음식의 질이 이런 환경에서 만든 것 치고는 상당했으니깐.

식당 주인 아주머니의 아들이 '가드'의 일원이라는게 아마 큰 몫 하지 않았을까.

"아줌마! 여기 보드카 세병만 주쇼!"

"대낮부터 뭔 술이야! 일 없냐?!"

말은 그렇게 하지만서도 결국은 내오는 아줌마.

"파벨 걔는 잘하고있대냐? 요즘따라 소식이 없더만."

파벨. 아주머니 아들의 이름이기도 하고, 내 절친의 이름이기도 하다.

"요즘 일 없어요. 싹 숨어버렸어. 코빼기도 안보이더라구요."

"하, 어쩐지. 요즘 연락 뜸한 이유가 그것 때문이었구만."

"뭐, 살아는 있으니깐 걱정 안해도 되요."

"그려, 무리하지 말라고만 전해둬라. 돈 그리 많이 필요없으니깐. 어차피 식당도 잘되고말이야."

그리 말하며 아주머니는 다시 주방으로 들어가셨다.

그럼, 즐겨볼까.

.

.

.

식당 내부가 소란스러워진건 대략 30분 뒤즈음.

웬 사내 한명이 앉아 떠들고 있는곳에 사람이 몰려들어 열심히 듣고있었다.

"...그러니깐! 그 시꺼먼놈이 갑자기 내앞에 나타났다니깐!"

...시꺼먼놈?

마수인가?

마수는 일주일 전부터 완전히 안나타나기 시작한게 아니었나?

자연스레 그쪽으로 주의가 집중된다.

"...다행히도 증발하고있던 놈이라 다행이었지. 근데 증발하기 전에 사람 한명 먹어 치운모양이야. 입에 웬 어린애 팔 하나가 물려있더라고."

"세상에! 혹시 우리 구역에서 실종된 어린애 있나?"

"멍청아! 애초에 우리구역엔 어린애가 있을리가 없잖냐!"

"아, 그랬군."

"그래서, 다음은 어떻게됐나?"

"정신없이 튀었지. 별 수 있나. 그때당시엔 증발단계에 있다는것도 눈치 못챘고말이야. 그래서 시체 회수는 못했다."

...!

시체회수를 못했다?!

그 귀한걸?

약중의 끝판왕이라 불리는 블랙 드림.

그 원료가 되는 마수를 그냥 두고왔댄다.

위치는 정문에서 1km떨어진 구간.

위치까지 순순히 말하는 그 모습에, 모두가 순간 의아함을 감추진 못했지만, 결국에 이건 밑져야 본전이잖아.

이거...

이거 땡잡았네, 완전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다.

주변에서도 가드소속 인원 몇이 비슷한 타이밍에 일어나는게 보인다.

다들 같은 생각이겠지.

할 일이 생겼어.

모두가 우당탕거리며 식당 밖으로 뛰쳐나간다.

레이스라도 하는건가.

맞다.

그래, 이건 레이스야.

돈과 목숨을 건 레이스다.

.

.

.

제1 안전구역.

연구자들의 본거지에서 가장 가까운곳에 위치한 대피구역이다.

가장 가깝다고 해봐야 거진 10km가까이 떨어져있지만.

폐허가 된 도시를 여기저기 기워만든듯한 이 도시의 형태는 어딘가 불안정하다.

다만 사람은 많아 그 점을 보완해주고 있을 뿐이지.

그냥 전체적으로 뒷골목같은 분위기를 풍긴다고 보면 된다.

애초에 여기 모인 사람이라고 해봐야 다 살기위해, 고립된 이 대륙에서 탈출하기위해 발버둥치고 있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니깐.

나도 그중 하나일 뿐이고.

서둘러 뛰어가, 여관 문을 박차고 들어간다.

"파벨! 일이다! 당장 일어나라!"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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